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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제2차 침략

4. 제2차 침략

1) 조선의 대비
강화회담이 진행되는 도중에 조선 정부는 재침에 대한 대비를 충실하게 하였다. 중앙에는 1594년 훈련도감을 설치해 조총과 화약 등 무기를 제조하였고,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참조해 절강병법(浙江兵法)을 도입하였다. 지방에는 양인과 천인(賤人)을 가리지 않고 소규모부대로 편제하는 방식인 속오군(束伍軍)을 설치하였으며, 요해지에는 산성을 구축하였다. 이들은 2차 침략 때에 각지에서 일어난 자생적인 의병과 함께 활약하였다.주 378
각주 378)
그러나 일본군도 2차 침략 때에는 대규모 작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의병은 1차 침략 초기와 같은 활약은 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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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과
1597년 1월 15일 히데요시는 재침을 선언하였고, 3월부터 일본군 141,500명이 다시 조선으로 상륙하였다. 일본의 재침이 시작되자 조선 조정은 명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1597년 6월에는 육군과 수군을 합쳐 도합 10만 명의 군사가 다시 출병하였다.주 379
각주 379)
『명사(明史)』 권21 신종(神宗)본기(本紀) 만력(萬曆) 25년 병자 및 『선조수정실록』 권31 선조 30년 2월 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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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는 조선의 수군이 연합함대를 구축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6월 18일 부산포까지 나가 일본 수군에 대해 선제공격에 나섰으나 패배하였다. 이어 7월 14일에는 칠천량해전에서 참패를 당하였다. 이에 200척에 달했던 조선 수군의 전선이 12척만 남기고 침몰하였으며, 남해의 제해권을 일본에게 넘겨주었다. 해전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호남지역으로 수륙병진작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1차 침략과 달리 호남지역 점령에 주력한 일본군은 8월 15일 남원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 승리하였고, 전주성까지 무혈입성하였다.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조선수군이 사실상 와해되자 조정에서는 해전을 포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7월 22일 복귀한 이순신은 전라우수영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후 8월 28일 해남에서 일본선 8척을 격파하였다. 이어 9월 15일에는 명량해전에서 12척으로 130척의 일본수군을 물리치는 기적적인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조선 수군은 서남해의 제해권을 되찾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9월 5일에는 충청도 직산에서 조명연합군이 일본군과 정면으로 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일본군의 서울진공작전은 좌절되고 이후로는 후퇴로 일관하였다. 직산전투와 명량해전에서의 승리로 조명연합군은 수륙 양면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이것으로써 2차 침략은 사실상 완전히 좌절된 셈이다. 이후 일본군은 퇴각했으며 조명연합군은 추격전을 벌였다.
1597년 12월 23일에서 1598년 1월 4일까지의 울산성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가토군을 공격하였다. 이어 1598년 7월 조명연합군은 4로로 나누어 총공세를 펴나갔다. 당시의 명군은 육군 66,000명, 수군 5,000명이었으며, 6월에는 절강(浙江)으로부터 500척의 전선이 당도하였다. 그런데 이미 일본군은 대부분 철수한 상태였다. 9월 20일 연합군은 총공격에 나섰으나, 명군은 일본군을 추격해 섬멸하자는 조선의 요구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가 병사하였다. 일본에서는 그의 죽음을 숨기다가 9월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오대로(五大老)의 합의에 따라 사실을 알리고 철군령을 내렸다. 철수명령이 전해지자 경상도 연아네 주둔하던 일분군은 무사히 물러났다. 마지막으로 순천에 주둔해 있던 고니시군이 철수하려고 할 때 이순신은 섬멸을 주장하였다. 그는 추격을 반대하는 명의수군제독 진린(陳麟)을 설득하여 최종결전에 나섰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11월 18일 노량해전에서 200척의 일본전선을 격침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전사함으로써 이 전쟁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전투의 장렬함을 더하였다.
12월 26일 일본군이 부산에서 완전히 철수함으로써 7년간의 전쟁이 막을 내렸다. 1600년 9월에는 명군도 완전히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전쟁의 시작이 공식적인 선전포고 없이 일본군의 기습에 의해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마무리 또한 공식적인 정전협정이나 강화조약의 체결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7년간에 걸친 파멸적인 전쟁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실로 어이없는 결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불명확한 전쟁종결 때문에 조선과 일본 양국은 전후 국교재개과정에서 전쟁책임과 전후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복잡한 외교적 교섭을 거쳐야 했다.

  • 각주 378)
    그러나 일본군도 2차 침략 때에는 대규모 작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의병은 1차 침략 초기와 같은 활약은 하지 못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379)
    『명사(明史)』 권21 신종(神宗)본기(本紀) 만력(萬曆) 25년 병자 및 『선조수정실록』 권31 선조 30년 2월 병자.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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