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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이후 한중 연대

4. 1910년 이후 한중 연대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은 베트남의 망국 이상으로 중국 혁명가들의 관심을 끌었고 중국혁명을 앞당기는 촉진 작용을 하였다. 한국의 독립지사들 역시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자, 중국혁명이 성공하면 그들의 도움으로 우리도 독립을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시작하였다(유용태, 2009: 232). 이후 신규식(申圭植) 등 한인독립지사들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혁명을 지지하거나 실제 참가하였다.주 910
각주 910)
신규식은 다른 항일민족운동가들이 동북지역에서 활동한 것과 달리 중국 혁명의중요한 활동기지인 상해지역을 선택하였고,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신해혁명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중국혁명당과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의 연대활동을 개척하였다. 신승하(1983), 595, 6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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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은 중국 혁명가들과 연대하기 위해 남경(南京)에서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중국혁명당원인 쑹자오런[宋敎仁]·다이지타오[戴季陶]·황싱[黃興]·쑨원 등과 교류하였으며, 남경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중국 혁명파 인사들과의 교류 활동을 체계화하기 위해 한인들의 ‘연락기구’ 인 동제사(同濟社 :同舟共濟의 의미)가 1912년 만들어졌고, 이들 바탕으로 한 한중연대 활동의 결과 한중 연합단체인 신아동제회(新亞同濟會)가 조직되었다(배경한, 2007: 232~233).
동제사는 신규식이 1912년 7월 박은식(朴殷植)·김규식(金奎植) 등과 상해에서 설립하였으며, 이후 조소앙등 한인 지사들이 ‘한중이 함께 새로운 아시아를 개조하자’ 고 발의하여 신아동제회를 조직하자, 중국국민당의 천치메이[陳其美]·쑹자오런·후한민[胡漢民]·다이지타오·천리푸[陳立夫]등도 참가하여 한국 지사들을 적극 지지하였다(楊天石, 2006: 112). 조소앙은 또한 천리푸 등과 함께 한국과 중국의 지사들을 중심으로 국제 항일조직인 아시아민족반일대동당(亞細亞民族反日大同黨)이라는 연맹단체도 조직하였다(배경한, 2002: 7).
신규식
- ※자료 http://people.aks.ac.kr
여운형
- ※자료 http://people.aks.ac.kr
쑨원의 중국혁명정부는 일본의 한국침략을 비판하고 한인의 독립운동을 계속 지원하였으며, 천치메이주 911
각주 911)
천치메이[陳其美, 1878~1916]는 1906년 일본에서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1911년 11월3일 상해에서 봉기를 일으켜 滬軍도독에 취임하였고, 1913년 손문을 도와 중화혁명당을 조직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凱] 토벌활동에 참가하였다가 1916년 5월 암살당하였다. 중국 혁명당 인사 중에서 치치메이와 신규식이 ‘가장 오랫동안 교류’하였고 도움이 많았기 때문에, 친치메이가 암살되자 신규식은 시신을 붙잡고 통곡하였다고한다. 친치메이의 혁명정신과 국민당 안에서의 그의 사업은 그의 조카인 천궈푸[陳果夫]에게 연결되어, 국민정부와 이후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관계가 밀착될수 있었다. 신승하(1983), 609~6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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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1913년 신규식과 한인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이래 혁명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계속되었다.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일하게 인정한 것은 중국의 혁명정부였다. 1919년 한국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이 일어나고 각계가 국민 대회를 소집하여 반일집회를 열었을 때, 한국 교민들도 이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당시 중국 국민당의 다이지타오 등은 한국 지사들과 함께 항일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일본기자회견에서「고일본국민서(告日本國民書)」를 발표하여, 일본이 ‘조약을 어겨 배신하고 조선을 병탄한 것은 실은 중국 본부를 침략한 일면을 보는 것이다’ 라고 선언하였다.주 912
각주 912)
「告日本國民書」(상해, 『민국일보(民國日報)』, 1919. 5. 9); 戴季陶는 일본 유학시절 한국 독립지사들과 왕래하였으며, 상해에서 언론활동에 종사하면서 1911년 동맹회에가입하여 혁명대열에 참여하였고, 혁명당원과 가까이 지내던 신규식 등 한인 지사들과도 교류하였다. 그는 자신이 창간한 『민권보』를 통해 일본의 한인에 대한 잔악행위를 규탄하였다. 신승하(1983), 606~6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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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9월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중화민국 호법정부에 신규식을 특사로 파견, 한국독립 승인의 사안을 논의하였다. 신규식과 회동한 탕지야오[唐繼堯]는 운남지역에서 한국인 군사관 인재를 육성하겠다고 약속하였고, 그후 한국임시정부는 운남에 50 여명의 청년을 파견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楊天石, 2006: 116.117). 신규식이 1920년 10월 상해에서 『진단(震壇)』주보를 창간하고 ‘중한제휴’ 를 주장하자, 쑨원·후한민·장제스[蔣介石]등 국민당 요인들이 이를 지지하였고, 쑨원은 ‘천하위공(天下爲公)이’ 라는 글을 보내 지원하였다. 중국 혁명당원들은 1920년 12월 박은식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상해에서 출판하였을 때에도, 서문을 써서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지지하였다. 우리 측 임시정부도 1921년 4월 쑨원이 비상대통령에 당선되자 여운형(呂運亨)을 광주(廣州)에 파견하여 호법정부의 수립을 축하하였다.주 913
