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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도시화 진전과 도시 성장

2. 도시화 진전과 도시 성장

1) 중국 : 행정도시 ‘현성’과 상공업도시 ‘시진’의 병존
중국의 도시는 수도(首都), 배도(陪都), 성도(省都), 부성(府城), 주성(州城), 현성(縣城)이라는 행정위계에 따른 상하관계로 편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국의 지방행정은 성(省)-부주(府州)-현(縣)으로 구성되었고, 부성과 주성은 현성과 현청사가 소재하였고, 이들이 행정과 상품유통의 중심지로써 도시로 기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성은 송대에서 청대에 이르기까지 1,200곳에서 1,300곳이 존재했다. 행정중심기능을 갖는 전통적인 도시와 달리 송대에서 청대에 이르는 시기에 농촌지역의 시진(市鎭)이 성장하여 중소도시로 기능하였다. 시진은 1개 현당 1.3개 정도 존재했다고 추정된다.주 662
각주 662)
斯波義信(시바 요시노부) 지음·임대희·신태갑 옮김(2008),『중국도지사』, 서경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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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은 촌락-시집(市集 : 정기시)-시진(市鎭 : 상설시, 중소도시)-대도시로의 성장과정을 밟는다. 전국의 3분의 1에 달하는 시진은 강남지역인 강소와 절강지역에 집중되었다. 강남의 도시화는 대략 9세기 후반부터 시작하여 남송시대에는 그 첫 단계의 전성기에 이르렀고, 경제기능을 가진 중소도시가 많이 발생하였으며, 명 중기에 재차 발전기에 돌입하여 장기적 성장단계에 돌입하였다.
시진의 성장은 도시수공업과 상업발달을 배경으로 주면 농촌에서 많은 인구들이 이주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중국사에서 인구이동은 매우 중요한 사회현상이었다. 대대적인 인구이동은 명 중기에서 명 말기, 명 말에서 청 초 두 시기에 있었다. 인구이동은 성(省) 내부 지역간에는 물론 성과 성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인구이동의 유형은 농촌지역에서 도시 및 수공업지역으로의 이동유형, 농촌지역에서 금산구(禁山區)로의 이동유형, 인구가 과밀한 선진경제지역[狹鄕]에서 낙후한 농촌지역[寬鄕]으로의 이동유형으로 크게 구분된다. 명 중기에서 말기에 걸쳐 계속된 인구이동은 ‘북에서 남으로’라는 이전시대의 대세와는 달리 매우 복잡하고 다양했다. 이 기간 동안에 인구가 가장 집중된 지역은 섬서 남부, 사천 동북부, 하남 남서부, 호북 서북부로 이루어지는 사성교계(四省交界)지역이었고, 그 다음이 강서 남부, 복건 북부, 광동 동북부, 호남 동남부 등으로 이루어지는 사성교계지역이었다. 성단위로 보면 호광지역에 인구가 집중적으로 유입되었고, 그 다음이 사천, 북직예, 산동, 하남 지방이었다. 명 말 청초에 걸쳐 또 한 번의 대대적인 인구이동이 있었다. 사천지역은 명 말 장헌충(張獻忠)의 난 때문에 인구가 격감되었다. 청 초기 사천의 인구비중은 전체의 1%에 불과 했지만, 1761년(건륭 26)에는 전체 인구의 10%로 격증했다.주 663
각주 663)
오금성(1986), 『中國近世社會經濟史硏究-明代紳士層의 形成과 社會經濟的役割-』,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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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인구이동으로 인해 명대 양자강 중류 일대의 토지가 급속히 개발되었으며, 토지개발의 결과 중국의 경제중심지가 분화되었다. 특히 송대에서 명 초까지는 양자강 하류의 강소성, 절강성 지역이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명 중기에서 강남지역은 일반적으로 강소성의 소주, 송강, 상주, 태창의 4부주와 절강성의 가흥, 호주, 항주의 3부 등 7개의 부주를 일컫는다. 이 지역은 동으로는 황해, 서로는 산구사이에 위치하는데 모두가 태호(太湖) 주변지역이어서 대소의 하류가 관류하고, 항주로부터 북경에 이르는 경항(京杭) 대운하의 연변에 위치한 풍요로운 평원이며 수향택국(水鄕澤國)이었다. 도시화는 이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강남지역은 명초에 홍무제(洪武帝)가 뽕나무, 마, 목면의 재배를 권장하고 조세의 일부를 그 생산물로 납부하게 하면서 경제구조가 변모하였다. 이 지역에는 면화를 원료로 하는 면직업과 견직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면직업에 견직업의 방직기술이 결합되면서 고급면포 생산이 이루어졌다. 미곡을 재배하던 농경지가 뽕나무나 목면의 재배지로 변모하였고, 견직업, 면직업 분야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어 인구가 급증하였다.
