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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1900년대 근대 민족주의 형성

2. 1900년대 근대 민족주의 형성주 856
각주 856)
이하 한국민족주의 발전과정은 김기승(2003년 11월 11일), 「한국민족주의의 어제와 오늘」 『각국의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민족주의』, 제11차 국제역사교과서 학술회의, 국제교과서연구소, 19~35쪽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전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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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의 민족주의는 또 하나의 변화를 겪었다. 1905년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후, 전국적으로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었다. 1905~10년간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은 두 갈래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하나는 보수 유림과 농민층이 연합하여 주로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한 의병전쟁이다. 또 하나는 문명개화를 주장하는 신지식인과 도시민 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구국계몽운동이다. 두 운동은 실추된 국권을 회복 한다는 즉 대외적 주권을 직접 자신들의 힘으로 회복하겠다는 점에서는 일 치했다. 참여자 개개인들이 국민의 일원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정당한 주권 행사로서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이 두 운동을 통해 근대 국민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주권에 대한 실천적 인식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운동은 주체, 현실인식, 이념적 지향성의 차이로 인해 통 합되지 못했다. 한민족이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되지 못했던 것은, 한국이 식 민지로 전락한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의병전쟁의 사상적 기반은 유교의 위정척사론이었다. 의병전쟁을 지도했던 보수 유림층은 당시의 현실을 과거 임진왜란의 상황에 비유하여 야만족 일본이 국권을 침탈하고 있는 상황으로 파악하였다. 유교문화와 도덕을 최고의 유일한 가치로 인식하여 서구 문화의 수용을 배척하였으며, 서구 문명을 수용한 일본을 반인륜적인 야만 민족으로 파악하였다. 국권을 침탈한 일본에 대한 저항은 유교의 충군애국이라는 의리를 실천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야만족의 침입으로부터 유교적인 인륜질서를 지킨다는 대의 명분을 갖고 있었다. 의병전쟁은 일본군에 대한 무장투쟁, 친일 개화파와 민족반역 자에 대한 처단과 징벌이 주요한 내용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이 추진한 국권회복운동은 존왕주의(尊王主義)의 충군애국 의리에 토대를 두고 있고, 전통적인 유교문화와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국권 회복이란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뜻하는 것이었는바, 의병전쟁은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통해 전통적 전제군주제 국가를 재건하려는 복벽주의(復辟主義)라고 할 수 있다.
구국계몽운동은 서구적인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교육과 실업의 진흥을 통한 자강력(自强力) 양성이 국권회복의 방법이라는 인식 하에서 전개되었다. 당시의 현실을 민족과 국가 간의 생존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상황으로 보았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거나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는 현상을 약육강식하는 천연(天演)의 공례(公例)로 보았다. 따라서 국 권을 강탈한 일본은 타도해야 할 적(敵)이라기보다는 민족과 국가의 실력을 겨루는 경쟁자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국권 실추의 원인을 민족 내부에서 찾게 되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략은 민족의 내부 역량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게 된다. 여기에서 서구적 문명대국 건설을 지향 하여 신지식 교육을 통한 지력향상과 산업발전을통한경제력강화를 도모하였다.
구국계몽운동을 추진한 개화자강 사상가들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무너지고 자민족 중심의 다중심사회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민족 사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면서 민족적 자주성을 강조하고 중화주의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하였다. 국제사회는 민족 단위로 생존경쟁을 하는 힘의 논리가 지배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민족의 생존과 독립은 민족의 자강력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민족의 자강력은 국민 개개인의 역량의 총합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자유 민권 사상의 수용과 함께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인식이 확립되었다. 구국계몽운동에서 추구한 미래의 국가상은 대한제국이 아니라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국가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형식적으로는 대한제국과 황제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군주권을 부정하는 공화주의 이념이 전면에 등장하지는 못하였다.

  • 각주 856)
    이하 한국민족주의 발전과정은 김기승(2003년 11월 11일), 「한국민족주의의 어제와 오늘」 『각국의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민족주의』, 제11차 국제역사교과서 학술회의, 국제교과서연구소, 19~35쪽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전재한 것임.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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