각주 913)
1921년 10월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와 외무총장 신규식이 다시 광동을 방문한 후,쑨원과 중국 혁명당인들의 한인 독립운동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이 시작되었다. 孫科志(2001),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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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들어 늘어난 중국 거주 한인들은 새로운 한·중 연대 조직인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중국 각지에 결성하고, 간행물을 발간하여 한·중혁명을 선전하였다. 1921년까지 한·중 인사들이 결성한 단체는 장사(長沙)중한호조사, 상해(上海)중한국민호조사, 안경(安慶)중한국민호조사, 귀주(貴州)중한국민호조사, 운남(雲南)중한호조사, 한구(漢口)중한국민호조사 등 중국의 주요도시에 분포되었다(김희곤, 2004: 117). 한중호조사의 한국인 대표는 김규식·여운형·신규식 등이고 중국 측에는 초기 공산주의자도 참여하였는데, 장사중한호조사에는 마오쩌둥[毛澤東]도 참여하여 한국인의 항일구국운동을 지원하였다.주 914
각주 914)
마오쩌둥은 1920년 장사에서 신민학회 활동을 하였으며, 당시 그가 읽은 도서목록에는 박은식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사』도 포함되어 있다. 康基柱(1997),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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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호조사의 전국조직인 중한국민호조총사는 1921년 8월 15일,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조약의 폐지, 한국에서 일본의 식민지 정치·경제·군사통치 종료’ 등을 호소하는 선언을 태평양회의에 제출하였다. 1921년 9월 광주에서는 중국인과 한국인이 협력하여 만든 중한협회(中韓協會)가 성립되어, 광동(廣東)군정부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지를 받았다.중한협회는 워싱턴회의와 중국각계에 선언서 등을 보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조선의 독립과 중국주권의 유지를 호소하였으며, 기관지 『광명(光明)』을 통해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고 한중연대를 호소하였다(許壽童, 2010:204).
주 915
각주 915)
1921년 9월 廣州에서 중국 안휘성 의원과 광동정부의 사법부장 등은 한인 김단정·김희담·박화우·손사민 등과 함께 중한협회를 결성하였다. 또 광주시장 쑨커[孫科] 등 수십 명은 기관지 발간기금으로 수백 달러를 모금하였다. 孫科志(2001), 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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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쑨원의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과 연합하기로 결정하고, 광동호법 정부가 중국혁명의 중심이 되자, 조선과 중국 각지 그리고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광주로 모여들었다. 1924년 6월 국공합작의 구체적 상징인 황푸[黃浦]군관학교가 광주에 건립되어, 장제스[蔣介石]가 교장으로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정치부주임으로 임명되었다. 황푸군관학교는 1927년 3월 한국인 혁명가들에게 부탁하여 한인학생을 모집하였다. 각종 한인단체가 1928년 7월 제3기부터 광동 황푸군관학교에 파견한 한인 학생들은 200여명에 달하였고, 조선인 교관도 있었다. 장제스는 한인 학생들을 모두 중국군에 편입하고 일체의 경비는 학교 측이 지급했으며, 이들은 모두 졸업 후 동북 항일무장 투쟁과 한중 항일통일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주 916
각주 916)
황푸[黃浦] 군관학교의 한인 교관은 기술교관, 포술전문가, 포병교관, 러시아어 교관 등 다양하였다. 고영일(2002), 4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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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장제스가 국공합작을 배반하는 4.12 반혁명정변을 일으키자, 공산당이 12월 광주에서 무장기의를 거행하였다. 이에 한인 청년 150 여명도 기의에 참가하였는데, 이는 이들이 쑨원의 국공합작에 희망을 두고 중국혁명에 투신하는 것을 한반도 민족독립운동의 출로로 보았기 때문이다(고영일, 2002: 402~403). 1920년대 후반부터 중국사회에 계속된 북벌과 국공내전 등 전쟁상황으로 인해 한인들이 항일 독립운동 이외에 중국의 정치문제에도 깊이 간여하게 되었다. 한인혁명가들은 공산당의 광주기의(廣州起義) 뿐만 아니라, 군벌을 타도하기 위한 북벌(北伐)전쟁과 1931년 중앙공농민주정부(中央工農民主政府)수립, 1934년 장정(長征)에도 참가하여 적극적인 연대활동을 벌였다.
