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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14~16세기 중국의 역사 발전

1. 14~16세기 중국의 역사 발전

몽골제국은 몽골리아로부터 동유럽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 위에 대통합과 평화의 시대(이른바 ‘팍스 몽골리카’)를 열었지만, 14세기 중엽부터 제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칸의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제왕(諸王)과 권신들의 암투가 끊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홍수·가뭄·지진 등 빈발하는 자연재해와 역병, 그에 따른 사회 동요는 카안울루스(이른바 ‘元朝’)의 정치·경제적 기반을 흔들었다. 정치·경제·사회 각 방면에서 개혁을 실시하고 티베트 불교를 후원하는 등 황실 권위를 재건하고자 한 토곤 테무르(順帝, 재위 1333~68)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1344년 대규모의 범람 끝에 황하의 물줄기가 바뀌면서 화북 일대에 치명적 타격을 가하였다. 원조는 황하 복원 공사에 15만 여 명의 민인과 2만 명의 군인을 투입하였지만, 공사 과정에서 식량과 인건비가 충분히 지급되지 않아 하층민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에 붉은 두건을 두르고 송의 부흥은 주창하는 백련교도의 홍건군이 화북 일대에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당시 회하(淮河)주 301
각주 301)
회하 유역은 당시 잦은 기근과 대량 유민의 발생하여 일종의 “거지들의 고향”이었으며 중국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화북과 강남을 제어하기에 유리하였다. 이는 주원장이 승리할 수 있는 지리적 원인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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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에서 걸식하던 탁발승이었던 주원장(朱元璋)이 홍건군에 투신하였다. 전란 중에 두각을 보인 주원장은 남경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고 유교 지식인을 흡수하며 국가 건설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1368년 남경에서 명(明)을 창건한 후 몽골인을 북쪽으로 축출했다.주 302
각주 302)
1368년 토곤 테무르는 몽골 제국의 여름 수도인 상도(上都)로 피신하였다가 이후 내몽골의 응창(應唱)으로 옮겼다가 1370년 사망하였다. 대칸의 직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는 중국 왕조를 수복하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1368년 이후 몽골제국은 멸망한 것이 아니라 몽골 초원으로 정치 중심을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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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제는 한족 전통을 회복하고자 몽골 풍습을 금지시켰으며, 원조에서 혼란의 원인을 국가 기강 해이로 인식하고 예(禮)와 법(法)을 국가의 기강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유교에 기반한 여섯 가지 가르침(육유六諭)을 반포하는 등 예(禮)에 근거하여 군주와 신민이 상하 관계를 유지하며 각기 분수를 지키고 생활하는 이상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황제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권력의 중추였던 강남 지주층과 건국 공신 등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 과정에서 재상이 중심이 된 중서성이 폐지되고 황제를 보좌하는 고문 기관인 내각과 그 책임자인 내각대학사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내각은 황제에게 보고되는 공문을 최종적으로 처리하고 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하면서 권한이 크게 강화되어 관료제도의 정점으로 올라섰다.
특히 1449년 영종이 서몽골 오이라트의 포로로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한 후(토목보의 변) 내각의 수장격인 수보(首輔)가 출현하였다. 수보의 권한은 만력 초기 장거정(張居正, 1525~1582)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장거정은 16세기 중반의 정치 부패와 사회 혼란을 바로잡고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도모한 명대 최고의 재상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1572년 10살의 만력제가 즉위하자, 그는 내각수보로서 권력을 장악하여 10년간 국정을 독단하였다. 그의 사후 내각에 의한 과도한 권력 남용, 관료 통제, 지방의 재정자율권 축소 등을 이유로 신사층을 중심으로 동림(東林) 운동주 303
각주 303)
동림당은 장거정 사후 만력제의 황태자 책봉 문제 등을 쟁점으로 당쟁을 벌이다 낙향한 고헌성(顧憲成)이 무석(無錫)에서 중건한 동림서원에서 유래한다. 강남 신사들이 동림서원을 중심으로 중앙정치에 비판을 전개하였는데, 이들을 동림당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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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복사(復社) 활동이 출현하였다.
내각과 함께 국정을 좌우한 이들은 환관이었다. 홍무제는 환관의 정치 개입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환관이 영락제의 제위 찬탈에 크게 기여한 후 그들의 권한이 확대되었다. 명조는 포로 출신을 환관으로 대거 기용하였으며, 그 가운데는 정화와 같이 걸출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또 각국의 인재를 모으고 후궁들을 관리할 목적에서 조선과 베트남 등지에서 온 거세자가 환관으로 등용되었다. 빈곤층은 신분 상승을 목적으로 스스로 거세하거나 자제를 거세하여 환관이 되었다. 이는 환관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였고, 그 결과 환관은 황제의 비호 아래 전권을 휘두르고 모반을 꾀하는 등 명조를 쇠퇴, 멸망시키는 발단이 되었다.
