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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와 주변국의 관계

3. 요와 주변국의 관계

10세기 후반 거란과 송은 군사적으로 대치하면서 대규모 군사적 충돌이 잇달았다. 1004년 겨울 거란군이 송의 수도 개봉(開封)에서 약 100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전연까지 진출하자, 양국은 협상과 타협으로 1004~5년에 전연지맹을 맺었다. 맹약의 주요 내용은 송이 매년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량의 세폐를 보내고, 양국의 국경을 확실하게 정하여 준수하며, 국경을 넘은 도망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국경지역에서 새 군사시설을 건설하지 않아 상대방의 영토보존을 서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주 160
각주 160)
甲辰統和二十二年 宋真宗景德元年 春三月 契丹侵宋…冬十月 攻瀛州 為守臣李延渥敗死者三萬餘人 傷者倍之 乃解去…契丹自瀛州率衆三十萬…契丹既陷德淸 率衆抵澶州北直犯大陣 圍合三面…十一月 宋真宗親駕澶淵 是時曹利用之書已通契丹 尋遣左飛龍使韓杞持國書偕至南朝 跪授書函 復以關南為請 宋帝曰 所言歸地事極無名 若必邀求 朕當決戰耳 實念河北居人重有勞擾 歲以金帛濟其不足 朝廷之體固亦無傷 誓書不必具言但令曹利用與韓杞口述茲事可也 利用一再往返 乃許歲遺絹二十萬疋 銀一十萬兩 兩議遂定 契丹且請以兄禮事之 乃命李繼昌齎國書與姚柬之俱往 契丹遣丁振奉誓書之宋 遂退師 自是不復侵邊矣(『契丹國志』권7, 聖宗天輔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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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지맹은 그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그 조약 문서에 들어있는 용어의 상징적인 의미이다.주 161
각주 161)
양측의 「宋眞宗誓書」와 「遼聖宗誓書」에는 ‘남조’ ‘북조’ ‘兩朝’ ‘不宣’ ‘大宋皇帝’와 ‘大契丹皇帝’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契丹國志』권20, 晉表, 宋真宗誓書/契丹聖宗誓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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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 거란에 바치는 ‘공(貢)’의 성격인 비단과 은을 ‘세폐(歲幣)’라고 하여 체면을 유지하려고 하였고, 두 나라는 서로를 ‘북조’와 ‘남조’라 칭하면서 양국의 황제들은 ‘형제’관계를 맺고 황실에 확대 적용하여 송 황제는 요의 황태후를 ‘숙모’로 요의 황제를 ‘동생’으로 공식적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전연지맹은 한족왕조를 천하의 중심임을 설정한 기존 국제질서의 틀이 더 이상 수용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주 162
각주 162)
피터 윤(2005), 「몽골 이전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관계」 『만주연구』제3집,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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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의 맹약에 대해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모두 그것이 타협적이고 굴욕적인 맹약이라고 인식되었지만 최근 중국에서는 새로운 평가가 나타나고 있다. 첫째, ‘전연지맹’은 송요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하나의 평등조약이라는 견해이고,주 163
각주 163)
羅朝霞(2000), 「“澶淵之盟”之性質辨」 『貴陽師專學報(社會科學版)』2000-1, 35~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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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긍정적인 결과, 즉 타협은 백년이 넘는 평화적인 국면을 유지시켜 정치, 경제와 문화교류를 촉진시켰다고 평가하며, 주 164
각주 164)
芮忠漢(2002), 「談澶淵之盟」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院學報』2002-5, 105~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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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전연지맹을 통해서 한문화가 거란문화에 더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한다.주 165