강남지역에는 소주, 남경, 항주 같은 대도시만이 아니라 시진이라는 다수의 중소도시들이 밀집하였다. 명, 청시대 발달한 도시 중 시(市)는 대개 100~300호 정도로 보편적이었고, 500~1,000호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1,000~2,000호는 극소수였다. 진(鎭)은 대개 1천호 이상의 중급도시를 지칭했는데, 인구는 2천호에서 3천호정도였다. 명청시대 강남지방의 도시화는 이미 존재하던 대도시는 안정되어 성장세가 둔화된 반면, 시진은 수적인 증가와 함께 시진내외의 호구수도 증가함으로써 도시규모의 확대와 번영이라는 양면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소주부 오강현 성택진(盛澤鎭)의 경우 명초에는 50~60가구에 불과한 촌락이었으나 15세기 중엽부터 상인과 수공업자가 증가하기 시작하여 16세기 중엽에는 100여 호로 증가했고, 17세기 전반에는 1천호, 강희연간(1662~1772)에는 1만여호로 증가한 결과, 1740년(건륭 5)에는 진(鎭)으로 승격하였다. 소주부 진택진(震澤鎭)의 경우 14세기 중엽에는 수십호의 촌락이었으나 15세기 중엽에는 300~400호, 16세기 중엽에는 2천호~3천호로 증가했다.
명말 청초를 기준으로 하여 1만호 이상의 초대형 진은 소주부에 성택진 등 6개, 송강부 2개, 호주부 2개, 가흥부 3개, 항주부 1개, 가흥과 호주부 사이에 있었던 호청진 등 모두 15개였다. 거민이 수천호에서 만호에 이르는 중형 진도 10개였다. 이처럼 명청시기 강남지역의 시진은 매우 빠르게 늘었다.주 664
각주 664)
오금성(2007), 『국법과 사회관행-명청시대사회경제사연구』, 지식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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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부와 송강부에서 나타난 시진의 증가추세를 보면 다음의 〈표 6〉과 같다.
표 6 16세기~20세기 소주부, 송강부 양부의 시진의 증가추세范毅軍(2002), 「明中葉以來江南市鎭的成長趨勢擴張性質」 『歷史語言硏究所集刊』 73~3, 中央硏究院(오금성(2007), 『국법과 사회관행-명청시대사회경제사연구』, 지식산업사, 301쪽에서 재인용).
1550년 이전1551~17221723~18611862~1911
소주부102128157264
송강부59113167369
〈표 6〉에서 보듯이 소주부의 시진은 1550년 이전에 102개였다가 18세기 중엽에는 157개로, 19세기에는 264개로 늘었다. 송강부는 1550년 이전에 59개였다가 18세기 중엽에는 167개로, 19세기에는 369개로 급속하게 늘었다.
