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동아시아의 역사

일본

3. 일본

1) 품종 도입
헤이안시대에 새롭게 전파된 작물의 기원과 전파의 경로 등을 살펴보면, 먼저 기장은 원산지가 동부아시아 대륙성 기후 지역으로서 중국의 화베이(華北)에서 한반도를 거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죠헤이[昇平]연간(931~937)의 『왜명류취초(倭名類聚抄)』에 기장이 있다고 하였다. 유채과의 두해살이풀인 겨자는 원산지인 중앙아시아로부터 중국 동부로 전래된 바 있으며, 일본에는 고대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본초화명』에는 ‘가라시[加良之]’, 『신선자경』에는 ‘다카나[太加奈]’로 기록되었다.
상추도 원산지는 중동지방이었는데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가 일본으로 전래되었고, 『왜명초』에 ‘백거(白苣)’라고 기록되어 있다. 염교는 원래 중국이 원산지로서 저쟝[浙江]성의 산야에 야생하고 있다가 9세기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는데 당시에는 오로지 약용으로 제공된 듯하다. 사과는 코카서스와 소아시아 지방이 원산지로서 중국에 6세기 전래되었는데 이것과는 달리 중국 원산 사과가 있다. 일본에는 중국이 원산인 사과가 헤이안 시대 중엽에 전래되었다고 『본초화명』과 『왜명류취초』에 기재되어 있다. 또 19세기에 구미로부터 서양계 사과가 도입되어 그 보급에 따라 중국 원산 사과재배는 소멸하였다. 그리고 비파는 중국의 양자강 연안이 원산지로 9세기를 전후하여 전래된 듯하다. 살구는 원산지가 중국 북부 산둥, 산시, 허베이성 산악지대와 만주 남부에 이르는 지역으로, 『본초화명』(918)에는 ‘당도(唐桃)’로 기재되어 있는데, 그 이전에 전래되어 심어진 듯하다. 초기에는 의약용 씨앗을 얻고자 하였는데, 점차 과일을 이용하게 되었다. 유자의 원산지는 양쯔강 유역으로 일본에는 한반도를 거쳐 전래되었다. 헤이안 시대에 재배되어 『왜명류취초』(937년경)에 ‘유(柚)’라고 쓰여 있다. 석류의 원산지는 페르시아에서 인도 북서부로 당시에 재배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지만 헤이안 말기부터 가마쿠라 초기에 전래된 듯하다. 또 포도에 대해서는 일본 원산 포도가 기원전부터 있었는데, 12세기 말 문치 2년(1186) 유럽 품종이 고슈[甲州]로 들어와서 에도시대부터 고슈포도라는 이름으로 유명하게 되었다.주 237
각주 237)
松山良三(2004), 111~112쪽.
닫기

15세기는 일본에서 산업경제가 발전하는 시기로서 농업에서도 경영의 집약화가 진전되어 벼의 품종도 여러 품종으로 개량되었다. 전국시대의 농업서인 『세이료키(淸良記)』에는 조도 12종, 중도 24종, 만도 24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벼와 보리를 번갈아 심어 수확하는 2모작이 일반적으로 시행되어 후진 지역인 간토지방까지 보급되었다. 그리고 재배기술의 발달과 관개시설의 확충 및 비료의 이용 등에 의하여 선진지역에서는 미곡의 수확이 증가되었다.주 238
각주 238)
구태훈(2004), 『일본역사탐구』, 태학사.
닫기

2) 농기구 개선
헤이안 시대에는 농민의 노력이 점차 쌓여 농업기술이 진보하여 농업생산도 높아갔다. 헤이안 시대의 농업기술은 장원이 발달할 때, 귀족과 영주의 수중에 모인 우수한 철제 농기구가 점차 지방 농민들 사이로 보급되었고, 소와 말을 사용한 농사가 널리 행해졌다. 또한 파종 전에 씨앗을 물에 담가 두고, 못자리에 모를 길러 밭에 옮겨 심는 법도 보급되었다. 그리고 밭에는 비료가 뿌려졌다. 비료로 쓰인 것은 산과 들의 풀과 그것을 재로 만든 것이었다. 소가 농경에 이용됨에 따라 외양간 두엄도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9~10세기 경 궁정에서 관리하는 밭에서 외양간 두엄이 대량으로 쓰였다는 예가 있다. 인분뇨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주 239
각주 239)
松山良三(2004), 110쪽.
닫기

