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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청대의 서학 수용

2. 청대의 서학 수용

중국과 서양 국가의 만남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가교 역할을 했으며, 특히 예수회(The Jesuit) 선교사가 중심이었다. 명나라 말기에 우수한 학식을 지닌 선교사들이 중국에 나타나자 중국의 지식인 가운데 일부가 새로운 학문과 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배우려 했다. 그 결과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들이 많이 출판되었고, 중국인의 저작에서 인용되기도 했다.
청나라에 들어와서도 서양 선교사를 존중하는 풍토에는 변함이 없었고, 역(曆)을 만드는 흠천감(欽天監, 천문대)가 발생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예수회의 선교 방식이 중국의 전통과 지나치게 타협함으로써 크리스트교의 교의(敎義)를 어겼다고 판단했고, 청나라에서는 이에 대응하여 예수회 이외의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했다. 1723년부터 청조에서는 크리스트교 포교가 전면 금지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서양의 지도와 수학, 역학 등을 소개했으며, 최초의 선교사는 마테오리치(Matteo Ricci, 利瑪竇)였다. 마테오리치는 1582년 포르투갈이 관리하던 마카오에 상륙하였고, 1589년에 남경(南京)세서 〈산해여지도(山海輿地圖)〉란 세계지도를 만들었다. 마테오리치는 1601년에 명의 황제 신종(神宗)을 처음 만나 자명종(自鳴鐘)과 『만국도지(萬國圖誌)』를 바쳤다.
1602년에 이지조(李之藻)는 마테오리치의 지도를 바탕으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라는 정밀한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이는 길이가 179㎝, 폭이 144㎝나 되는 대형 세계지도였다. 중국에서는 이미 원나라 때에 이슬람의 지구의(地球儀)가 전해졌지만, 지구설(地球說)이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이 지도에 의해서였다. 당시 유럽의 지도는 지도의 중앙에 대서양이 위치하도록 그려져 있었지만, 마테오리치는 중국이 지도의 중심에 위치하도록 그렸다.
그림 3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이응시(李應試)는 1606년에 마테오리치의 지도를 수정한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를 만들었다. 마테오리치는 1605년에 서양의 우주관을 소개한 『건곤도설(乾坤圖說)』을 간행했는데, 여기에는 지리론과 기후론이 간략하게 언급되었다. 선교사 앨레니(J. Aleny, 艾儒略)는 1623녀에 『직방외기(職方外紀)』를 편찬했다. 이는 〈곤여만국전도〉의 내용을 해설하기 위한 세계지리지였다.
청나라에 들어와서는 1674년에 선교사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南懷仁)가 동반구와 서반구로 구성된 〈곤여전도(坤輿全圖)〉를 간행했다. 강희제는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들을 동원하여 중국의 전역을 측량한 지도를 작성할 것을 명령했고, 자르토(P. Jartoux, 杜德美), 레지스(J. B. Régis, 雷考思), 부베(J. Bouvet, 白晉) 등이 참여했다. 이 작업은 1707년에 시작되어 1717년에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로 완성되었다. 이는 1739년에 프랑스에서 『중국신지도장(中國新地圖帳, Nouvel Atlas de la Chine)』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황여전람도〉는 북경을 남북을 통과하는 경선(經線)을 기준 자오선으로 하고, 위도는 북극성의 지평고도(地坪高度)를 기준으로 측정했다. 건륭제는 신강(新疆) 지역이 청조의 판도 안으로 들어오자 〈황여전람도〉에 기재되지 않은 합밀(哈密) 서쪽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실측을 하게 했고, 여기에 러시아인이 올린 시베리아 지도를 더한 〈건륭내부여도(乾隆內府輿圖)〉가 작성되었다. 이는 1775년에는 프랑스 출신 브누아(M. Benoist, 蔣右仁)가 감수한 지도이다. 이처럼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전역을 측량하여 지도를 작성한 것은 청나라가 서학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림 4 마테오리치와 서광계
서양이 선교사들은 수학과 천문학을 소개하기도 했다. 1607녀에 유클리트의 『기하학원론(幾何學原論)』을 번역한 『기하원본(幾何原本)』이 북경에서 간행되었다. 이는 마테오리치가 구술한 것을 서광계(徐光啓)가 기록한 것이다. 유럽의 천문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기하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으므로, 『기하원본』의 간행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1605년에는 사크로보스크의 『천구론(天球論)』을 번역한 『건곤체의 (乾坤體義)』가 간행되었다. 이는 지구 중심의 우주론을 기초로 한 르네상스 천문학을 소개한 책이었다. 또한 천문을 관측하는 의기(儀器)가 간행되었다. 1607년에 간행된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과 1617년에 간행된 『간평의설(簡平儀說)』이 그것이며, 이 책은 그리스의 천문학자가 사용했던 아스트롤라베를 설명한 것이다.