이처럼 늘어난 강남의 시진들은 업종별로 전문화된 자신의 산업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비단생산의 중심은 남심진(南尋鎭), 성택진, 면포생산의 중심은 남상진(南翔鎭), 나점진(羅店鎭), 미곡유통의 중심지는 풍교진(楓橋鎭)과 평망진(平望鎭) 등이 대표적 시진이었다. 시진은 교통이 중요하므로, 강남지역의 경우에는 수로의 연변이나 교차지점에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특정 행정단위 내에서만 형성된 것이 아니라 현과 현의 경계에 위치하기도 하고 2개의 성에 걸쳐있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풍경진(楓涇鎭)의 북측은 강소성, 남측은 절강성에 속했다. 이들 시진은 성벽에 둘러싸여 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주 666
각주 666)
이윤석(2007), 「도시」 『명청시대 사회경제사』(오금성 외 지음), 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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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 : 근세도시 ‘성하정’의 발전
영주제의 전개에 따라 영주들은 가신과 상공업자를 성하정에 집중시켰다. 무사층은 석고제(石高制)에 의해 농촌에서 쌀과 화폐를 연공으로 받았는데, 그 쌀의 일부는 직접 소비했지만, 그 나머지와 화폐로 받은 연공은 행정비용에 충당하거나 생활에 필요한 물품과 서비스를 구입하는데 사용했다. 이러한 화폐지출을 둘러싸고 다수의 상공업자, 서비스업자가 모여 거주한 곳이 성하정이었다. 성하정이 영내 인구의 1~2할 정도를 흡수하면서 도시로 성장함에 따라 영국내 도시와 농촌의 분리가 뚜렷해졌다. 막부직할지는 물론 거의 모든 영주의 지배하에서 병농분리가 실시되고, 무사의 성하정 집주가 실현되었다. 17세기 중엽이후 성하정을 중심으로 한 교통, 유통구조가 정비됨으로써 성하정은 영역시장의 중핵에 위치하게 되고 정보와 문화센터의 역할도 맡게 되었다.
무사와 농민의 신분적 공간적 분리가 사회구조로 정착된 에도시대에 성하정의 형성은 무사들에게 필수요건이었다. 각 번(藩)에서의 병농분리와 성하정의 건설이라는 지방적인 변화를 전국 규모로 확대시킨 것은 참근교대제였다. 때문에 전국 250여개 번이 각각 스스로 성하정을 형성하게 된다. 모든 다이묘 재정의 3분의 1을 소비시킨 참근교대는 에도라는 거대도시와 에도에 상품공급역할을 하는 오사카와 교토를 낳았다.주 667
각주 667)
速水融(하야미 아키라) 지음·조성원·정안기 옮김(2006), 「근세일본의 경제발전」 『근세 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 혜안,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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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정 중에는 전국 다이묘[戰國大名] 이래의 성하정, 숙장정(宿場町), 항정(港町), 문전정(門前町) 등을 기초로 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근세에 들어와 새롭게 건설된 도시였다. 무사와 상인의 인구비율은 3:7 혹은 4:6이 일반적이었고, 상인인구는 카나자와[金澤]의 7만명을 최고로, 나고야[名古屋], 카고시마[鹿兒島]가 6만명, 히로시마[廣島], 후쿠오카[福岡]가 4만명, 오까야마[岡山], 센다이[仙臺] 등이 뒤를 잇는 규모였다.
