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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조선의 정세

4. 조선의 정세

건국 이후 50여 년간에 걸친 교린외교의 결과 대일관계가 안정되었으나 16세기 들어와 변질되면서 위기를 맞이하였다. 1510년 발생한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시작으로 해, 1543년의 사량진왜변, 1555년의 을묘왜변 등으로 인해 파탄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건의 배경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으나 조선의 대응은 고식적인 차원에 머물렀다. 또 일본 내의 정세 변화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였으며, 중앙정부 간의 실질적 교섭은 중단되었다. 대마도주에 의한 위사(僞使)만 성행하였을 뿐이다.
국내 사정을 보면 4대 사화(士禍)를 거치고 정권 핵심부에 진입한 사림파(士林派)가 다시 내부의 정쟁을 시작하면서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1575년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된 을해붕당(乙亥朋黨)이 이루어졌고,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을 계기로 시작된 기축옥사(己丑獄死)는 1년 이상 지속되면서 당쟁이 악화되고 지배층이 분열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가중대사를 앞두고 당파에 달라 전혀 다른 판단이 내려졌던 것이다.주 351
각주 351)
1590년 파견되었던 통신사 일행은 秀吉과의 담판을 마치고 1591년 정월 귀국하였다. 그런데 귀국 보고에서 정사 黃允吉은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였고, 부사 金誠一은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주장해 국론이 분열되었고, 이에 침략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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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시기에 이르러 사회경제적 모순이 증대되면서 전반적인 체제 불안정과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여기에 200년간의 승평과 안보를 외교에 맡겨온 타성에 의해 국제정세의 변동에 무관심하며, 국방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국가의 위기를 느끼고 십만양병설을 제기한 바 있는 이이(李珥)는 당시의 상황을 중쇠기(中衰期)라고 진단하면서 ‘원기가 소진된 노인과 같은 상태’라고 평하였다.주 352
각주 352)
李珥, 『經筵日記』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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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통신사일행이 귀국한 후부터 만일에 대비한 방어태세를 정비하였다. 경상도와 전라도 요충지의 성곽을 수축하고, 무기를 점검하였다. 수군이 경우 판옥선(板屋船)이라는 대형전함을 건조하였고, 대형 총통과 같은 화기도 개발하였다. 그러나 만성적인 재정 적자로 인해 대비책이 효율적으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조선의 장수들은 대부분 문관들이었고, 중앙에는 상비군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주 353
각주 353)
당시의 상황에 대해 실록에서는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士論은 성하지만 풍속은 각박하고 악하였다.”(『선조수정실록』 권23, 선조 22년 정원) 라고 평하였다. 또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軍政의 근본이라든가 장수를 뽑아 쓰는 요령, 군사를 조련하는 방법 등 어느 한 가지도 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전쟁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하여 초전의 실패 원인을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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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당시 방어체계는 조선 초기의 진관체제(鎭管體制)에서 1555년 을묘왜변 이후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로 바뀌었다. 그런데 요충지 중심으로 방어하는 이 체제는 대군이 침공할 때는 효용성이 떨어지는 전략이었다. 고려 말기의 왜구를 제외하고는 일본으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아본 역사적 전례가 없기 때문에 일본의 전면적 침략은 상상하지 못했다.

  • 각주 351)
    1590년 파견되었던 통신사 일행은 秀吉과의 담판을 마치고 1591년 정월 귀국하였다. 그런데 귀국 보고에서 정사 黃允吉은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였고, 부사 金誠一은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주장해 국론이 분열되었고, 이에 침략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352)
    李珥, 『經筵日記』권3. 바로가기
  • 각주 353)
    당시의 상황에 대해 실록에서는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되어 士論은 성하지만 풍속은 각박하고 악하였다.”(『선조수정실록』 권23, 선조 22년 정원) 라고 평하였다. 또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軍政의 근본이라든가 장수를 뽑아 쓰는 요령, 군사를 조련하는 방법 등 어느 한 가지도 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전쟁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하여 초전의 실패 원인을 지적하였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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