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동아시아의 역사

에도시대의 경세사상

2. 에도시대의 경세사상

16세기 말에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되면서 당면 과제는 봉건질서를 재편하는 것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는 체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유학에 관심을 보였고, 이를 통해 지배체제를 확립하고 혼란한 사회질서를 바로잡으려 했다. 17세기 후기에 이르러 문치정치가 뿌리를 내리면서, 주자학은 봉건교학의 지위를 확립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주자학은 학문적으로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에도시대의 사회의 기초 구조는 봉건 사회였다. 그러나 성격을 달리하는 봉건제와 집권제가 함께 있어 언젠가는 모순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에도 중기의 무사들은 전국 규모의 상업 조직에 압박을 받아 경제적 궁핍에 빠졌다. 무사의 궁핍은 농민들에게 더 큰 궁핍을 가져다주었다. 무사의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직간접으로 무거운 과세가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오규 소라이[狄生徂徠]는 이런 문제가 봉건제적 집권제라는 이중 구조에서 비롯된 것임을 통찰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소라이는 한 왕조나 정권이 존속하는 것은 창립자가 만든 제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하정(城下町) 제도가 전국(戰國) 시대의 관습을 완화시키고 통일을 용이하게 했지만, 통일을 이룬 다음에는 이를 폐지하고 무사를 토착화함으로써 상업자본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제안한 대책은 무사를 지행지(知行地 : 무사에게 지급되는 토지)에 정착시키고, 호적을 만들어 서민이 도시로 이동하는 것을 금지시키며, 신분에 따라 욕망을 제한하고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라이의 정책은 무사와 농민을 상업 자본의 영향권에서 끌어내려 자연 경제로 복귀시킴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그림 9 오규 소라이 초상
다자이 슌다이[太宰春台]는 소라이의 뒤를 이어 무사의 입장에서 경세방안을 제안했다. 그는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시하는 입장에서, 사농공상의 역할을 ‘예의를 알고 그 몸에 군자의 행함이 있는 무사’ ‘무사를 먹여 살리는 농민’ ‘기예로 먹고 사는 공인’ ‘상품 교환으로 먹고사는 상인’으로 규정했다. 이는 일반적인 유학자오 동일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슌다이는 도덕의 유지를 위해서는 경제의 안정이 필요한 것으로 보고 최초로 부국강병을 주창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 패자(覇者)의 술책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부패한 후세 유학자들의 망설(妄說)이다. 요순(堯舜) 이래로부터 공자의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 도는 부국강병과 다름이 없다.주 684
각주 684)
太宰春台, 『經濟錄』.
닫기

 
슌다이는 부국이 강병의 근본이 된다고 생각하며, 구체적 방법으로는 토지의 이용과 특산물의 장려를 통한 이익의 증진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무사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의창제(義倉制)를 주장하여 사회 복지에도 관심을 보였다.
회덕당(懷德堂)의 유학자였던 나카이 지쿠잔[中井竹山]은 왕도론의 입장에서 경세론을 주장했다. 그는 주자학자로서 오규 소라이의 고학을 반대했지만 그의 장점은 흡수하고자 했다. 지쿠잔은 세습적이고 조상의 공적에 의해 결정되는 무사들의 봉록(俸祿)을 실력 본위의 봉록제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그는 물가가 올라가는 원인으로 통화의 팽창, 권리의 독점, 조닌[町人]에 대한 과세를 들고, 쌀값을 조절하기 위해 오사카에 상평창(常平倉)을 둘 것을 제안했다. 또한 그는 교통 문제의 해결을 위해 대정천(大井川)에 석교를 놓자고 했고, 서민들의 복지를 위해 사창(社倉)을 설치하자고 했다. 그는 에도시대 사회복지 사상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가이호 세이료[海保靑陵]는 상업 자본을 긍정하고 상품 경제의 발전을 통해 에도사회의 모순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천지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경제적 재화이며, 이 재화가 다른 재화를 낳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하여, 매매 관계를 천리(天理)로 인정하고 매매 거래를 공정한 것으로 보았다. 세이료는 경제 사회의 원리에 입각하여 상하 모두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며, 최대의 비생산자였던 무사 계급에게 상업 자본주의 기구의 일원임을 자각할 것을 촉구했다.
천자는 천하라고 하는 경제적 재화를 가진 부자이다. 천자는 이 재화를 백성들에게 빌려 주고, 그 이자를 챙기는 자이다.…… 경·대부·사(卿大夫士)는 자신의 지식을 군주에게 팔아 그날만큼 고용된 임금으로 먹고 사는 자이다. 운조(雲助, 역참에서 일하던 가마꾼이나 인부)가 1리를 가서 1리만큼의 임금을 받아 떡을 사고 술을 사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주 685
각주 685)
海保靑陵, 『稽古談』.
닫기