에도[江戶], 오사카, 교토의 삼도(三都)는 각지의 성하정이 상위에 위치하면서, 전국적인 정치, 상공, 문화의 중심으로 기능했다. 쇼군[將軍]이 거주하는 에도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에도는 쇼군에 봉사하는 각종 관원과 참근교대로 에도에 올라온 무사 등 60만명에 상인 40만명을 합해 인구 100만명의 거대 도시로 발달하였다. 에도는 소비수요의 확대로 말미암아 전국시장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점했다. 교토는 인구 35만 여명을 헤아렸으며, 문화, 경제적 전통과 염직, 금속, 미술 등의 분야에서 고도의 공업기술을 자랑했다. ‘천하의 부엌[天下の台所]’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던 오사카는 17세기 후반부터 전국적 상업 금융활동의 중심으로서 전성기의 인구는 40만명에 달하였다.주 668
각주 668)
水本邦彦(미쓰모도 쿠니히코)(2003), 「막번체제」 『새로 쓴 일본사』 (朝尾直弘 아사오 나오히로 엮음·이계황 외 옮김),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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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 : 행정도시 중심의 도시화와 도시화의 한계
조선의 도시들은 15세기에 확립된 위계적 지방행정조직에 따라 철저하게 조직되었다. 조선시대의 지방행정은 주, 부, 군,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방 중에서 개성은 경관직(京官職)인 종2품 유수(留守)가 통치했다. 외관직(外官職)으로서 종2품 부윤(府尹)이 다스리는 고은은 평양, 전주, 경주, 영흥 등 4곳이었고, 정3품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가 통치하는 고을은 안동, 강릉, 안변, 영변 등 4곳이었고, 정3품 목사(牧使)가 통치하는 곳은 광주(廣州), 공주, 안동, 진주 등 20곳, 종3품 도호부사가 통치하는 부는 수원, 강화, 부평 등 총 44곳이었다. 그리고 종4품 군수가 다스리는 곳은 82곳, 종5품 현령이 다스리는 현은 34곳, 종6품 현감이 다스리는 현은 141곳으로 총 330개 군현으로 구성되었고, 여기에 수도인 정2품 판윤(判尹)이 통치하는 한성부를 합하면 총 331개의 지방행정단위를 지니고 있었다.주 669
각주 669)
『경국대전』, 吏典 外官職, 조선시대 전시기를 걸쳐 군현의 수는 약간의 변동이 있지만, 대체로 330개를 전후하여 큰 변동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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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고을의 크기에 따라 위계를 설정하여 통치하는 방식은 고구려 이래의 지방통치방식을 계승한 것이었지만, 이것이 제도와 법전에 고착된 것은 15세기 이후의 이이다.주 670
각주 670)
장국종(1990), 『조선정치제도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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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종3품 도호부사 이상이 통치하던 74개 고을은 오늘날도 대부분 모두 시(市) 단위 이상의 행정구역으로 편제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한국도시사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룬다. 즉 대부분 행정중시지를 바탕으로 도시가 형성, 발전해 왔다는 점, 도시의 위계가 지방통치체계상의 위상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 그리고 도시의 연원이 매우 오랜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1789년(정조 13) 조사된 전국 군현별 인구수 조사자료인 『호구총수(戶口總數)』를 기초로 조선후기 도시인구 규모를 살펴보면 다음의 〈표 7〉과 같다.
표 7 1789년 『호구총수』의 인구 5,000명 이상 도시손정목(1977), 『조선시대도시사회연구』, 일지사, 211~215쪽. 본 통계는 호구총수의 군현별 인구수 중에서 읍치가 있는 지역을 포함한 1개 또는 2개의 면 지역 인구수를 합계한 것이다. 그러므로 농촌부 인구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조선의 인구통계가 도시부를 확정할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미흡하지만 기왕의 연구를 그대로 인용한다. 중국과 조선의 경우 서양이나 일본과 같이 도시와 농촌의 분리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도시인구를 추계할 때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지역인구지역인구지역인구지역인구
한양189,153황주8,123명천5,978廣州5,467
개성27,769거제7,839창성5,963청주5,436
평양21,869영유7,754의성5,948상원5,431
상주18,296공주7,139동래5,946함흥5,418
전주16,694성천7,085밀양5,818철산5,272
대구13,734제주6,761초산5,769덕천5,255
충주11,905정주6,536강화5,704홍원5,225
의주10,837안주6,401나주5,638온양5,147
진주10,000안동6,334아산5,607부여5,144
해주9,958당진6,316태인5,601가산5,081
경성9,102단천6,308光州5,525양주5,031
부산9,047경주6,308정안5,488선천5,007
길주8,641
〈표 7〉에서 보듯이 인구 5,000명 이상의 도시 49곳 가운데 종3품 도호부 이상의 고을은 30곳이었다. 도후부 이상의 고을이 전체 74곳이었는데, 그 중 30곳이 5천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 조선에서는 행정상의 위계가 높은 곳이 도시로 성장한 것이다.
