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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중 아나키스트의 국제 연대

3. 재중 아나키스트의 국제 연대

중국내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독립운동가 각 개인과 각 단체가 자유의사에 의해 연합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자유연합’ 을 가장 효과적인 독립운동 방안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원칙 아래 중국내 한인 아나키스트인 이정규(李丁奎)·이을규(李乙奎)주 926
각주 926)
이정규는 북경대 생물학과 교수인 리스쩡과 총장 차이위안페이의 도움으로 경제학과 2학년에 편입해 공부할 때 러시아인 에로센코와의 교제중에 감화를 받아 아나키즘에 공명했다고 한다. 친형인 이을규도 ‘한국의 크로포트킨’이라는 별명이 있으며 비슷한 경로를 통해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조세현(2010),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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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와 신채호·이회영주 927
각주 927)
이회영은 1919년 2월 북경으로 망명하였으며, 이때부터 민족주의로부터 점차 아나키스트로 선회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이 상해에 모여, 이회영을 의장에 추대하고 의열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1932년 만주에 연락근거 마련 및 주만 일군사령관 암살 등을 목적으로 대련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무자비한 고문에 의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이회영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第4卷, 國家報勳處,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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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은 함께 1921년 한국인의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아나키즘과 민족주의를 대립적인 개념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많은 한인들이 해외기지를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듯이, 한인 아나키스트들도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 공간인 중국에서 중국인 아나키스트뿐 아니라, 일본과 대만·러시아 등 여러 나라 아나키스트들과 연대활동을 벌였다.
이회영
※자료 연계

1923년 재중 한인과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은 국제연대 활동으로 이상촌 건설을 추진하였다. 이상촌 건설에 앞장선 이정규 등은 크로포트킨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목표하에, 중국인 아나키스트주 928
각주 928)
이상촌 건설을 주도한 중국인 아나키스트는 루쉰[魯迅]의 동생 周作人이다. 그는 일본 유학중 아나키즘의 ‘반제 반군벌 반절대권력 만민평등’이라는 사상과 이상주의문학파인 「백화파(白樺派)」가 주창한 ‘개성의 해방과 존중, 생명의 창조력을 믿으며, 권력을 반대하고, 새로운 윤리와 도덕의 이름을 찾는다’는 이상주의를 수용하였다. 周作人은 1919년 백화파들이 큐슈[九州]지방에 건립한 이상촌인 ‘신촌(新村)’에 가서 직접 ‘자연 속에서의 노동의 신성’ 함을 체험하고 귀국하여, 1920년 2월 ‘신촌운동(新村運動)’ 북경지부를 설치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김시준(1997), 133~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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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합작하여 호남성(湖南省) 한수현(漢水縣)에 이상촌인 ‘양도촌(洋濤村)’ 을 건설했다.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공동경작·공동소비·공동소유하는 협동조직체를 구상한 것이다. 이들은 인삼 같은 특수작물 재배를 계획하고 한국으로부터 인삼 경작 농부를 이주시켜 한중합작의 이상촌락을 건설하려 하였으나 호남성에 내분이 일어나 무산되었다(구승회 외, 2004: 231). 이후 이정규 등 한인들은 상해에 가서 공장이나 회사에 공회를 조직하는 등 노동운동을 하였고, 5·30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한편 1924년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국공합작’ 후에 원로 아나키스트의 대표격인 리스쩡·차이위안페이 등이 모두 국민당에 가입하는 이른바 ‘안국합작’ (아나키스트와 국민당의 합작)이 이루어지면서, 중국의 아나키스트 운동은 변화를 맞이했다. 그들은 여전히 아나키스트라고 자부하면서, 중국 국민당의 지원 아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주 929
각주 929)
