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동아시아의 역사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와 독립운동

Ⅶ.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와 독립운동

근대 이전 인도네시아 지역에는 통일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라는 근대 국가의 탄생은 근대 이후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 따라서 제국주의 국가는 여러 종족을 통합하여 인도네시아라는 근대 국가로 통합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다양한 배경의 엘리트 집단들은 제국주의 세력과 타협하고 국제적 환경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독립을 성취하였다. 이 점에서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와 민족운동은 전통적 통일 국가가 제국주의와 투쟁하면서 혁명적 방법으로 독립을 성취한 다른 나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주 890
각주 890)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와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신윤환(1991),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독립운동」,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10』, 154~181쪽을 주로 참고하여 작성한 것임.
닫기

1800년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가 점령하고 있던 전 지역을 네덜란드령 인도(Netherlands Indies) 라고 부르면서 직접적으로 식민통치를 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토착 왕국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자바(Jawa) 지역 이외의 지역 까지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이에 1900년대 초반에는 현재의 인도네시아에 해당하는 전 지역을 네덜란드 식민지로 만들었다. 19세기 네덜란드의 침략에 대한 저항은 토착 왕국들의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과 농민들에 의한 식민지 농업 정책에 대한 산발적 저항이었다. 1825년부터 5년간 지속된 자바 전쟁은 20만의 자바인들이 희생된 격렬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19세기의 반침략운동은 전통적인 왕조나 종교에 의한 저항에 머물렀고, 근대적 민족 의식에 기초한 민족주의운동은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근대적 민족운동은 20세기 초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정복이 완결되는 시점에서부터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즉 이때부터 종교와 지역을 넘어선 민족국가 단위로 인도네시아인들이 결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에는 네덜란드와 중국의 이주민이 등장하여 새로운 사회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자국 중심의 민족주의적 사고를 갖고 독자적인 집단을 형성하여, 네덜란드령 인도에서 토착인들과 종족간의 갈등을 일으켰다. 토착인들은 반네덜란드인, 반중국인 감정 속에서 식민지 당국의 차별적 정책에 대항하면서 민족의식을 자각하게 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식민통치 당국은 20세기 초반부터 윤리정책을 시행했다. 이것은 토착민에 대한 교육과 복지를 확대하고 그들에게 관료로서의 참여 기회를 제공하는 정책이었다. 이 정책으로 서양의 근대 교육을 받은 토착 엘리트 계층이 출현했고, 이들이 독립운동지도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와 민족운동이 싹트게 되었다.
자주적이고 근대화된 인도네시아 건설을 주장한 최초의 민족주의자는 까르띠니(Raden Adjeng Kartini) 였다. 자빠라(Japara) 주지사의 딸이었던 그녀는 여성해방, 인도네시아인과 유럽인의 동등한 인권, 식민지 착취 종식, 전통 비판을 주장했다. 까르띠니의 영향을 받아 1908년 자바의 학생들이 부디 우또모(Budi Utomo)라는 최초의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했다. 부디 우또모는 자바어로 마음을 뜻하는 부디(budi) 와 으뜸을 뜻하는 우따마(utama)의 합성어인데, ‘탁월한 지성과 성격 또는 문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주 891
각주 891)
양승윤 편저(2010), 『인도네시아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74~275쪽.
닫기
1911년에는 네덜란드에서 그녀의 정신을 따르는 유학생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 단체들은 식민지배 타도와 인도네시아 독립을 주장하지는 않았던 계몽적 문화운동 조직이었다. 1911년에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대중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무슬림상인연합이 도시의 상인 계급에 의해 만들어졌다. 1912년 이슬람연합(Sarekat Islam, 회교연맹)으로 이름을 바꾼 이 조직은 근대화된 이슬람교운동에 의해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1917년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하여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화하고 식민통치에 대한 공격하자 창립의 주역인 상인과 중소기업가들은 조직을 떠나게 되었다. 게다가 1920년 공산주의자들이 인도공산당(Perserikatan Komunis India)을 조직하자 이슬람연합은 조직 내에서 공산당원들을 축출하였다. 추방된 공산주의자들은 1927년 서부 자바와 수마트라(Sumatra)에서 혁명을 기도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공산당 활동은 금지되어 1945년까지 공산주의자 운동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슬람연합은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었고, 지식인, 관료, 상인, 노동자, 농민 등 광범위한 계층이 참가했다. 그러나 타협적 노선을 취했고, 합법적 운동을 고집하였다. 유럽인이나 중국인에 대항하여 토착민들의 이익을 수호 하는 단체에 머물러 정치적 독립운동단체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인도네시아의 민족독립운동은 새롭게 등장하는 학생운동 출신의 엘리트에게, 종교 교육운동은 1912년 결성된 무함마디야(Muhammadiyah) 와 전통적 회교 단체인 나흐다뚤 울라마(Nahdatul Ulama)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었다.주 892
각주 892)
무함마디야는 ‘선지자 무함마드의 길’을 상징하는 것으로 1912년 아흐마드 다흘란(Ahmad Dahlan, 1868~1923)이라는 이슬람교 지도자에 의해 조직되었다. 나흐다둘울라마는 ‘종교학자들의 융성’이라는 뜻으로, 1926년 정통 이슬람 종교학자인 하쉼 아사리(Hasjim Asjari)에 의해 조직되었다. 양승윤 편저, 위의 책, 289, 301쪽.
닫기

