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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반식민지 전락

2. 중국의 반식민지 전락

1) 중화제국 붕괴
(1) 청불전쟁과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지 전락
1879년에 들어서 일본이 류큐[琉球: 현재의 오키나와]왕국을 병합하고 러시아와 이리(伊犁: 지금의 중국 신장성 서북부 텐산산맥 중부에 있는 분지)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자, 청조는 전략적으로 베트남과 조선이 자국의 안보에 점하는 중요성을 절감하였다. 1880년대 초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베트남의 식민지화를 추진하면서, 베트남과 접경지역인 운남 지방의 안위를 걱정한 청조는 홍 강 이북 지역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1882년 9월 출병을 단행했다. 1883년 8월 베트남이 아르망 조약으로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전락 했지만, 종래의 종주권을 철회하려하지 않았던 청조는 이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프랑스군에 맞섰다.주 747
각주 747)
유인선, 앞의 책, pp. 287~292; 송정남, 앞의 책, pp. 336~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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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883년 12월 프랑스군이 베트남과 중국의 접경지역 청군의 점령지를 하나하나 함락시켜나가자, 1884년 5월 청조의 이홍장은 조정 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천진에서 강화조약을 맺었다. 제1차 천진조약, 또는 푸르니에조약으로 불리는 이 조약으로 청조는 남쪽 국경을 프랑스가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에 맺은 기왕의 조약을 인정하고 청군의 철군을 약속했다. 그러나 강경파의 반발에 부딪친 청조는 프랑스에 대해 강경노선으로 급선회했다. 1884년 6월 청군 점령지역을 접수하러 온 프랑스군이 청군의 기습으로 4백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터지고, 청조에 요구한 2억 5천만 프랑의 배상금이 거부당하자, 프랑스는 선전포고와 함께 전쟁에 돌입했다. 청불전쟁 개전 초 프랑스함대는 푸저우[福州]에 정박 중 이던 청국 남양 함대를 급습해 전멸시키고, 타이완과 팽호도를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1885년 3월 베트남에서 청군의 반격으로 4천여 명의 병사를 잃는 패전을 당했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들어간 그해 6월 청조는 제2차 천진조약을 맺어 프랑스가 배상금을 요구하지 않고 타이완 등 점령지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함으로써 종주 권을 잃고 말았다.주 748
각주 748)
유인선, 위의 책, pp. 292~294; 송정남, 앞의 책, pp. 339~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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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일전쟁과 조선에 대한 지배권 상실
중화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성어가 웅변하듯이, 남부와 접경한 베트남에 비해 수도 북경에 인접한 조선은 청조의 생존이 걸린 전략적 요충이었다. 인체에 비유하자면 베트남은 하나를 잃어도 연명할 수 있는 수족이었지만, 조선은 졸리기만 해도 목숨을 잃는 생명줄인 인후(咽喉)였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연해주를 러시아에 할양함으로써 러시아 와 조선이 국경을 접하고,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이후 일본이 조선에 진출 하자, 이들의 한반도 장악을 막기 위해 조선왕조에 대해 서구열강과 입약을 권유하는 열국입약 권도책을 펼쳐 세력균형을 도모하는 한편 군비 확충 등 부국강병정책의 채택도 권유했다. 그러나 1882년 7월 조선정부의 대외개방과 근대화정책 추진에 반발해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이를 빌미로 일본이 세력을 확장할 것을 우려한 청조는 3천명의 병력을 파견해 직접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중국과 일본이 팽팽히 맞서는 국면이 전개되면서 청조가 바라던, 열강들 사이의 힘의 균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 청조는 속방의 내치와 외교에 간섭하지 않는, 더 이상 종래의 종주국이 아니라 서구를 흉내 내 도덕률이 아닌 힘으로 조선을 지배하려한 ‘부차적 제국주의’ 국가로 탈바꿈하였다.주 749
각주 749)
김기혁 ,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 37; Young Ick Lew, “Dynamics of the Korean Enlightenment Movement, 1879~1889: A Survey with Emphasis on the Korean Leaders,”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編 (1987). 『淸季自强運動硏討會論文集』上,臺北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pp. 599~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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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이 군란을 빌미로 30일 수호조규 속약과 제물포조약을 강요해 강화도조약에서 얻지 못한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고, 공사관 호위병력의 주둔권을 얻어내는 등 실리를 챙겼지만, 최대 수혜자는 청조였다. 1882년 10월에 맺어진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 서문에는 조선은 청조의 속국임이 명시되었고, 중국 상인은 무역에 있어 일본 상인 보다 더 큰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청조가 종래의 소극적 간섭정책에서 일본의 팽창주의에 전면 대응하는 쪽으로 정책을 전환함으로써 조선은 양국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주 750
각주 750)
김기혁 , 「이홍장과 청일전쟁」, 『근대 한·중·일 관계사』, pp. 17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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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청불전쟁이 일어나 조선 주둔 청병의 절반이 베트남으로 급파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기화로 일본을 등에 업고 청조를 몰아내려고 했던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청조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후 청조는 1885년 11월 원세개(袁世凱, 1859~1916)를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임명해 조선의 내외정치를 감시함으로써 조선을 보호국과 다름없게 만들어 버렸다.주 751