국민당에 가입한 리스쩡 등은 국민당 극우파의 백색테러나 볼세비키의 공격에 대비하여, 중국과 한인 아나키스트를 보호·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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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4월에는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이 결성되어 『정의공보』를 간행하였다. 창립맹원은 이회영·이을규·이정규·백정기·유자명·정화암 등이다.주 930
각주 930)
이때 신채호는 북경에서 역사편찬에 몰두하고 있었고, 유림(柳林)은 성도(成都)대학에 재학중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편(1987). 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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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북경사대교수 루쉰 형제(周樹人·作人·建人), 러시아 맹인시인 에로센코, 북경대학 교수 리스쩡, 북경대학총장 차이위안페이 등이며, 대만의 혁명동지(范本梁) 등과도 긴밀한 접촉을 갖는 등 한국·중국·대만 동지들의 국제적 제휴에도 주력하였다(無政府主義運動史편찬위원회편, 1987: 288~289). 1924년 10월에는 북경 민국대학에서 아나키스트 연대조직 흑기연맹(黑旗聯盟)이 결성되었는데, 유기석(柳基石, 일명 柳絮)·심용해(沈龍海)등 한인과 중국인들(向培良·李沛甘·高長虹 등)이 참여하였다. 흑기연맹은 1925년 봄부터 북경대 총장이던 차이위안페이와 민국대 이사장이던 장지, 리스쩡, 우즈후이[吳稚暉]등의 지원으로 『동방잡지(東方雜誌)』를 발간하였다(구승회 외, 2004: 212). 중국에서 북벌전쟁이 한창이던 1926년 말에도 중국 무한에서 중국·조선·인도 대표들이 참석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가 성립(이후 남경으로 옮김)되는 등 연대 활동이 이루어졌다(황동연, 2005: 147).
1920년대 후반 동아시아 세 나라의 아나키즘 연대활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상해 노동대학 건설, 복건(福建)지역의 농민자위군 운동, 동방무정부주의자(東方無政府主義者)연맹 조직 등을 들 수 있다. 1927년 상해노동대학 건립에는 이정규·이을규 등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중국인(沈仲九) 뿐만 아니라 이와사 사쿠타로 등의 일본인 아나키스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상해노동대학은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적 연대의 실험장이었으며, 교육으로 아나키즘 사회를 건설하자는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오랜 집념을 담은 뜻 깊은 공간으로 평가받고 있다(조세현, 2001: 147.149). 1928년 복건지역의 농민운동에는 이정규가 중국인 동지(梁龍光과 秦望山)의 요청으로 참여하였다. 복건 농민운동은 토비와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농촌조직을 보호할 인재양성을 위해 ‘선전원양성소를’ 설치했는데, 농촌운동의 방향을 지도해줄 교관이 필요하였다. 이정규는 의열단 출신인 이기환·유기석과 함께 강의를 시작하였고, 이정규가 정치주임, 이기환이 학생대장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농민의 무장향토자위조직을 결성했으나 토비들의 공격과 자금 부족으로 와해되었다(구승회 외, 2004: 232). 1928년 5월 상해로 철수한 이을규·정규 형제와 정화암·유기석 등은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다.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은 아주화친회와 사회주의강습회의 전통을 이어 받아 1928년 결성된 아나키스트 연합체이다. 동방무정부의자연맹의 결성을 위해 1927년 9월 북경에서 한국·일본·중국·대만·베트남·인도 등 6국 대표자 120명이 참가하여 대회를 가졌고,주 931
각주 931)
국제연대에 앞장섰던 신채호는 이 대회에 한국 대표로 이필현과 함께 참가하였다.이호룡(2003),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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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4월 천진에서 개최된 각국 아나키스트 대표대회를 거쳐, 6월 상해 프랑스 조계내의 화광(華光)의원에서 한국·중국·일본·대만·인도·베트남·필리핀 등 7개국 대표 200여명이 회합 하여 창설하였다. 서기국 위원으로 한국의 이정규 외에도 일본인(赤川啓來), 중국인(毛一波. 汪樹仁)을 선출하고 『동방(東方)』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였다(안종수, 2006: 26). 이들은 동아시아 각 나라의 아나키스트들이 단결해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고 자유연합의 조직 원리 아래 민족의 자주성과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는 이상적인 사회건설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다.주 932
각주 932)
