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동아시아의 역사

일본

3. 일본

중국과 한국에서는 10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사회변동과 함께 새로운 사회세력인 ‘사대부’가 등정하였고, 이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료로 진출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이와 다르게 귀족들이 세습을 통해 관료가 되는 전통이 계속 유지되었으며, 시험을 통한 관료선발은 미미한 정도에 그쳤다. 그 대신에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무사(武士)’라고 불리는 계층이 지배세력으로서 존재하였는데, 이 무사는 단순히 ‘무력을 가진 존재’라는 일반적인 의미보다 일본 역사상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시기에 등장하여 근대화 이전까지 지배층으로 군림한 계층을 가리킨다.주 298
각주 298)
무사는 ‘쓰와모노[兵]’ ‘모노노후[武士]’ ‘부시[侍]’ 등의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군사적 기능으로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직능 집단으로서, 11세기 중반에 이르러 사무라이 가문으로 세습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군사전문가로서 명확한 자기 정체성을 갖는 일본 최초의 사회집단이었다. (이케가미 에이코, 남명수 옮김(2008), 『사무라이의 나라』, 지식노마드).
닫기

일본에서 무사가 등장한 것은 10세기 초였다. 물론 훨씬 이전인 나라시대(710~794)에도 무사라는 용어 자체는 보이지만, 특정한 사회적 신분으로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에 앞서 9세기 후반 농민의 유랑과 도망이 심해져 율령에 의한 지배를 할 수 없게 되고 군당(群黨)과 해적들이 토지를 침탈하자 지방 장관인 고쿠시(國司)나 장원영주들이 치안 유지와 영지 보호를 위해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무력의 사용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면서 이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을 무사라고 한다.
무사가 된 사람들은 지방의 유력 토호나 유력 농민의 자제들로서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자이거나 수렵·어로 등에 종사하는 비농민층으로, 그들은 무예 훈련을 통해 점차 전업 무사가 되어 갔다. 무사들은 전투를 위해 집단을 형성하는 일이 많았고, 나아가 일족과 낭당(郎黨 : 종자)을 이끌고 무사단으로 성장해갔다.
무사단의 우두머리 가운데는 황족이나 귀족의 자손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군사지휘관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치안을 담당하였는데, 군당과 해적을 진압한 뒤 일국의 지방 장관인 고쿠시가 되거나, 그 관아인 고쿠가[國衙]의 관리가 되어 지방에 머물렀다. 이들은 우월한 신분을 바탕으로 무사들의 신망을 얻은 다음 몇 개의 무사단을 통솔하는 군사귀족으로 변신하였다. 이들을 동량(棟梁)이라고 불렀는데, 간무 헤이시[桓武平氏]와 세이지 겐지[淸和源氏]가 가장 유력한 동량이었다.
10세기 중엽 국아의 관리로서 지방 지배를 담당하고 있던 무사들이 일족의 내분이나 은상에 대한 불만 때문에 국아에 반항하고 그것이 확대되어 국가에 대한 대규모 반란으로 발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난(939~940)과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939~941)이 그것으로, 중앙정부는 다른 무사세력을 동원하여 이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 과정에서 지방무사단의 실력이 입증되었으며, 이때 공을 세운 무사들이 수도 교토로 올라와 궁정의 경비나 귀족의 호위를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본래 사무라이(侍)는 ‘상급 귀족을 호위한다’는 뜻이었는데, 이때 이르러 일본의 무사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와 같이 중앙에서 무사 가문이 형성될 무렵, 지방에서는 무사들이 고쿠가의 군사력으로 편입되어 갔다. 그러면서 고쿠시의 거처를 무사가 경호하거나, 고쿠시가 주최하는 사냥이나 신사의 행사에 무사가 봉사하는 체제가 만들어졌다.
10세기 무사 집단이 형성될 무렵만 해도 무사는 무예가 뛰어난 몰락 귀족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11세기 중엽부터 군사전문가인 동시에 토지 개간자 혹은 그 관리자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들은 결혼이나 기타의 방법으로 지방 호족과 결합하거나 혹은 무력으로 영지를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사는 직접 토지를 개간해 현지의 지배자가 되었고, 점차 지방영주로 변모해갔다. 한편, 조정은 이들의 영지를 새로운 과세 대상지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 지방 영주들 가운데는 자신이 그 땅의 관리자가 되는 조건으로 영지를 상급 귀족이나 사찰·신사에 기진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때 기진된 영지를 장원이라고 한다. 기진을 받은 상급귀족등은 자신들의 권익을 더 강화하기 위해 대귀족이나 천황가 등에 다시 기진하였으므로 장원은 점차 천황가나 섭관가에 집중되어 갔다.