이상 1910년 이후 중국에 망명한 한국인 독립운동 지사들과 혁명가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의 혁명파들과 진행한 연대활동을 살펴보았다. 이밖에도 당시 중국에는 일본과 유럽에서 들어온 아나키즘을 통해 국제 연대를 추구한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 각주 910)
    신규식은 다른 항일민족운동가들이 동북지역에서 활동한 것과 달리 중국 혁명의중요한 활동기지인 상해지역을 선택하였고,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신해혁명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중국혁명당과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의 연대활동을 개척하였다. 신승하(1983), 595, 604쪽. 바로가기
  • 각주 911)
    천치메이[陳其美, 1878~1916]는 1906년 일본에서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1911년 11월3일 상해에서 봉기를 일으켜 滬軍도독에 취임하였고, 1913년 손문을 도와 중화혁명당을 조직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凱] 토벌활동에 참가하였다가 1916년 5월 암살당하였다. 중국 혁명당 인사 중에서 치치메이와 신규식이 ‘가장 오랫동안 교류’하였고 도움이 많았기 때문에, 친치메이가 암살되자 신규식은 시신을 붙잡고 통곡하였다고한다. 친치메이의 혁명정신과 국민당 안에서의 그의 사업은 그의 조카인 천궈푸[陳果夫]에게 연결되어, 국민정부와 이후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관계가 밀착될수 있었다. 신승하(1983), 609~610쪽. 바로가기
  • 각주 912)
    「告日本國民書」(상해, 『민국일보(民國日報)』, 1919. 5. 9); 戴季陶는 일본 유학시절 한국 독립지사들과 왕래하였으며, 상해에서 언론활동에 종사하면서 1911년 동맹회에가입하여 혁명대열에 참여하였고, 혁명당원과 가까이 지내던 신규식 등 한인 지사들과도 교류하였다. 그는 자신이 창간한 『민권보』를 통해 일본의 한인에 대한 잔악행위를 규탄하였다. 신승하(1983), 606~607쪽. 바로가기
  • 각주 913)
    1921년 10월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와 외무총장 신규식이 다시 광동을 방문한 후,쑨원과 중국 혁명당인들의 한인 독립운동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이 시작되었다. 孫科志(2001), 247쪽. 바로가기
  • 각주 914)
    마오쩌둥은 1920년 장사에서 신민학회 활동을 하였으며, 당시 그가 읽은 도서목록에는 박은식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사』도 포함되어 있다. 康基柱(1997), 309쪽. 바로가기
  • 각주 915)
    1921년 9월 廣州에서 중국 안휘성 의원과 광동정부의 사법부장 등은 한인 김단정·김희담·박화우·손사민 등과 함께 중한협회를 결성하였다. 또 광주시장 쑨커[孫科] 등 수십 명은 기관지 발간기금으로 수백 달러를 모금하였다. 孫科志(2001), 249쪽. 바로가기
  • 각주 916)
    황푸[黃浦] 군관학교의 한인 교관은 기술교관, 포술전문가, 포병교관, 러시아어 교관 등 다양하였다. 고영일(2002), 401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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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이후 한중 연대 자료번호 : edeah.d_0005_0040_002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