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동아시아의 역사

머리말

Ⅰ. 머리말

10세기 송(宋)의 출현과 함께 중국 사상계에는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송대(宋代) 이전의 중국 사상계는 주로 도교(道敎)·불교(佛敎)에 의해 주도되어 왔으며, 유학(儒學)의 경우는 문자(文字)의 이동(異同)에 치중한 훈고주소학(訓詁注疏學)을 통해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송대 이후 유학은 도교·불교의 세력을 압도하여 다시 사상계의 지배적 위치를 확립하였으며, 이후 명·청대에 와서도 유교의 정통적 위치는 변함이 없었다.주 308
각주 308)
李範鶴(1989), 「宋代 朱子學의 成立과 發展」 『강좌 중국사(Ⅲ)』, 지식산업사, 193쪽.
닫기

이른바 ‘송학(宋學)’으로 불리는, 송대 이후 새로이 등장한 유학에는 다양한 유파들이 존재했는데, 그 중에서 이후 중국의 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이 바로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도교와 불교의 이론을 흡수하여 기존의 유학에는 없었던, 정미한 인성론(人性論)과 철학적 사고를 발전시켰다. 유학은 성리학을 거침으로써 과거에 결여되었던 우주론과 존재론·인성론 등의 치밀한 철학적 기초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도교와 불교에 대항할 수 있는 세계관과 실천이념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성리학은 12세기 북송(北宋) 시대와 14세기 원대(元代)에 고려로 전파되면서 한국의 사상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원(元)을 통해 전래된 성리학을 수용한 고려말 사대부들이 성리학적 이념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국가 조선을 건국함으로써 조선의 학계에서는 성리학이 주류 사상으로서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송대 이후 성리학이 출현하고 조선에서 성리학이 국시(國是)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에는 ‘사대부(士大夫)’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송나라의 건국과 함께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한 사대부들은 문신관료지배(文臣官僚支配)의 확립, 비약적으로 성장한 경제에 대한 효율적 운영 등을 통해 기존의 귀족 중심이었던 중세적 체제를 ‘근세적(近世的)’ 체제로 변혁시키고자 했다. 또, 고려말에 새롭게 등장한 사대부들도 권문세족(權門勢族)이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고려를 개혁하여 문치주의(文治主義)와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실현하기 위해 조선을 건군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과 한국의 사대부들은 기존 권력과 연결되어 있는 불교·도교를 대신하여 개혁의 이념적 기반이 될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이처럼 성리학은 중국·한국의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라 그에 조응하는 새로운 사상적 기반으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한편, 일본은 조선을 통해 성리학이 전래되었으며, 비록 중국이나 조선만큼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거나 심오한 이론적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지속적인 연구와 교육을 통해 그 영향력을 확대하여 에도시대[江戶時代]에는 막부(幕府)의 관학(官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처럼 10~16세기 동아시아의 각국에서는 ‘성리학’이라는 공통된 학문 체계가 수용되어 각국의 상황에 부합하도록 사회사상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 각주 308)
    李範鶴(1989), 「宋代 朱子學의 成立과 發展」 『강좌 중국사(Ⅲ)』, 지식산업사, 193쪽.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머리말 자료번호 : edeah.d_0003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