행정중심지의 도시화가 조선시대 보편적 추세이긴 했지만, 의주 주내면(인구수 10,837명), 동래부 부산면(9,047명), 동래부 읍내면(5,946명), 창원 부내면(4,381명), 안성(3,497명), 덕원 부내사, 북면사(3,497명), 덕원 원산촌(3,416명), 은진군 김포면 강경(2,671명) 지역은 상업과 교역 중심지로써 도시로 성장한 곳이었다. 덕원의 원산촌, 은진의 강경, 창원 등지는 조선후기 포구상업이 활성화되면서 인구가 늘어난 곳이며, 안성은 삼남지역의 물화가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에 집산되는 육로유통의 중심지로써 성장한 곳이었다. 동래와 의주는 잘 알려져 있듯이 대청, 대일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인구가 밀집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조선에서도 농촌과 수공업에서의 상품생산의 발달과 이에 기초한 상업발달이 행정중심지가 아닌 교통중심지에서 도시가 생성, 발달하였던 것이다. 18세기 후반 인구 1만명 이상의 도시는 한양, 개성, 평양, 전주, 대구, 전주, 충주, 의주 등지였다.
이와 같은 도시화의 진전 중에서 가장 뚜렷한 모습을 보이는 곳이 수도인 한양이었다. 18세기 후반 조선왕조의 호구 통계상의 한양인구는 20만 명이었지만, 실 거주인구는 30만 명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주 672
각주 672)
고동환(1998), 「조선후기 서울의 인구추세와 도시문제의 발생」 『역사와 현실』 28,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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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명의 거주인구를 예상하고 건설된 도시에 그 3배에 달하는 인구가 집중됨으로써 한양의 도시공간도 도성 밖으로 확대되었다. 18세기 후반 통계에 의하면 한성부 전체 호의 49.7%가 도성 밖에 거주하였다. 세종 때인 15세기 전반 도성 안 인구가 90%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증가된 인구의 대부분이 도성 밖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인구의 증가와 상업발달에 따라 서울은 점차 중세적 왕도(王都)에서 상업도시로 그 성격이 변하였다. 도시구조 자체도 궁궐과 관청 중심에서 상업중심지의 비중이 높아지는 구조로 변모하였다. 한양 건설초기 종로 시전상가 하나뿐이었던 상업중심지는 18세기 이후 칠패(七牌)와 이현(梨峴 : 배오개), 서소문밖 네 군데로 늘었고, 인구구성도 종친과 관원중심에서 상업인구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19세기 초의 한 기록에는 “장사나 품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는 한잡지류(閑雜之類)가 수십만명을 헤아린다.”고 얘기되고 있다. 상인, 수공업자와 임노동자층이 서울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함으로써 한양은 신분적 권위보다는 경제적 실력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도시로 변모되었던 것이다.