1920년대 중반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서는 이슬람, 마르크스주의, 민족주의 세 요소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반둥공과대학을 졸업한 수카르노(Sukarno, 1901~1970) 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 민족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1927년 7월 그는 반둥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연합(Peserikatan Nasional Indonesia)를 결성했다. 이 조직은 1928년 인도네시아국민당(Partai Naoisnal Indonesia)으로 개칭되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 독립을 목표로 한 최초의 정당이 출현하였다. 이것은 청년지도자 수카르노가 자신이 이끌던 반둥연구회와 네덜란드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조직한 정당으로써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정당이었다.주 893
각주 893)
양승윤 편저, 위의 책, 310쪽.
닫기
이를 계기로 독립을 목표로 한 여러 정치조직들이 출현하고 연합전선도 결성되었다.
1928년 전 도서를 대표한 청년조직들이 집결하여 “하나의 조국-인도네시아, 하나의 민족-인도네시아인, 하나의 언어 인도네시아어”라고 하는 ‘청년선언’ [Sumpah Pemuda]을 발표하였다.주 894
각주 894)
부디 우또모는 인도네시아인의 근대적 계몽을 위해 네덜란드 언어의 교육과 보급을 중시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네덜란드어로 인도네시아인들의 다수를 결집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국민 대다수가 사용하는 토착어를 국어로 채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에 인도네시아청년단에서는 1928년 자바어는 나이, 계급, 지위에 따라 표현이 달랐기 때문에 말레이어를 인도네시아국어로 채택하였다. S. Takdir Alisjahbana, Indonesia and Cultural Revolution, 클라이브 크리스티 편저(2004), 『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 심산, 84~87쪽.
닫기
여기에서는 홍백기를 국기로, ‘위대한 인도네시아’ 를 국가로 채택하였다. 이로써 인도네시아는 하나의 민족공동체로서 결집되었음을 선언하였다. 이후 회교연맹이 인도네시아회교연합당(Partai Sarekat Islam Indonesia)으로 개편되었고, 부디우토모는 다른 정치세력과 연합하여 대인도네시아당(Partai Indonesia Raya)을 출범시켰다.
독립을 추구하는 독립운동 정당들이 급속하게 발전하자 네덜란드 식민통치 당국은 1933년 8월 수카르노를 반국가혐의로 체포 구금하였다. 이후 수카르노를 비롯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먼 섬으로 유배되어 일본 점령시 까지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후 인도네시아의 정치운동은 온건하고 타협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1935년 보수정당들의 연합인 대인도네시아당이, 1937년에는 온건좌파연합인 인도네시아 인민운동이 네덜란드가 토착인들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국민협의회 참여를 시도했다. 국민협의회에서는 독립 대신에 자치권을 네덜란드 당국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식민통치 당국은 자치권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1939년 인도네시아의 여러 민족주의단체들은 이념과 정파를 넘어선 연합체로 인도네시아정치연합을 결성하였다.주 895
각주 895)
Pieter Joost Drooglever(2005년 8월 11일~12일),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의 전략과 선택」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 독립기념관 발표문, 120~121쪽.
닫기
이어 1941년에는 청년들이 제창한 인도네시아 국어, 국가, 국기의 채택을 위해 인도네시아국민회의를 소집하는데 성공하였다. 세계 파시즘의 대두에 대해 민주주의적인 인도네시아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통일 노력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도력의 부재와 대중적 지지의 약화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인도네시아 독립에 결정적 기회가 된 것은 일본의 인도네시아 점령이었다. 1941년 7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일본은 1942년 초 발리(Bali)와 수마트라에 상륙하여 3개월 만에 네덜란드군을 항복시켰다. 일본은 3년간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였는데, 태평양전쟁 동원을 위해 인원과 물자를 수탈하였다. 인도네시아의 민중을 동원하기 위해 일본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독립을 약속하면서 정치활동을 자유롭게 허용하였고, 인도네시아인 군대를 조직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일본 점령으로 섬에 유배되었던 수카르노와 하따(M. Hatta)는 석방되어 일본의 점령 세력을 도우면서 독립을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들은 일본이 동원과 통제를 위해 조직한 조국방위대, 보충대, 알라의 군대, 청년단, 국민운동본부, 자바호국회, 추진대 등의 각종 조직을 이용하여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와 독립의식을 대중들에게 교육시켰다. 수카르노와 하따는 1945년 8월 일본의 후원 하에 조직된 인도네시아 독립준비위원회의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일본의 항복 이틀 후인 1945년 8월 17일 수카르노 대통령과 하따 부통령은 인도네시아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연합군의 자바 공격에 대비하여 조직된 조국방위대는 독립 후 창설된 국민안보군의 근간이 되었고, 자바호국회는 독립정부 관료조직으로 편입되었다.
그림7 독립된 인도네시아공화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와 부통령 하따

