종교
1. 종교
정부는 처음 왕정복고에 의해서 ‘신무창업(神武創業)주 956의 때’로 돌아간다는 취지에서 제정일치의 입장을 취하여 신무관(神武官)을 부활시키고 많은 국학자, 신도가를 등용했다. 그리고 선교사(宣敎使)를 두어 신도를 중심으로 국민교화를 지향하여 1870년 ‘대교선포(大敎宣布)의 조(詔)’를 발포하고 이어서 신사제도(神社制度)를 만들어 신사의 직무를 정하고 제사의식을 통일하는 등 정부의 보호 아래 신사신도(神社神道)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1869년 보신(戊辰)전쟁의 전사자를 합동으로 제사하기 위해 정부에 의해 설치된 초혼사(招魂社)가 1879년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로 개칭되어 별격관폐사(別格官幣社)로 자리잡게 되었다.주 957
이러한 과정에서 천황의 친정(親政)이 강조되어 국민에게도 천황이 옛부터 일본의 통치자였다고 하는 선전이 행해져 천황의 신격화가 진행되었다. 천장절(天長節), 기원절(紀元節)이 국가의 축제일로 정해진 것도 이러한 의도의 하나였다.
또 1868년 정부에서 나온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을 계기로 폐불훼석(廢佛毁釋)의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절, 불상, 경전 등이 파손당하거나 불타버려 불교계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신도에 의한 국민교화와 불교의 배척은 국민에게 충분히 수용되지 않아 점차 퇴조했다. 1872년 신기성(神祇省)은 교부성(敎部省)으로 개칭되고 불교의 승려도 교도직(敎導職 ; 선교사의 후신)에 임명되도록 했다. 그러나 교부성도 이렇다할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1877년에 폐지되었다.
한편 기독교는 새 정부 수립 후에도 여전히 금지되어 나가사키의 우라카미[浦上]에서는 많은 신도가 체포되어 개종을 강요당하는 우라카미 신도탄압사건이 일어났다. 외국은 이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는 한편,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주 958일행이 구미를 시찰할 때, 기독교 금지가 조약개정 교섭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메이지정부는 기독교 금지를 풀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천황의 친정(親政)이 강조되어 국민에게도 천황이 옛부터 일본의 통치자였다고 하는 선전이 행해져 천황의 신격화가 진행되었다. 천장절(天長節), 기원절(紀元節)이 국가의 축제일로 정해진 것도 이러한 의도의 하나였다.
또 1868년 정부에서 나온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을 계기로 폐불훼석(廢佛毁釋)의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절, 불상, 경전 등이 파손당하거나 불타버려 불교계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신도에 의한 국민교화와 불교의 배척은 국민에게 충분히 수용되지 않아 점차 퇴조했다. 1872년 신기성(神祇省)은 교부성(敎部省)으로 개칭되고 불교의 승려도 교도직(敎導職 ; 선교사의 후신)에 임명되도록 했다. 그러나 교부성도 이렇다할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1877년에 폐지되었다.
한편 기독교는 새 정부 수립 후에도 여전히 금지되어 나가사키의 우라카미[浦上]에서는 많은 신도가 체포되어 개종을 강요당하는 우라카미 신도탄압사건이 일어났다. 외국은 이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는 한편,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주 958일행이 구미를 시찰할 때, 기독교 금지가 조약개정 교섭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메이지정부는 기독교 금지를 풀었다.
- 각주 956)
- 각주 957)
- 각주 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