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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한국

사대부 성장과 조선 건국

2. 한국 : 사대부 성장과 조선 건국

고려 후기에 지방 향리들이 중앙으로 진출함으로써 사대부가 출현하였지만, 이들이 정치세력을 형성한 것은 빨라야 14세기 후반 공민왕 때의 일이었고, 조선을 건국한 뒤에야 지배세력이 되었다. 따라서 고려후기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과 구별되고, 동시에 조선시대의 사대부와도 구별되는 제3의 존재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권문세족(權門勢族)이 바로 그것이다. 즉, 『고려사』에 실려 있는 충선왕의 복위교서에서 왕실의 동성혼을 금지하는 규정 가운데,
종친은 마땅히 여러 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그 재상 집안의 아들이라야 종실의 딸과 결혼할 수 있다.(중략) 신라 왕손인 김혼(金暉)의 일가는 순경태후의 형제 집안이며, 언양 김씨 일종, 정안 임태후의 일종, 경원 이태후와 안산 김태후의 집안, 그리고 철원 최씨, 해주 최씨, 공암 허씨, 평강 채씨, 청주 이씨, 당성 홍씨, 황려 민씨, 횡천 조씨, 파평 윤씨, 평양 조씨는 모두 누대에 걸친 공신이요 재상지종(宰相之宗)이니, 대대로 혼인하여 남자는 종실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고 그 딸은 왕비로 삼을 만하다(『고려사』 권33, 충선왕 복위년 11월 신미).
 
라고 한 데서 원간섭기에 왕실과 결혼할 수 있는 가문으로 나열된 ‘재상지종’을 당시의 지배세력으로 보고, 이들을 권문세족이라고 이름 붙이게 되었던 것이다.주 305
각주 305)
閔賢九(1974), 「高麗後期의 權門勢族」 『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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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문세족은 무신난 이후 변화된 정치·사회적 여건 아래서 성장하기 시작하여 14세기 초에 고려사회의 지배세력으로 정착하였다. 이들의 중요한 특징으로는 ① 문학적, 유교적 소양 없이 대부분 과거보다는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었고 ② 왕권이 약화되어 있는 가운데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였고 ③ 원과 결탁하는 데 적극성을 띠었고 ④ 경제적 기반을 농장에 두고 있는 대토지소유자였고 ⑤ 관료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과 구별되는 존재였다는 점이 거론된다.
권문세족이 개념이 제시되면서 고려후기 역사는 권문세족과 사대부의 대립 과정으로 설명되었으며, 특히 사대부의 정치적 성장 과정이 관심을 끌었다. 원간섭기의 개혁정치를 사대부에 의한 반원(反元) 개혁으로 보는 시가이 대표적인 연구 성과이다. 그러나 원간섭기의 개혁정치가 국왕의 교체 등 정치적 변동이 일어났을 때 전대의 권력집단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것이라거나, 더 나아가서는 토지 탈점과 수탈 등으로 말미암아 유망의 형태로 표출된 민의 저항에 대한 지배층의 대응으로서 나타난 것이라는 견해도 있어 반원개혁이었다는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따라서 원 간섭기에 사대부가 반원적 성향을 띠었다는 견해도 수용하기 어렵다.
원 간섭기 사대부의 성장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이 성리학의 수용이다. 남송에서 발전한 성리학이 고려 후기에 원을 거쳐 고려에 수용되었는데, 지금까지 연구에 따르면, 13세기 말에 안향이 원나라에서 들여온 뒤 백이정·이제현·이색 등에 의해 보급, 확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313년에 원에서 과거제도를 실시하면서 성리학을 시험과목에 포함시킨 것이 고려에서 성리학이 빠르게 수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고려 사람들도 원의 제과에 응시할 수 있었고, 그 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리학을 공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1344년에는 고려의 과거제도가 개편되어 성리학 서적인 논어·맹자·중용·대학 등 사서가 시험과목에 포함됨으로써 성리학이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고려후기 성리학의 수용과 확산이 원의 제과나 고려의과거제 개편과 맞물려 진행되었으므로 사대부들만 성리학을 수용했다고 볼 근거는 없으며, 권문세족도 역시 성리학을 수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고려후기의 성리학자를 사대부와 동일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오류이며, 사대부와 권문세족을 막론하고 성리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가 필요할 것인데, ‘신흥유신(新興儒臣)’이 바로 그것이다.주 306
각주 306)
이익주(1995),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역사와 현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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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흥유신들은 같은 성리학자로서 현실인식을 공유하였다. 이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계기가 된 것이 충목왕대(1345~1348)의 개혁정치였다. 이때 이제현이 글을 올려 국왕이 직접 성리학을 공부할 것을 건의하였고, 서연이 열려 성리학자들의 군주수신론(君主修身論)이 실현되었다. 과거제도가 개편되어 사서가 포함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으며, 이로부터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신흥유신들 사이의 유대가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충목왕대의 개혁은 원의 개입으로 실패했지만, 뒤이은 공민왕대 개혁의 선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공민왕은 몽골제국이 쇠퇴하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활용하여 반원 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하였으며, 곧이어 개혁에 착수하였다. 공민왕의 개혁은 권세가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지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본래 신분으로 되돌리는, 즉 전민변정(田民辨整) 수준의 것이었다. 하지만 반원운동 이후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 그리고 고려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원의 개입 등으로 개혁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성장해 있지 못했던 것도 실패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였는데, 『고려사』에는 당시 사정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왕이 재위한 지 오래되었는데 재상들이 뜻에 맞지 않으므로 말하기를, “세신대족(世臣大族)들은 친당이 뿌리처럼 이어져 있어 서로 허물을 가려준다. 초야신진(草野新進)들은 감정을 감추고 행동을 꾸며 명망을 탐하다가 귀현해지면 집안이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대족과 혼인하고 처음의 뜻을 다 버린다. 유생(儒生)들은 유약하여 강직하지 못하고, 또 문생·좌주·동년이라 칭하면서 당을 만들고 사사로운 정을 따르니 이 셋은 모두 쓰지 못하겠다. 세상을 떠나 홀로 선 사람[離世獨立之人]을 얻어 크게 써서 머뭇거리며 고치지 않는 폐단[因循之弊]을 개혁하고자 하였다.(후략)”라고 하였다(『고려사』 권132, 열전45 신돈).
 