도시인구비율에 있어서도 한양의 도시인구비율은 전국인구의 3.8%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다.주 673
각주 673)
고동환(2007), 「17, 18세기 런던과 서울의 도시구조비교」 『조선시대 서울도시사』, 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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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도시인 개성의 인구는 한성부 인구의 14%에 지나지 않았다. 한성부의 도시인구는 한성부 이하 14위 도시까지를 모두 합한 인구수보다 많았다. 한성부를 제외한 인구 5,000명이상인 48곳의 도시인구가 전국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14%로서, 한성부의 도시인구 비중의 두 배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총 인구 중 수도 한양의 인구비중은 낮았지만, 도시인구 중의 한양인구의 비중이 압도적인 것은 도시화율이 낮았기 때문이다.주 674
각주 674)
이헌창(2006), 「한국사에서의 수도집중」 『한국사연구』 134, 한국사연구회. 이헌창교수는 앞의 손정목 교수가 읍치가 위치하는 면 전체의 인구수를 도시인구로 추계한 것과 달리 읍치를 중심으로 거주가 밀집한 지역의 인구만을 도시인구로 추계했기 때문에 도시인구수 추계가 손정목교수의 연구와는 크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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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도시화는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18세기까지 조선의 도시인구는 완만히 증가하였으나 총인구가 더욱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에 도시화율은 오히려 낮아졌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사회적 분업의 진전과 상품화폐경제의 성장을 기반으로 점차 도시화율이 높아져 갔다.

  • 각주 662)
    斯波義信(시바 요시노부) 지음·임대희·신태갑 옮김(2008),『중국도지사』, 서경문화사. 바로가기
  • 각주 663)
    오금성(1986), 『中國近世社會經濟史硏究-明代紳士層의 形成과 社會經濟的役割-』, 일조각. 바로가기
  • 각주 664)
    오금성(2007), 『국법과 사회관행-명청시대사회경제사연구』, 지식산업사. 바로가기
  • 각주 665)
    范毅軍(2002), 「明中葉以來江南市鎭的成長趨勢擴張性質」 『歷史語言硏究所集刊』 73~3, 中央硏究院(오금성(2007), 『국법과 사회관행-명청시대사회경제사연구』, 지식산업사, 301쪽에서 재인용). 바로가기
  • 각주 666)
    이윤석(2007), 「도시」 『명청시대 사회경제사』(오금성 외 지음), 이산. 바로가기
  • 각주 667)
    速水融(하야미 아키라) 지음·조성원·정안기 옮김(2006), 「근세일본의 경제발전」 『근세 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 혜안, 243쪽. 바로가기
  • 각주 668)
    水本邦彦(미쓰모도 쿠니히코)(2003), 「막번체제」 『새로 쓴 일본사』 (朝尾直弘 아사오 나오히로 엮음·이계황 외 옮김), 창작과 비평사. 바로가기
  • 각주 669)
    『경국대전』, 吏典 外官職, 조선시대 전시기를 걸쳐 군현의 수는 약간의 변동이 있지만, 대체로 330개를 전후하여 큰 변동이 없었다. 바로가기
  • 각주 670)
    장국종(1990), 『조선정치제도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바로가기
  • 각주 671)
    손정목(1977), 『조선시대도시사회연구』, 일지사, 211~215쪽. 본 통계는 호구총수의 군현별 인구수 중에서 읍치가 있는 지역을 포함한 1개 또는 2개의 면 지역 인구수를 합계한 것이다. 그러므로 농촌부 인구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조선의 인구통계가 도시부를 확정할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미흡하지만 기왕의 연구를 그대로 인용한다. 중국과 조선의 경우 서양이나 일본과 같이 도시와 농촌의 분리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도시인구를 추계할 때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바로가기
  • 각주 672)
    고동환(1998), 「조선후기 서울의 인구추세와 도시문제의 발생」 『역사와 현실』 28, 한국역사연구회. 바로가기
  • 각주 673)
    고동환(2007), 「17, 18세기 런던과 서울의 도시구조비교」 『조선시대 서울도시사』, 태학사. 바로가기
  • 각주 674)
    이헌창(2006), 「한국사에서의 수도집중」 『한국사연구』 134, 한국사연구회. 이헌창교수는 앞의 손정목 교수가 읍치가 위치하는 면 전체의 인구수를 도시인구로 추계한 것과 달리 읍치를 중심으로 거주가 밀집한 지역의 인구만을 도시인구로 추계했기 때문에 도시인구수 추계가 손정목교수의 연구와는 크게 다르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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