장원에서는 조세를 납부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기진 받은 상급 귀족의 정치력에 따라 조세를 면제받고, 고쿠시의 토지 조사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 결과 고쿠시의 지배권이 미치지 않는 장원이 증가하였는데, 12세기 중반에는 공령(公領)의 반 이상이 장원으로 바뀌었을 정도이다. 한편, 고쿠시가 지배하는 공령의 지배 방식도 변화하여 일국의 지배권 전체를 상급 귀족이나 대사원 등에 수여하였고, 그에 따라 공령의 수익이 상급 귀족 등에게 돌아감으로써 공령도 장원과 다름없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장원과 공령을 바탕으로 형성된 토지제도를 장원공령제(莊園公領制)라고 하는데, 이것은 12세기에 확립된 이래 일본 중세사회를 지탱하는 토지제도가 되었다.
11세기 후반에는 9세기 이후 약 100년 동안 계속되었던 후지와라 씨의 섭관정치(攝關政治)가 종식되고 원정(院政)이 시작되었다. 원정이란 천황의 아버지가 상황(上皇)으로서 정치를 주도하는 정치형태로, 상황의 거처를 ‘원’이라고 하였으므로 원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로써 천황가가 권력을 장악했지만 12세기 중엽에 이르면 천황가의 분열로 내전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무사들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특히 원과 결탁한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가 무사로서는 처음으로 최고 관직인 태정대신에 올라 헤이시[平氏]정권을 성립시켰다. 헤이시 정권은 그 형태에서 뒤에 출현하는 무가정권인 가마쿠라 막부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헤이시 일족은 관료제에 의존하여 권력을 독점하였으며, 천황가와의 혼인을 통해 점차 귀족화되어 갔다. 그러나 헤이시 정권은 점차 무사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고, 결국 전국 각지에서 무사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붕괴되었다. 헤이시 정권을 무너뜨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전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한 뒤 가마쿠라를 근거지로 하여 무사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는 1192년 최고 관직인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었는데, 이로써 명실상부한 전국적인 무사정권이 탄생하였다. 이를 가마쿠라 막부라고 한다. 이때부터 1868년 메이지유신 전까지 약 700년 동안 일본 특유의 막부체제가 지속되었다.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자신의 휘하 무사들과 주종관계를 맺고 그들을 고케닌으로 삼아 권력의 기반을 다졌다. 가마쿠라 막부는 교토에 있던 중앙 귀족들을 그대로 두고, 무사계층을 가마쿠라로 집결시킨뒤, 새로 싯켄[執權]과 렌쇼[連署] 같은 직책을 만들어나갔다. 조정은 교토에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고 고쿠시를 파견하여 전국의 일반 행정을 이전처럼 유지하였지만, 막부의 직할지와 여러 고케닌의 영지는 막부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사실상 이원적인 지배형태로 운영되었다. 또한 막부는 고케닌들을 통솔하는 사무라이도코로[侍所], 고케닌 간의 소송을 담당하는 몬추조[問注所], 일반 사무를 관장하는 만도코로[政所] 등 독자적인 정치기구를 설치하고, 지방에는 치안 담당자인 슈고[守護]와 장원 관리인인 지토[地頭]를 두어 휘하의 고케닌을 임명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였다.
무사들은 지방에 살면서 자신의 영지 확대에 힘쓰는 한편, 막부로부터 지토에 임명되어 영주들의 장원을 관리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막부의 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지토의 권한도 확대되었고, 영주에게 연공을 납부하지 않거나 농민들을 과도하게 부리는 등의 불법 행위를 일삼았다. 장원영주들은 이를 억제하고자 하였지만, 현지에 뿌리를 둔 지토의 불법 행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장원영주들의 지토에게 장원 관리 일체를 맡기고 일정액의 연공만을 납입하게 하거나, 토지를 분할하여 지토의 영유권을 인정해 주었는데, 이러한 지토의 영주화를 통해 무사들의 토지에 대한 지배권이 강화되어 갔다.

  • 각주 298)
    무사는 ‘쓰와모노[兵]’ ‘모노노후[武士]’ ‘부시[侍]’ 등의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군사적 기능으로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직능 집단으로서, 11세기 중반에 이르러 사무라이 가문으로 세습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군사전문가로서 명확한 자기 정체성을 갖는 일본 최초의 사회집단이었다. (이케가미 에이코, 남명수 옮김(2008), 『사무라이의 나라』, 지식노마드).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일본 자료번호 : edeah.d_0003_0030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