각주 751)
Young Ick Lew(1984), “Yüan Shih-k'ai's Residency and the Korean Enlightenment Movement (1885~1894),”The Journal of Korean Studie ⅴ, pp. 6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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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조는 자국의 안위에 관건이 되는 전략적 요충이자 가장 중요한 조공국인 조선뿐 아니라 영토인 대만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2) 국민국가 수립운동의 좌절
(1) 무술변법운동의 실패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 서구열강의 이권침탈이 노골화되면서 중국이 수박 쪼개지듯 ‘과분(瓜分)될’ 것이라는 망국의 위기감이 고조됨에 따라, 서양의 기술과 무기만을 받아들이는 양무운동을 넘어 메이지 일본을 모델로 입헌군주제 수립을 도모하는 강유위(康有爲, 1858~1927) 와 양계초(梁啓超 1873~1929) 같은 개량파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들은 1890년대에 유행한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중국이 모델로 삼을 성공사례로 러시아 피터 대제의 개혁과 메이지 유신을 꼽았다. 특히 강유위는 청일전쟁 패전 직후 과거를 보기 위해 북경에 모인 이들을 선동하여 6백여 명 연명으로 정치개혁을 촉구하는 ‘공거상서(公車上書)’ 를 올렸다. 특히 청조의 실력자 공친왕(恭親王)이 서거한 1898년 서태후(西太后)가 광서제(光緖帝)에게 친정을 허락하자, 그는 황제의 부탁을 받아 이른바 ‘무술변법(戊戌變法)’ 이라 불리는 103일간의 개혁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행정·교육·법률·군대·경찰체제의 근대화 등 40개에 달하는 개혁조칙은 모두 문서로만 그치고 만 종이 위의 개혁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만주족의 위치가 손상될 것을 우려한 서태후와 수구파의 반동을 불러와 광서제는 유폐당하고 변법파 인사들은 처형되었으며, 강유위와 양계초는 가까스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은 물거품이 되었고, 국민국가 수립의 가능성도 사라 졌다. ‘만세일계(萬世一系)’ 의 통치자란 표상으로 국민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한 일본의 천황과 달리, 이민족 만주족 황제는 한족(漢族)을 하나로 묶는 상징이 될 수 없었다.주 752
각주 752)
강진아 (2009), 『문명제국에서 국민국가로』, 창비, pp. 176~186;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저 ·이동진 등 역 (2011),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공사, p.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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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화단 사건과 반식민지화 굴욕
변법운동이 좌절된 2년 뒤 배외사상의 대두와 함께 일어난 의화단(義和團) 사건은 청조에게 더 심한 굴욕을 안겨주었다. 전통 권법만 익히면 총탄도 막을 수 있다고 믿던 신흥 종교집단은 배외주의라는 폭발적 요소를 가미해 중국이 안고 있던 고질적 병폐의 원인을 외국인에게 돌렸다. 부청멸양(扶淸滅洋)을 외치며 산동지방에서 봉기한 의화단은 1900년 6월에는 북경과 천진으로 진격해 서구 열강의 공사관과 선교시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청조는 이들을 진압하기는커녕 북경에서 공사관 퇴거를 요구하는 한편 외국인 격멸의 포고문을 발해 외국인을 박해하도록 부추겼다. 이에 청군과 서구 연합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서구 연합군은 수적 열세에 밀렸지만, 사단병력의 일본군이 가세하면서 북경이 점령되자, 청조는 굴욕적인 조건의 강화 조약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1901년 9월 청조는 영국과 일본 등 11개국에 4억 5만량의 배상금 지불을 약속하는 등 가혹한 조약에 조인하였으며, 중국은 열강의 반식민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주 753
각주 753)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저, 위의 책, pp. 276~277;古屋哲夫 (1966), 『日露戰爭』,中央公論社, pp.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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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인선, 앞의 책, pp. 287~292; 송정남, 앞의 책, pp. 336~339. 바로가기
  • 각주 748)
    유인선, 위의 책, pp. 292~294; 송정남, 앞의 책, pp. 339~341. 바로가기
  • 각주 749)
    김기혁 ,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p. 37; Young Ick Lew, “Dynamics of the Korean Enlightenment Movement, 1879~1889: A Survey with Emphasis on the Korean Leaders,”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編 (1987). 『淸季自强運動硏討會論文集』上,臺北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pp. 599~603. 바로가기
  • 각주 750)
    김기혁 , 「이홍장과 청일전쟁」, 『근대 한·중·일 관계사』, pp. 173~174. 바로가기
  • 각주 751)
    Young Ick Lew(1984), “Yüan Shih-k'ai's Residency and the Korean Enlightenment Movement (1885~1894),”The Journal of Korean Studie ⅴ, pp. 65~86. 바로가기
  • 각주 752)
    강진아 (2009), 『문명제국에서 국민국가로』, 창비, pp. 176~186;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저 ·이동진 등 역 (2011),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공사, p. 276. 바로가기
  • 각주 753)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저, 위의 책, pp. 276~277;古屋哲夫 (1966), 『日露戰爭』,中央公論社, pp. 16~21.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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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반식민지 전락 자료번호 : edeah.d_0005_001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