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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일본

4. 일본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서는 이 사건을 어떻게 부르고 있을까?
사료와 연구사적으로 사용된 명칭을 시대적인 순서에 따라 살펴보면 ‘가라이리[唐入り]’ ‘조선진(朝鮮陣)’ ‘고려진(高麗陣)’ ‘조선정벌(朝鮮征伐)’ ‘정한(征韓)’ ‘조선역(朝鮮役)’ ‘조선출병(朝鮮出兵)’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の役]’ ‘조선침략(朝鮮侵略)’ 등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이것은 이 사건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시대적으로 변해왔음을 잘 보여준다. ‘가라이리’ ‘조선진’ ‘고려진’ 등은 히데요시[秀吉]가 살아있던 당시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사용되었다.주 342
각주 342)
‘高麗陣’ ‘朝鮮陣’과 같이 국내전쟁에서 사용하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秀吉이 이 전쟁을 국내통일전쟁의 연장선상으로 인식하였다는 증거로서 외국과의 전쟁이라는 인식이 거의 없었다는 증거라고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倉地克直, 『近世日本人は朝鮮をどうみていたか』, 2001, 角川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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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江戶]시대에는 이 전쟁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였으나, 명칭은 ‘조선정벌’ ‘정한’ 등이 사용되었다. 일부 유학자를 중심으로 명분없는 전쟁이라는 평가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일본의 무위(武威)를 해외에 과시한 쾌거라는 인식이 많았다. 또 승리한 전쟁으로서 패전이라는 의식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인식은 막부말기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에 보다 강화되어 ‘조선정벌’이란 용어가 일반화되었다.주 343
각주 343)
김문자(1998), 「일본인과 임진왜란」 『상명사학』6, 120~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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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메이지유신 이후 조선침략론[征韓論]이 제기되면서부터는 ‘조선정벌’에서 더 나아가 ‘정의의 전쟁’ ‘성전(聖戰)’으로 평가하기까지 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기치 아래 ‘조선정벌’ 대신 ‘문록경장의 역’이란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주 344
각주 344)
石原道博은 『文祿慶長の役』(1967)에서 ‘朝鮮征伐’에서 ‘文祿慶長の役’으로 명칭이 바뀐 이유에 대해서 “러일전쟁을 거쳐 1910년 한일합방이 실현되자 지금까지 적으로 간주되었던 조선인이 일본의 동포가 되었기 때문에 朝鮮征伐이란 표현을 버리고 文祿慶長의 役으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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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칭이 학술용어로 정착된 것은 1914년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가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の役』이라는 제목의 책을 간행하면서 부터이다.주 345
각주 345)
池內宏(1914), 『文祿慶長の役』正編, 南滿洲鐵道柱式會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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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에 이 사건을 침략전쟁으로 인식하는 시각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일본에서는 ‘문록경장의 역’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용어가 ‘정벌’과 ‘침략’ 사이에 있는 가치중립적인 용어인 것처럼 이해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일본에서 ‘역(役)’이란 인민을 징발해 치르는 전쟁[戰役]이란 의미로 이해되지만 국내의 전쟁에 주로 사용되는 용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주 346
각주 346)
‘朝鮮出兵’이란 용어 또한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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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내전(內戰)이나 정부군이 반란군을 토벌할 때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1980년대 들어서 기타지마 만지[北島万次]가 ‘조선침략(朝鮮侵略)’이라는 개념을 적극 주장하면서 점차 확산되어 가는 중이다.주 347
각주 347)
일본에서 이 전쟁에 관해 ‘文祿慶長の役’이 아니라 ‘秀吉의 朝鮮侵略’이라고 최초로 규정한 연구자는 鈴木良一이었다. 그는 1954년에 간행한 『豊臣秀吉』에서 지금까지 일본에서의 연구에서는 ‘침략과 저항의 역사’에 관한 연구는 없었다고 하면서 ‘조선정벌사관’을 비판하였다. 1980년대 이후 北島万次는 『朝鮮日日記·高麗日記 : 秀吉の朝鮮侵略とその歷史的告發』(1982), 『豊臣政權の對外認識と朝鮮侵略』(1989), 『豊臣秀吉の朝鮮侵略』(1995) 등 일련의 저술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일본의 침략전쟁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 ‘文祿·慶長의 役’이라는 표현 대신 각각 秀吉의 제1차 침략, 제2차 침략이라고 정확하게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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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342)
    ‘高麗陣’ ‘朝鮮陣’과 같이 국내전쟁에서 사용하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秀吉이 이 전쟁을 국내통일전쟁의 연장선상으로 인식하였다는 증거로서 외국과의 전쟁이라는 인식이 거의 없었다는 증거라고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倉地克直, 『近世日本人は朝鮮をどうみていたか』, 2001, 角川書店). 바로가기
  • 각주 343)
    김문자(1998), 「일본인과 임진왜란」 『상명사학』6, 120~121쪽. 바로가기
  • 각주 344)
    石原道博은 『文祿慶長の役』(1967)에서 ‘朝鮮征伐’에서 ‘文祿慶長の役’으로 명칭이 바뀐 이유에 대해서 “러일전쟁을 거쳐 1910년 한일합방이 실현되자 지금까지 적으로 간주되었던 조선인이 일본의 동포가 되었기 때문에 朝鮮征伐이란 표현을 버리고 文祿慶長의 役으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345)
    池內宏(1914), 『文祿慶長の役』正編, 南滿洲鐵道柱式會社. 바로가기
  • 각주 346)
    ‘朝鮮出兵’이란 용어 또한 마찬가지이다. 바로가기
  • 각주 347)
    일본에서 이 전쟁에 관해 ‘文祿慶長の役’이 아니라 ‘秀吉의 朝鮮侵略’이라고 최초로 규정한 연구자는 鈴木良一이었다. 그는 1954년에 간행한 『豊臣秀吉』에서 지금까지 일본에서의 연구에서는 ‘침략과 저항의 역사’에 관한 연구는 없었다고 하면서 ‘조선정벌사관’을 비판하였다. 1980년대 이후 北島万次는 『朝鮮日日記·高麗日記 : 秀吉の朝鮮侵略とその歷史的告發』(1982), 『豊臣政權の對外認識と朝鮮侵略』(1989), 『豊臣秀吉の朝鮮侵略』(1995) 등 일련의 저술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일본의 침략전쟁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 ‘文祿·慶長의 役’이라는 표현 대신 각각 秀吉의 제1차 침략, 제2차 침략이라고 정확하게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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