각주 165)
田相林(2001), 「宋遼“澶淵之盟” : 古代少數民族與漢族長期和好的範例」 「平原大學學報」18-4, 45~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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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전연지맹의 성격에 대해서 북송은 전쟁 전의 역량을 대비해볼 때 약자가 아니었고, 북송은 공격을 수비로 바꾸었고, 요는 전투에서 화의로 바꾸었으며, ‘전연지맹’은 북송이 전투하면 승리할 수 있었던 조건 하에서 체결한 상호이익을 위한 협의라는 점을 지적하였다.주 166
각주 166)
李錫厚(2007), 「論“非”城下之盟“](張希淸, 田浩, 穆紹珩, 劉鄕英 主編, 『澶淵之盟新論』, 人民出版社),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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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스스로 중국을 대표한다고 인식하였고 또한 ‘정통(正統)’이라고 자처하였고, 이로 인하여 요송 대립 시기는 역사상의 기타 분열시기와 마찬가지로 두 개 혹은 여러 개 왕조가 중국이라는 영토 위에 병존하며, 쌍방이 정식으로 남, 북조라고 호칭하였다. 여기에서 요송은 형제의 나라가 되어 송 진종은 요 성종보다 나이가 많아 진종이 형, 성종이 동생이 되었고 승천태후는 숙모가 되었다. 이후 인종 대에도 나이에 따라 형제관계를 다시 정하였다. 심지어 요송 황실 사이에 이러한 형제관계를 맺은 것은 당연히 거란과 한족 두 민족이 골육친정을 맺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주 167
각주 167)
이상은·박지훈(2010), 「중국학계의 북송과 요의 관계사 연구동향」 『동북아 중세의 한족과 북방민족-최근 중국학계의 연구동향과 그 성격』, 동북아역사재단, 119~12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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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송조가 그 영향력을 현저하게 감퇴시킨 또 다른 지역의 하나는 서북방면으로, 이곳에서는 서하(西夏, 1038~1227)가 일어났다. 서북방의 오르도스로부터 감숙성의 지역을 지배하였던 탕구트족의 일족인 이계천(李繼遷)은 용에 신례를 갖추고 송군과 싸워 오르도스의 요지인 영주를 빼앗으니, 이계천이 서하의 태조이다. 1032년 태종의 아들 이원호(李元昊)가 뒤를 이어 하서의 전역을 제압하였다. 1038년에는 송과의 신속관계를 끊고 황제를 친하였으며 국호를 대하(大夏, 송측에서는 西夏라 함)라 하고 흥경부를 국도로 삼았다. 이후 송과의 사이에 교전이 계속되었지만 결국 1044년 원호는 송에 신례를 취해 하국왕에 책봉되었고 대신에 송은 서하에게 매년 막대한 세폐를 주게 되었다. 이원호는 독자적 서하문자를 제정하고 나아가 유교와 불교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발전하며, 1277년 징기스칸에 멸망될 때까지 190년에 걸쳐 명맥을 보존하였다.주 168
각주 168)
松丸道雄 외 저·조성을 역(2004), 『중국사개설』, 도서출판 한울, 260~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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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에 있어서 요·금사와 함께 서하의 역사연구는 후계 민족이나 국가가 없는 일종의 ‘절학(絶學)’에 속하며, 중국학계에서는 서하를 서북지방에 있던 독립된 국가로 보기보다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으로 해석하는 입장이 강하다.주 169
각주 169)
유원준(2010), 「중국의 서하사 연구동향-언어, 문자, 문헌, 기원 및 관계사 연구를 중심으로」『동북아 중세의 한족과 북방민족-최근 중국학계의 연구동향과 그 성격』, 동북아역사재단, 155~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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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과 고려 초의 관계는 고려 태조의 인식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태조 왕건은 918년 건국한 이후 이전의 궁예시대와 달리 점차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조하면서, 국호를 고려라 칭하고,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할 것을 적극적으로 천명하였다.
