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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원대 성리학의 관학화

1. 원대 성리학의 관학화

원대(元代) 초반에는 남소의 성리학이 북쪽으로 전파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원나라 유학은 금(金)나라의 유학을 계승한 장구(章句) 위주의 학풍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던 중 원나라의 군대가 남송으로 진격할 당시 유학자인 양유중(楊惟中)·요추(姚樞) 등이 군대를 따라 호북(湖北) 지방에 이르렀다가, 그 곳에서 포로로 잡혀온 남송의 유학자 조복(趙復)을 발견하고 그를 북경의 태극서원(太極書院)으로 맞이해 와서 성리학의 전수를 요청하였다. 이로부터 북방의 유학자인 요추, 유인(劉因), 허형(許衡) 등이 남방의 성리학을 전수받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조복을 간접적으로 사사(師事)했던 허형이 성리학을 원의 관학으로 정립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허형(1209~1281)은 처음에 ‘구두훈해(句讀訓解)’ 중심의 유학을 공부했다가, 조복으로부터 성리학을 전수받은 요추를 만나 성리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요추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정이의 『이천역전』, 주희의 『사서집주』 『소학(小學)』 『대학혹문』 『중용혹문』 등을 공부하였다. 허형은 특히 『소학』을 중시하여 『소학』에 나오는 일상생활에서의 공부에 대해 ‘신명을 마주하듯’ 경외하였으며, 이것이 성리학의 입문(入門)이료 요율(要律)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허형은 실천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따라서 ‘도(道)’를 민생일용(民生日用)과 양민치생(養民治生)의 사상이라고 생각하였다.
허형은 성리학이 원나라의 관학으로 자리매김 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명대(明代) 유학자 설선(薛宣)으로부터 ‘주자(朱子) 이후 제1인자’라는 평가를 받았고, 도통(道統)에도 들어갈 정도로 원대 성리학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한편, 남방 지역에서는 오징(吳澄, 1249~1333)이 원대를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오징은 27세 이전에는 남송에서, 그 후에는 원에서 살았다. 그는 허형과 더불어 원나라의 명유(名儒)로서 이름을 떨쳐, ‘남방에는 오징, 북방에는 허형[南吳北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허형은 북방인으로서 남방의 성리학이 북방에 전파된 이후에야 주자학을 공부하였지 때문에 학문에 거친 점이 있었지만, 오징은 남방 사람으로서 송대 성리학을 직접적으로 계승하였기 때문에 허형에 비해 ‘정학진전(正學眞傳)’으로 깊은 조예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징은 유학자 집안 출신으로 16세 때 과거장에서 요로(饒魯)의 제자인 정약용(程若庸)을 알게 되면서 요로의 재전(再傳) 제자가 되었고, 후에 정소개(程紹開)를 사사하기도 했다. 원대에 들어 동문인 정구부(程矩夫)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가기도 했지만 관직에 머문 기간은 매우 짧았으며, 대부분의 생애 동안 고향에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는 성리학과 경학뿐만 아니라 천문(天文)·산율(算律) 등도 두루 섭렵하였으며, 기본적으로 성리학자이지만 육구연(陸九淵)의 심학(心學)도 부분적으로 수용하였는데, 이 때문에 주(朱)·육(陸)을 융합한 학자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주요 저술로는 『오경찬언(五經纂言)』이 있다.
한편, 원대의 남방 학계에는 오징 이외에도 하기(何基)·왕백(王柏)·김이상(金履祥)·허겸(許謙) 등 이른바 북산사선생(北山四先生)이 주축을 이룬 금화학파(金華學派)가 형성되어 남송의 성리학을 계승·발전시켰다.
원나라에서 성리학이 크게 성행하여 관학(官學)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된 데에는 과거제(科擧制)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원나라에서 과거가 시작된 것은 남송이 멸망한 뒤 30여 년만인 1315년이었다. 이보다 앞서 1313년부터 정구부(程矩夫)·원명선(元明善) 등의 주도하에 과거제도의 조례(條例)가 만들어졌는데, 이때의 핵심은 명경과(明經科)에서 정이·정호 형제와 주희, 그리고 여타 성리학자들이 지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의 성리학 주석서들을 시험의 표준 교재로 삼았다는 점이다.
원나라 인종(仁宗) 연간에 제정된 과거의 시험 과목을 살펴보면, 사서(四書)는 주희의 『집주(集註)』와 『장구(章句)』를 병용하도록 하였고, 삼경(三經)의 경우에는 『시경』은 주희의 『시집전(詩集傳)』 『서경』은 채침(蔡沈)의 『서집전(書集傳)』 『주역』은 정이의 『이전역전(伊川易傳)』과 주희의 『주역본의(周易本義)』를 위주로 하면서 고주소(古註疏)를 겸용하게 하였다. 또 『춘추』는 『좌전(左傳)』 『곡량전(穀梁傳)』 『공양전(公羊傳)』 등 삼전(三傳)과 호안국의 『춘추전(春秋傳)』을 모두 허용하였으며, 『예기』는 고주소(古註疏)를 사용하도록 하였다.주 311
각주 311)
馬宗霍(1936), 『중국경학사(中國經學史)』 대만상무인서관(臺灣商務印書館), 1987년 제7판,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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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원나라에서 과거 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정이·정호 형제, 주희 등이 지은 사서오경의 성리학 주석서들을 반드시 공부해야만 했고,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注)’는 모든 과거 응시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 결과 성리학은 원나라의 관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이는 이후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까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 각주 311)
    馬宗霍(1936), 『중국경학사(中國經學史)』 대만상무인서관(臺灣商務印書館), 1987년 제7판, 128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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