이 사료에는 집안이 한미한 초야신진, 즉 사대부들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이루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세신대족, 즉 권문세족으로 발돋움하려는 경향이 강했던 당시 상황이 나타나 있다. 공민왕은 기존 정치세력과 무관한 신돈을 등용하여 자신이 의도하는 개혁정치를 추진하였지만, 개혁을 함께 추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신돈 개혁기에 성균관을 중영하여 신흥유신들을 결집시켰다. 성균관 중영에 대하여 『고려사』에는
공민왕 16년(1367)에 성균관을 중영하고 판개성부사 이색을 성균관 겸대사성으로 삼았으며, 생도의 인원을 늘리고 경술지사(經術之士)인 김구용·정몽주·박상충·박의중·이숭인을 택하여 모두 타관으로서 교관을 겸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성균관 생도가 불과 수십 명이었는데 이색이 학식을 다시 정하고 매일 명륜당에 앉아 경을 나누어 수업하고 강의를 마치면 서로 토론하기를 부지런히 하였다. 이 때 학자들이 모여들어 서로 보고 감탄하였으니, 정주의 성리학이 비로소 흥기하였다(『고려사』 권115, 열전28이색).
 
라고 하여 성리학의 확산과 관련지어 서술하였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신흥유신들이 성균관 중영을 통해 신돈의 개혁에 참여하였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권문세족의 반발로 말미암아 공민왕의 개혁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고려 말에 개혁이 재개된 것은 1388년(우왕 14)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였다. 이성계는 조준·정도전 등 신흥유신들을 중용하였고, 특히 조준의 주장에 따라 전제개혁을 추진하였다. 조준의 전제개혁은 하나의 토지에 수조권이 중복됨으로써 농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더 나아가 현직 관리가 수조권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조준은 대대로 관직에 오른 사람들이 수조권을 근거로 하여 불법적으로 점유한 사전(私田)을 없애고 이를 현직 관리나 군인들에게 재분재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권문세족의 경제기반은 상당 부분 와해될 것이고, 반대로 그들로부터 침해를 받고 있던 중소지주들의 이익은 증진될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 말의 전제 개혁은 중소지주층의 이해득실을 대변한 것으로 평가되며,주 307
각주 307)
李景植(1986),『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 一潮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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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곧 고려후기 이래 성장하고 있던 중소지주 출신의 관료들, 즉 사대부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전제개혁을 둘러싼 찬반 논쟁 과정에서 신흥유신 내부의 분열이 발생하였다. 같은 성리학자로서 충목왕, 공민왕대의 개혁정치를 거치는 동안 현실인식을 함께해 왔던 이들이 권문세족과 사대부 간의 계급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분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논쟁은 결국 개혁론자들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이는 고려후기 이해 성장하고 있던 사대부들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하였다. 그로부터 사대부 내부에서 새 왕조 개창과 고려 왕조의 존속을 둘러싼 대립이 전개되었고, 이성계와 정도전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가 승리함으로써 새 왕조 조선이 건국되었다(1392).

  • 각주 305)
    閔賢九(1974), 「高麗後期의 權門勢族」 『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바로가기
  • 각주 306)
    이익주(1995), 「공민왕대 개혁의 추이와 신흥유신의 성장」 『역사와 현실』15. 바로가기
  • 각주 307)
    李景植(1986),『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 一潮閣.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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