 
세이료는 당시의 무사 사회가 상품경제의 발전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상황임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현실주의가 정치 세계로 적용되면 현상을 유지시키려는 보수주의로 나타났다.
혼다 도시아키[本多利明]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항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도시아키는 제한된 땅에서 나오는 산물로 만민(萬民)의 의식주에 대한 무한한 수요를 충당하는 것은 무리이며, 관선(官船)을 제조하여 해외 무역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경에서 남동쪽으로 1,000㎞ 떨어진 곳에 있는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를 개방하고, 북해도, 사할린, 캄차카를 개척하여 ‘대일본(大日本)’이라 칭하며, 캄차카에 수도를 구축하여 북방 제국과 무역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특히 일본이 오랫동안 모델로 삼았던 중국은 대륙 국가이므로 해양구 일본의 표본이 될 수 없고, 일본은 여러 나라에 선박을 파견하여 국가에 필요한 산물과 금·은·동 같은 자원을 빼내어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시아키는 국가의 발전을 위해 서양의 궁리학(窮理學)을 채용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그는 학문이란 구리, 추보(推步), 측량술부터 시작해서 천문, 지리, 항해술을 익혀야 하며, 일본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재(材) 덕(德) 능(能)의 겸비가 필요한데 ‘재’와 ‘덕’은 중국학으로 이룰 수 있지만 ‘능’은 서양을 배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여기서 ‘능’은 천문, 지리, 항해술을 말한다. 도시아키는 무사에 대해서도 ‘짧은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말고 고금의 일본, 중국, 서양의 사정을 공부하여 정통해야 한다’고 했다(源了圓(2000), 159~171).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은 조닌 출신으로 상업의 발전을 긍정했다. 바이간은 신분제 사회를 긍정하면서도 직분상으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기능적 사회관을 주장했다. 그는 사농공상으로 구성되는 사민(四民)이 군주를 돕는다는 측면에서 동일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은 천하를 다스리도록 도와준다. 이들 사민(四民)이 없으면 세상을 도울 수가 없다. 이 사민을 다스리는 것은 군주의 직분이며, 그 군주를 돕는 것은 사민의 직분이다. 사는 본래 벼슬 있는 가신이며, 농민은 초목의 가신이며, 상공인은 시정(市井)의 가신이다. 가신의 도(道)는 군주를 돕는 데에 있다. 상인이 장사를 하는 것은 천하를 도우려는 것이다.주 686
각주 686)
石田梅岩, 『都鄙問答』.
닫기

 
바이간은 무사가 녹을 받고 생활하듯이 상인은 이익을 취함으로써 생활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상인의 정당한 이익 추구는 욕심에 찬 행위가 아니며, 부당한 상행위만이 욕심에서 나온 행위였다. 바이간은 상인의 정직은 정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올리는 것이며, 정직의 도는 다시 검약의 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검약이란 단순히 사물을 절약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살리는 동시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진짜 상인이라면 남을 살리고 자신도 서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바이간의 사상은 교토와 오사카에서 커다란 사회세력을 형성했고, 데지마 도안[手島堵庵], 나카자와 도니[中澤道二] 같은 후계자를 낳았다.(源了圓(2000), 117~127).

  • 각주 684)
    太宰春台, 『經濟錄』. 바로가기
  • 각주 685)
    海保靑陵, 『稽古談』. 바로가기
  • 각주 686)
    石田梅岩, 『都鄙問答』.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에도시대의 경세사상 자료번호 : edeah.d_0004_0040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