조세현(2001), 「동아시아(한·중·일) 아나키즘의 비교」,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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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규는 동방무정부주의자대회를 개최하는데 주역이 되어 선언문을 작성하였다.주 933
각주 933)
이정규는 1924년 9월 이후 4년여간 상해에 거주하였으나 1928년 10월 일본경찰에체포되었다. 광복직후 귀국하여 1945년 9월 서울에서 무정부주의운동의 총체인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조직하였다. 1946년 이후 국학대학과 성균관대학에서 교편을잡았다. 1958년 청주대학 총장과 1963년 성균관대학 총장을 역임하였고 1966년 퇴임 후 1984년 87세로 서거했다. 김시준(1997),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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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은 이 대회에「한국의 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 ‘한국 무정부주의운동은 곧 약소민족의 진정한 해방운동이요, 한국민족의 진정한 해방운동은 곧 무정부주의운동’ 인 까닭으로 각국 동지들이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의 글은 대회 결의안 중 하나로 채택되었다. 이같이 이회영은 아나키즘을 한국의 독립운동과 같은 차원에서 바라보았다(김명섭, 2007: 131.132). 이회영 뿐만 아니라 신채호 등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사이에 이론상 모순이 없다고 인식하였다.주 934
각주 934)
신채호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방법으로 무정부주의를 택하였다. (신채호, 「공판기록」 『단재신채호전집』(하), 428쪽 ; 신복룡(2007),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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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의 아나키즘 운동은 1927년 장제스의 4·12 쿠데타 이후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장제스의 국민당이 극우노선을 걷자 아나키스트와 국민당의 합작은 종결되었다. 일부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중국의 원로 아나키스트의 활동에 적극 동참했고, 일부는 독자적인 길을 갔다. 1930년대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남화한인연맹(南華韓人聯盟)을 결성하였다. 1920년대 후반 신채호·이정규·이을규 등이 잇달아 체포되거나 살해당하자, 유서(柳絮)주 935
각주 935)
유서(柳絮, 유수인 또는 유기석, 1905~1980)는 황해도 금천출신으로 중국 길림성연길에서 공부했다. 1916년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남경 화중공학을 졸업 후 민족주의 단체에 가입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북경에서는 일제의 한국 중국 침략을 반대하며 조선흑기단(민국대학의 흑기연맹)과 관련을 맺었으며, 뤼신과도 왕래하였다. 아나키즘 활동에 적극적인 그는 항일기 언론계와 교육계에서 활동했으며, 해방후인 1952년 강소(江蘇)사범학원 역사과 교수를 지냈다. 박난영(2008),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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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청년 아나키스트가 중심이 되어 만든 조직이다.주 936
각주 936)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유서 외에 정해리(鄭海理)·김광주(金光州)·원심창(元心昌)·박기성(朴基成)·이용준(李容俊)·유산방(劉山芳)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으며, 이회영도 관련을 맺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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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화한인연맹은 주로 한·중 연합투쟁을 전개했는데, 몇 개의 테러조직을 만들어 천진의 일본영사관에 투탄, 주중국 일본대사 암살기도 등 일제와 친일분자를 응징했다. 한편 다른 한인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신채호는 제국주의적 전쟁에 대한 철저한 저항을 부르짖으면서,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연대해야 한다는 중국인 아나키스트의 주장을 거부하였다. 이는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국외에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한 운동가로서의 신채호와 반식민국가 중국인 아나키스트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과 중국 아나키스트의 연대와 활동은 제국주의 전쟁에 저항이라는 공통점을 갖지만, 자국이 처한 상황에서 차이점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반전활동이 갖는 다층적인 의미와 ‘지역적 특수성을’ 보여준다(박난영, 2008: 86).

