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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금과 주변국의 관계

3. 금과 주변국의 관계

금은 송 수도였던 하남성의 개봉을 공격하여 1027년 송나라의 상황 휘종(徽宗, 재위 1100~1125)·황제 흠종(欽宗)등을 사로잡고 송나라를 강남으로 밀어냈다. 제3대 희종(熙宗, 재위 1135~1149) 때에 회수·섬서성의 대산관을 잇는 지대를 국경으로 정하고, 남송의 황제는 앞으로 신하의 예를 갖추어 금의 황제를 대하며, 또한 은과 비단을 세폐로 바친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체결하게 되었다. 제4대 해릉왕(海陵王, 재위 1149~1161) 때인 1153년에는 금의 창업 근거지였던 상경회령부를 버리고 연경으로 천도하고, 여진인을 화북지방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12세기초 요가 여진과 송의 협공으로 무너지자 1142년의 송-금 간의 조약으로 이어지는데 『금사(金史)』에 있는 1141년의 서표(誓表)에는 남송을 건국한 고종이 자신의 이름 ‘구(構)’를 사용하면서 신하를 자칭하고, 보잘 것 없는 나라[弊邑] 송이 상국인 금나라에 회하이북의 땅을 할양하고, 황제의 생일과 신년을 하례하는 사절을 보내며 ‘세폐’가 아닌 ‘세공(歲貢)’으로 매년은 25만냥과 비단 25만필을 보낼 것을 약조하고 있다.주 183
각주 183)
皇統二年(1142)二月 宗弼朝京師 兼監修國史 宋主遣端明殿學士何鑄等進誓表 其表曰 臣構言 今來畫疆 合以淮水中流爲界 西有唐 鄧州割屬上國 自鄧州西四十裏並南四十裏爲界 屬鄧州 其四十裏外並西南盡屬光化軍 爲弊邑沿邊州城 既蒙恩造 許備籓方 世世子孫 謹守臣節 每年皇帝生辰並正旦 遣使稱賀不絶 歲貢銀 絹二十五萬兩匹 自壬戌年爲首 每春李差人般送至泗州交納 有渝此盟 明神是殛 墜命亡氏 踣其國家 臣今既進誓表伏望上國蚤降誓詔 庶使弊邑永有憑焉 宗弼進拜太傳 乃遣左宣徽使劉筈使宋 以袞冕圭寶佩璲玉冊冊康王爲宋帝 其冊文曰 皇帝若曰 咨爾宋康王趙構 不吊 天降喪於爾邦 亟瀆齊盟 自胎顛覆 俾爾越在江表 用勤我師旅 蓋十有八年於茲 朕用震悼 斯民其何罪 今天其悔禍 誕誘爾衷 封奏狎至 願身列於籓輔 今遣光祿大夫 左宣徽使劉筈等持節冊命爾爲帝 國號宋 世服臣職 永爲屛翰 嗚呼欽哉 其恭聽朕命 仍詔天下 賜宗弼人口牛馬各千駝百羊萬 仍每歲宋國進貢內給銀絹二千兩匹(『金史』 列傳제15 宗弼 : 本名兀術 亨本孛送 張邦昌 劉豫 撻懶 宗弼 本名斡啜 又作兀術 亦作斡出 或作晃斡出 太祖第四子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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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송의 태도나 조공품의 규모는 고려나 하가 요와 금에 보인 ‘조공국’의 면모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고려와 하를 항상 ‘중국’의 ‘조공국’이라 하면서, 금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금에 서표와 공물을 바친 남송에게는 조공국의 호칭을 적용하지 않는 것은 한족 중심적 화이사상에 입각한 편견 때문이다.주 184
각주 184)
피터 윤(2005), 「몽골 이전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관계」 『만주연구』제3집,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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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의 관계 설정을 둘러싸고 송에서 이루어진 논란의 중심에 악비(岳飛, 1103~1142)와 진회(秦檜, 1090~1155)가 있었다. 장박천(張博泉)은 금송전쟁사에서 관련 인물을 평가하며,주 185
각주 185)
張博泉(1984), 「金宋和戰史論」 『史學集刊』1984-2. 張博泉(1984), 『金史簡編』, 遼寧人民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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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금 양측 강경파 주전 인물로 완안종필(完顔宗弼, 兀術)과 악비를 두 왕조 투쟁 중 모두 자신의 재능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중화민족상 칭찬할만한 인물들이라고 추켜세웠다. 