벼 수확기에는 새와 짐승 피해를 막고자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딸랑이를 달아놓은 새끼줄을 늘어뜨리는 등의 고안도 만들어냈다. 벼 베기를 할 때에는 뿌리 쪽을 베었다. 벼 베기를 한 벼를 말리고자 하는 시렁을 밭 한 가운데 나무를 엮어 만들었다. 이 방법은 야마토국 농민의 고안으로 정부는 이를 채용하여 전국에 보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벼농사에 대해서는 씨앗의 침지, 육묘, 이앙, 시비, 방제, 벼베기, 단의 건조라고 하는 일련의 기본기술의 원형이 헤이안 시대에 굳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대 농업생산은 간토에서 북쪽으로 향해 눈부시게 발달하였고, 조·피·보리·밀 등의 밭작물 생산은 해협을 넘어 홋카이도의 이시카리가와[石狩川]유역까지 이르렀다.
일본은 8세기경에 의례용의 실물쟁기로 쇼소인[正倉院]에 자일수신서(子日水辛鋤)가 벽도 없고 상도 없는 쟁기로 전해지고 있고, 비슷한 시기에 벽이 있는 쟁기도 존재하였는데 두 가지는 모두 고려에서 건너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10세기 이후로는 모두 벽이 있고 상도 있는 쟁기가 이미 나타났다고 한다.주 240
각주 240)
魏恩淑(1996), 323쪽.
닫기

가마쿠라시대에 농민들은 토양을 비옥하게 하기 위하여 비료를 사용하였는데 인분 이외에 퇴비가 사용되었다. 퇴비는 풀이나 나뭇잎을 베어 땅에 묻어서 썩히는 방법으로 생산하였다. 또한 풀이나 나무를 태워서 그 재를 비료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석회질 비료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농경에는 소나 말을 이용하였는데 소는 주로 논밭을 가는데 이용되었고, 말은 주로 짐을 운반하는데 이용되었다. 농기구로는 호미, 삽, 쟁기 낫이 사용되었는데 철제 농기구는 대장간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주는 물론이고 일반 농민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규모의 저수지를 쌓고, 대나무를 이용한 수차로 논에 물을 대기도 하였다.
가마쿠라 시대에 시작한 논의 2모작이 간토 이서의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기나이[畿內] 주변과 서일본 각지에서는 보리의 2모작도 행해졌다. 전란의 시대에 발달한 축성 등 토목기술이 개간에 활용되어 논 면적이 비약적으로 증대하였다. 또, 농민의 노력과 전국 다이묘들의 지도에 따라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농업생산력이 향상되었다.주 241
각주 241)
稻垣泰彦(1975), 170~171쪽 참조.
닫기

15세기에는 과일, 잡곡, 채소, 뽕나무, 옷나무 등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면서 시비법도 발달하였다. 땅을 비옥하게 하기 위하여 논에다 풀을 깔고 재를 뿌리고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는 한편 외양간의 두엄도 퇴비로 이용하였다.
각지에서 상업 작물도 재배하여 옷감의 재료가 되는 마와 모시풀이 동부 일본 지역에서 많이 재배되었고, 미카와[三河]지역에서는 면화도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염료의 재료가 되는 쪽이 서부 일본 지역에서 재배되고, 꼭두서니, 지치, 잇꽃 등이 동부 일본 지역에서 재배되었다. 태평양 연안 지역에서는 들깨가 재배되고, 종이의 원료인 닥나무도 각 지역에서 종식되었다. 교토나 나라와 같은 대도시의 근처에는 다양한 종류의 야채가 재배되었다. 당시에 각 지역의 특산품으로는 우치(宇治)의 차, 고슈의 포도, 기슈[紀州]의 밀감 등이 유명하였다.주 242
각주 242)
구태훈(2004), 189쪽.
닫기


  • 각주 237)
    松山良三(2004), 111~112쪽. 바로가기
  • 각주 238)
    구태훈(2004), 『일본역사탐구』, 태학사. 바로가기
  • 각주 239)
    松山良三(2004), 110쪽. 바로가기
  • 각주 240)
    魏恩淑(1996), 323쪽. 바로가기
  • 각주 241)
    稻垣泰彦(1975), 170~171쪽 참조. 바로가기
  • 각주 242)
    구태훈(2004), 189쪽.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일본 자료번호 : edeah.d_0003_0020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