1615년에 간행된 『천문략(天問略)』에는 1610년 갈릴레오가 발견한 천문학의 새로운 정보들이 수록되었다. 1612년과 1629년에 대통력(大統曆)이 연속으로 일식의 예보에 실패하자 숭정제는 역서(曆書)를 개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작업은 서광계가 총지취하고 선교사인 슈레크(J. Schreck, 鄧玉函),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야고보 로(Jacobus Rho, 羅雅谷) 등이 참여했다. 아담 샬은 그 성과를 새로 건설된 청나라에 전달하여 『서양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를 간행하고, 새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을 편성했으며, 국립천문대에 해당하는 흠천감(欽天監)의 책임자가 되었다. 페르비스트는 아담 샬 이후 흠천감 책임자가 되었는데, 1673년에 천문 관측기구를 그림으로 설명한 『영대의상지도(靈臺儀象地圖)』를 간행했고, 1668년에는 『서양신법역서』를 보완한 『강희영년역법표(康熙永年曆法表)』를 작성했다.
안휘성 선성(宣城)에서는 매문정(梅文鼎)이 중국과 서양의 천문학을 비교하여 연구했다. 매문정은 1724년에 손자인 매곡성(梅穀成)과 함께 『역상고성(曆象考成)』을 간행했다. 천문역법을 ㄷ룬 『역상고성』은 수학을 다룬 『수리정온(數理精蘊)』, 음율학을 다룬 『율려정의(律呂正義)』와 함께 『율력연원(律曆淵源)』 3부작의 하나가 되었다. 독일 태생인 쾨글러(I. Kögler, 戴進賢)와 포르투갈 태생의 페레이라(A. Pereira, 徐懋德)는 1742년에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編)』을 편찬하면서 케플러의 타원운동을 적용하여 역법의 정확성을 높였다. 브누아(Michel Benoit, 蔣友仁)는 1799년에 『지구도설(地球圖說)』을 완성했고, 이를 통해 태양중심설이 완전히 수용되었다.
서양과의 접촉을 통해 서양식 화기(火器)가 도입되었다. 서양식 총포를 제작하려는 움직임은 명·청 교체기에 시작되었다. 1598년에 조사정(趙士禎)은 『신기보(神器譜)』를 편찬하면서 다양한 총기의 제작법과 사용법을 그림으로 설명했다. 1617년에 동북 지역에서 누르하치 군대가 남진해 오자, 서광계는 항주에 있던 이지조(李之藻)와 양정균(楊廷筠)에게 마카오에서 포르투갈의 불라기포를 구입하게 했다. 이 불랑기포는 1626년 청과의 항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고, 이로 인해 북경에서 추방되었던 예수회 선교사가 북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명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화기 제작을 담당한 인물은 아담 샬이었고, 그의 지도 아래 대포 500문을 제조했다. 그러나 명나라 장군들이 청나라에 투항하면서 이 대포를 가져갔고, 이는 결국 명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청나라가 건설된 이후 아담 샬은 태상시(太常寺)를 소경(少卿)으로 있으면서 『화공설요(火功挈要)』를 지어 서양식 대포들을 설명했다. 강희제가 삼번(三藩)의 난을 진압할 때에는 페르비스트가 작은 포 120문을 제작했고, 그 후 320문의 대포를 갖추게 했다. 페르비스트는 1681년에 『신위도설(神威圖說)』이란 총포해설서를 지었고, 오늘날 차관급에 해당하는 공부(工部) 우시랑(右侍郞)에 임명되었다. 청나라의 화기 제작은 이처럼 크리스트교 선교사들이 담당했다.(橋本敬造(1997), 252~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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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의 서학 수용 자료번호 : edeah.d_0004_0040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