반면 양측의 주화파 인물인 진회와 달라(撻懶)에 대해서는 중화민족 최고 반동세력의 대표로 폄하했는데 이유는 달라가 금조의 한제(漢制) 개혁 과정에서 수구세력으로 금의 진보적 개혁에 반한 인물이라는 점을 들었고, 진회는 달라가 풀어준 후 송 내부에서 의화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또 송금 양측에서 통일전쟁을 시도했던 인물로 해릉왕 완안량과 한탁주를 들었다. 해릉왕의 전쟁 발동은 통일 조건과 기초를 갖추지 못했던, 시기상 부적합했고 본래 목적이 자신의 뜻을 추진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한탁주는 개혁가가 아니며 사마원 등 통일 반동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채 시도하여 실패로 끝난 점을 들어 역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주 186
각주 186)
육정임(2010), 「중국 학계의 송금관계사 연구동향-“중화민족일체론”의 영향을 중심으로」 『동북아중세의 한족과 북방민족-최근 중국학계의 연구동향과 그 성격』, 동북아역사대단, 244~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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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초 몽골이 등장하기 전까지 북중국과 만주를 지배한 요와 금은 송과 동등한 혹은 우월한 상대로 존재하였다. 북송은 아무리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자처하여도 당시의 지정학적 현실에서는 ‘변방’에 불과하였다. 다원적 국제관계는 그 형식과 의례에 있어서도 기존의 조공체제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북방의 정복왕조와 남방의 한족왕조는 동등하게 인식되었고, 두 명, 때로는 세명의 ‘천자’가 동시에 존재하며 한족왕조를 천하의 중심으로 설정한 이전의 허구적 논리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주 187
각주 187)
피터 윤(2005), 「몽골 이전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관계」 『만주연구』제3집,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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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83)
    皇統二年(1142)二月 宗弼朝京師 兼監修國史 宋主遣端明殿學士何鑄等進誓表 其表曰 臣構言 今來畫疆 合以淮水中流爲界 西有唐 鄧州割屬上國 自鄧州西四十裏並南四十裏爲界 屬鄧州 其四十裏外並西南盡屬光化軍 爲弊邑沿邊州城 既蒙恩造 許備籓方 世世子孫 謹守臣節 每年皇帝生辰並正旦 遣使稱賀不絶 歲貢銀 絹二十五萬兩匹 自壬戌年爲首 每春李差人般送至泗州交納 有渝此盟 明神是殛 墜命亡氏 踣其國家 臣今既進誓表伏望上國蚤降誓詔 庶使弊邑永有憑焉 宗弼進拜太傳 乃遣左宣徽使劉筈使宋 以袞冕圭寶佩璲玉冊冊康王爲宋帝 其冊文曰 皇帝若曰 咨爾宋康王趙構 不吊 天降喪於爾邦 亟瀆齊盟 自胎顛覆 俾爾越在江表 用勤我師旅 蓋十有八年於茲 朕用震悼 斯民其何罪 今天其悔禍 誕誘爾衷 封奏狎至 願身列於籓輔 今遣光祿大夫 左宣徽使劉筈等持節冊命爾爲帝 國號宋 世服臣職 永爲屛翰 嗚呼欽哉 其恭聽朕命 仍詔天下 賜宗弼人口牛馬各千駝百羊萬 仍每歲宋國進貢內給銀絹二千兩匹(『金史』 列傳제15 宗弼 : 本名兀術 亨本孛送 張邦昌 劉豫 撻懶 宗弼 本名斡啜 又作兀術 亦作斡出 或作晃斡出 太祖第四子也). 바로가기
  • 각주 184)
    피터 윤(2005), 「몽골 이전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관계」 『만주연구』제3집, 53쪽. 바로가기
  • 각주 185)
    張博泉(1984), 「金宋和戰史論」 『史學集刊』1984-2. 張博泉(1984), 『金史簡編』, 遼寧人民出版社. 바로가기
  • 각주 186)
    육정임(2010), 「중국 학계의 송금관계사 연구동향-“중화민족일체론”의 영향을 중심으로」 『동북아중세의 한족과 북방민족-최근 중국학계의 연구동향과 그 성격』, 동북아역사대단, 244~246쪽. 바로가기
  • 각주 187)
    피터 윤(2005), 「몽골 이전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관계」 『만주연구』제3집, 49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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