  • 각주 926)
    이정규는 북경대 생물학과 교수인 리스쩡과 총장 차이위안페이의 도움으로 경제학과 2학년에 편입해 공부할 때 러시아인 에로센코와의 교제중에 감화를 받아 아나키즘에 공명했다고 한다. 친형인 이을규도 ‘한국의 크로포트킨’이라는 별명이 있으며 비슷한 경로를 통해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조세현(2010), 248쪽. 바로가기
  • 각주 927)
    이회영은 1919년 2월 북경으로 망명하였으며, 이때부터 민족주의로부터 점차 아나키스트로 선회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이 상해에 모여, 이회영을 의장에 추대하고 의열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1932년 만주에 연락근거 마련 및 주만 일군사령관 암살 등을 목적으로 대련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무자비한 고문에 의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이회영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第4卷, 國家報勳處,1987). 바로가기
  • 각주 928)
    이상촌 건설을 주도한 중국인 아나키스트는 루쉰[魯迅]의 동생 周作人이다. 그는 일본 유학중 아나키즘의 ‘반제 반군벌 반절대권력 만민평등’이라는 사상과 이상주의문학파인 「백화파(白樺派)」가 주창한 ‘개성의 해방과 존중, 생명의 창조력을 믿으며, 권력을 반대하고, 새로운 윤리와 도덕의 이름을 찾는다’는 이상주의를 수용하였다. 周作人은 1919년 백화파들이 큐슈[九州]지방에 건립한 이상촌인 ‘신촌(新村)’에 가서 직접 ‘자연 속에서의 노동의 신성’ 함을 체험하고 귀국하여, 1920년 2월 ‘신촌운동(新村運動)’ 북경지부를 설치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김시준(1997), 133~137쪽. 바로가기
  • 각주 929)
    국민당에 가입한 리스쩡 등은 국민당 극우파의 백색테러나 볼세비키의 공격에 대비하여, 중국과 한인 아나키스트를 보호·지원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930)
    이때 신채호는 북경에서 역사편찬에 몰두하고 있었고, 유림(柳林)은 성도(成都)대학에 재학중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편(1987). 298쪽. 바로가기
  • 각주 931)
    국제연대에 앞장섰던 신채호는 이 대회에 한국 대표로 이필현과 함께 참가하였다.이호룡(2003), 89쪽. 바로가기
  • 각주 932)
    조세현(2001), 「동아시아(한·중·일) 아나키즘의 비교」, 17쪽. 바로가기
  • 각주 933)
    이정규는 1924년 9월 이후 4년여간 상해에 거주하였으나 1928년 10월 일본경찰에체포되었다. 광복직후 귀국하여 1945년 9월 서울에서 무정부주의운동의 총체인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조직하였다. 1946년 이후 국학대학과 성균관대학에서 교편을잡았다. 1958년 청주대학 총장과 1963년 성균관대학 총장을 역임하였고 1966년 퇴임 후 1984년 87세로 서거했다. 김시준(1997), 142쪽. 바로가기
  • 각주 934)
    신채호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방법으로 무정부주의를 택하였다. (신채호, 「공판기록」 『단재신채호전집』(하), 428쪽 ; 신복룡(2007), 85쪽. 바로가기
  • 각주 935)
    유서(柳絮, 유수인 또는 유기석, 1905~1980)는 황해도 금천출신으로 중국 길림성연길에서 공부했다. 1916년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남경 화중공학을 졸업 후 민족주의 단체에 가입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북경에서는 일제의 한국 중국 침략을 반대하며 조선흑기단(민국대학의 흑기연맹)과 관련을 맺었으며, 뤼신과도 왕래하였다. 아나키즘 활동에 적극적인 그는 항일기 언론계와 교육계에서 활동했으며, 해방후인 1952년 강소(江蘇)사범학원 역사과 교수를 지냈다. 박난영(2008), 67쪽. 바로가기
  • 각주 936)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유서 외에 정해리(鄭海理)·김광주(金光州)·원심창(元心昌)·박기성(朴基成)·이용준(李容俊)·유산방(劉山芳)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으며, 이회영도 관련을 맺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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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중 아나키스트의 국제 연대 자료번호 : edeah.d_0005_0040_003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