황제권 강화는 대외적으로 해금(海禁)과 책봉-조공으로 나타났다. 홍무제는 1371년 “연해의 민(民)이 사적으로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해금은 14세기 중엽 원조의 해양 지배가 동요하는 가운데 왜구의 활동영역이 한반도와 중국의 연해로 확장하고 나아가 중국의 해양 세력이 가세하는 현상과 맞물려 있었다. 이는 또한 일본 등지로 동전이 유출되는 것을 막는 효과도 있었다. 해금은 외국과 교류를 국가에서 독점하려는 정책으로 쇄국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해상교역을 적극 장려, 확대한 몽골제국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명은 상인 등의 사적 교역 활동을 금하면서도 고려, 안남, 점성, 자바, 일본 등에 조공을 요구하였다. 반대급부로 명은 조공국의 국왕을 책봉하고 물자를 하사하였다. 곧 책봉-조공은 전근대 동아시아에 형성되어 있던 국제질서주 304
각주 304)
조공은 명을 동아시아의 패자로 인정하는 나라와 민족들이 토산품을 공물로 바치는 행위였고, 명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으로서 책봉을 실시하였다. 따라서 책봉-조공은 당사자의 이익에 기초하여 철저하게 합목적적인 정치 행위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명이 일방적으로 형성하고 주도한 관계가 아니라 조공국의 선택과 호응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관계였다(이익주 외(201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제언과 모색』, 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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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할 수 있다. 1404년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가 조공 형식의 감합(勘合)무역을 시행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로써 명과 일본 사이에 정식 국교가 체결되고 쇼군은 명으로부터 일본국왕에 책봉되었다.
국제 관계에서 지배적 질서를 장악하려는 명조의 욕구는 정화의 원정에서 뚜렷하게 살필 수 있다. 무슬림 출신의 환관 정화는 영락제의 명령으로 대규모 선단을 지휘하여 남해를 원정하였다. 정화는 최대 7,000톤에 달하는 화물을 적재할 수 있는 보선(寶船)을 지휘하여 1405년부터 일곱 차례에 원정을 단행하였다. 정화의 원정은 경제적 측면보다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추진되었다. 영락제는 인도양 각지에 명의 우월적 지위를 선전하고 조공을 독려하여 몽골제국에 버금가는 제국으로서 명조를 과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정화의 원정은 15세기 중엽 토목보의 변을 비롯하여 몽골 오이라트 등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이 가중되면서 명조의 관심이 내륙으로 향하게 되자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명이 내적으로 황제 중심의 독재 권력을 구축하고 외적으로 주변국에 책봉-조공 질서로 편입할 수 있었던 기반을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이 자리하고 있다. 홍무제는 농촌의 생산력을 회복시켜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향촌 사회의 운영을 주민 스스로에게 맡기는 방침 아래 이갑제를 조직하였다. 조세 징수를 목적으로 토지대장인 어린도책(魚鱗圖冊)을 만들고 각 호마다 인구 수, 토지 소유 정도, 조세 부담액 등을 기록한 부역황책(賦役黃冊)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향촌에까지 미칠 수 있었다.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고 면직물, 견직물 등 상품 생산이 활발해지는 한편, 시진과 교통망이 정비됨에 따라 상업이 크게 진작되었다. 이와 함께 상인들은 명 중엽 이후 혈연과 지연을 기초로 집단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송대 사대부를 계승한 명대 신사는 중앙 정계 및 지역 사회에서 특권을 향유하며 사적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명조가 향촌을 통치하는 데 보좌역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또한 국가 권력에 대하여 향촌의 여론을 대변하였다. 신사층은 명 중엽 이갑제가 해체된 이후에 지역에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 각주 301)
    회하 유역은 당시 잦은 기근과 대량 유민의 발생하여 일종의 “거지들의 고향”이었으며 중국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화북과 강남을 제어하기에 유리하였다. 이는 주원장이 승리할 수 있는 지리적 원인을 제공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302)
    1368년 토곤 테무르는 몽골 제국의 여름 수도인 상도(上都)로 피신하였다가 이후 내몽골의 응창(應唱)으로 옮겼다가 1370년 사망하였다. 대칸의 직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는 중국 왕조를 수복하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1368년 이후 몽골제국은 멸망한 것이 아니라 몽골 초원으로 정치 중심을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가기
  • 각주 303)
    동림당은 장거정 사후 만력제의 황태자 책봉 문제 등을 쟁점으로 당쟁을 벌이다 낙향한 고헌성(顧憲成)이 무석(無錫)에서 중건한 동림서원에서 유래한다. 강남 신사들이 동림서원을 중심으로 중앙정치에 비판을 전개하였는데, 이들을 동림당이라고 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304)
    조공은 명을 동아시아의 패자로 인정하는 나라와 민족들이 토산품을 공물로 바치는 행위였고, 명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으로서 책봉을 실시하였다. 따라서 책봉-조공은 당사자의 이익에 기초하여 철저하게 합목적적인 정치 행위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명이 일방적으로 형성하고 주도한 관계가 아니라 조공국의 선택과 호응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관계였다(이익주 외(2010),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제언과 모색』, 동북아역사재단).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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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6세기 중국의 역사 발전 자료번호 : edeah.d_0003_003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