  • 각주 890)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와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신윤환(1991),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독립운동」,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10』, 154~181쪽을 주로 참고하여 작성한 것임. 바로가기
  • 각주 891)
    양승윤 편저(2010), 『인도네시아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74~275쪽. 바로가기
  • 각주 892)
    무함마디야는 ‘선지자 무함마드의 길’을 상징하는 것으로 1912년 아흐마드 다흘란(Ahmad Dahlan, 1868~1923)이라는 이슬람교 지도자에 의해 조직되었다. 나흐다둘울라마는 ‘종교학자들의 융성’이라는 뜻으로, 1926년 정통 이슬람 종교학자인 하쉼 아사리(Hasjim Asjari)에 의해 조직되었다. 양승윤 편저, 위의 책, 289, 301쪽. 바로가기
  • 각주 893)
    양승윤 편저, 위의 책, 310쪽. 바로가기
  • 각주 894)
    부디 우또모는 인도네시아인의 근대적 계몽을 위해 네덜란드 언어의 교육과 보급을 중시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네덜란드어로 인도네시아인들의 다수를 결집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국민 대다수가 사용하는 토착어를 국어로 채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에 인도네시아청년단에서는 1928년 자바어는 나이, 계급, 지위에 따라 표현이 달랐기 때문에 말레이어를 인도네시아국어로 채택하였다. S. Takdir Alisjahbana, Indonesia and Cultural Revolution, 클라이브 크리스티 편저(2004), 『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 심산, 84~87쪽. 바로가기
  • 각주 895)
    Pieter Joost Drooglever(2005년 8월 11일~12일),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의 전략과 선택」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 독립기념관 발표문, 120~121쪽.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와 독립운동 자료번호 : edeah.d_0005_0030_00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