[後晋齊王 開運2년(945)] 처음에 고려 王建이 군사를 써서 주변나라를 병탄함으로써 자못 강대해졌다. (281권 高祖 天福 원년조에 내용이 보인다) 왕건은 오랑캐 승려인 襪囉를 통하여 高祖에게 이르기를 “渤海는 나와 婚姻한 사이인데 王이 契丹에 잡혔으니, 청컨대 後晉朝廷과 함께 거란을 쳐서 발해왕을 구하고자 한다”고 하였으나 高祖는 응답하지 않았다. 出帝가 거란과 원수가 됨에 이르러 襪囉가 다시 말하였다. 출제가 고려로 하여금 거란의 동쪽 변경을 어지럽혀 거란의 세력을 나누고자 하였으나, 마침 王建이 죽고 아들인 王武[惠宗]이 스스로 權知國事라 칭하며 表를 올려 喪을 알렸다. 11월 戊戌에 왕무를 大義軍使 高麗王으로 삼고, 通事舍人 郭仁遇를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거란을 공격하도록 詔指로서 깨우쳤다. (거란이 이를 알까 두려워하여 詔命의 형태를 띠지 않고 詔指로서 이를 깨우쳤을 뿐이다) 郭仁遇가 그 나라에 이르러, 고려의 군사가 매우 약하여 지난번 襪囉의 말이 단지 王建의 과장일 뿐이며 사실은 감히 거란과 적수가 되지 못함을 알았다. (宋白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후진 天福 중 西域의 僧侶 襪囉가 來朝하였는데 火卜에 능하였다. 잠시 뒤에 高祖를 하직하고 高麗로 유람하기를 청하였는데, 王建이 그를 극진히 예우하였다. 당시는 契丹이 渤海의 땅을 병합한 지 몇 년이 지난 뒤로서, 王建은 조용히 襪囉에게 이르기를 “발해는 본래 나의 親戚나라인데 그 王이 거란에 잡혔으니, 내가 後晉朝廷과 더불어 거란을 공격하여 발해왕을 구하고, 또 옛날의 원한을 갚고자 한다. 선생이 돌아가 천자에게 말하고 기일을 정해 함께 거란을 공격하기로 합시다”고 하였다. 말라가 돌아가 갖추어 아뢰었으나 高祖는 응답하지 않았다. 出帝가 거란과 싸우게 되니 말라가 다시 아뢰었다. 出帝는 郭仁遇를 통하여 왕건에게 조지를 보내어 고려가 거란 깊숙이 공격하여 거란을 위협하도록 하였다. 마침 왕건이 이미 죽고 王武가 나라 일을 맡아 아버지의 大臣과 화합하지 못하고 서로 죽였다. 내부의 患亂이 점차 평정되었으나 군사의 위력이 아직 떨치지 못하였고, 또 오랑캐가 겁이 많으니, 襪囉의 말은 모두 王建의 거짓일 뿐이다) 郭仁遇가 돌아가자 王武는 다시 다른 이유를 들어 해명하였다.주 170
각주 170)
[後晋 齊王 開運二年]初 高麗王建 用兵呑滅隣國 頗彊大(事見二百八十一卷高祖天福元年) 因胡僧襪囉言於高祖曰 勃海我昏姻也 其王爲契丹所虜 請與朝廷共擊取之 高朝不報 及帝與契丹爲仇 襪囉復言之 帝慾使高麗擾契丹東邊 以分其兵勢 會建卒 子武自稱權和國事 上表告喪 十一月戊戌 以武爲大義軍使高麗王 遣通事舍人郭仁遇使其國 諭指使擊契丹 (畏契丹知之 不形諸詔命 以詔指諭之而已) 仁遇至其國 見其兵極弱 曏者襪囉之言 特建爲誇誕耳 實不敢與契丹爲敵 (宋白曰 晋天福中 有西域僧襪囉來朝 善火卜 俄辭高祖 請遊高麗 王建甚禮之 時契丹倂勃海之地有年矣 建因從容謂襪囉曰 勃海本吾親戚之國 其王爲契丹所虜 吾欲爲朝廷攻而取之 且欲平其舊怨 師廻 爲言於天子 當定期兩襲之 襪囉還 具奏 高朝不報 出帝與契丹交兵 襪囉復奏之 帝遣郭仁遇 飛詔謙建深攻其地以牽脅之 會建已卒 武知國事 與其交之大臣不叶 自相魚肉 內難稍平 兵威未振 且夷人怯懦 襪囉之言皆建虛誕耳) 仁遇還 武更以它故爲解(『資治通監』권제285, 後晋紀6, 齊王下, 開運2年條(上海古籍出版社, 1987), 1979~19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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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에는 후진 천복(936~943)연간에 서역의 승려 말라(襪囉)가 고려에 왔을 때 고려 태조 왕건이 말라를 통하여 고조에게 이르기를 후진 조정과 함께 사로잡힌 발해왕을 구하자고 제의하였으나,주 171
각주 171)
고려 태조가 거란을 공격하여 발해왕을 구하려는 이유는 “발해는 나와 혼인한 사이” 혹은 “발해는 본래 나의 친척의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임상선(1999), 『발해의 지배세력 연구』, 도서출판 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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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조가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출제가 거란과 원수가 됨에 이르러 고려로 하여금 거란의 동쪽 변경을 어지럽혀 거란의 세력을 나누고자 하였으나, 마침 왕건이 죽어 아들인 혜종에게 거란을 공격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거란이 이를 알까 두려워하여 조명(詔命)의 형태를 띠지 않고 조지(詔指)로서 이를 깨우쳤을 뿐이라고 하였다. 당시 후진이 거란의 영향하에 있으면서도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발해에 대한 고려의 태도는 얼마 후 거란과 단교에 이르는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태조 25년(942) 10월에 거란이 낙타 50필과 함께 사신을 보내왔는데, 고려 태조에 의하면 발해와 거란은 오랫동안 이웃 국가로서 서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로 맹약을 맺고 있었는데, 갑자기 의심하며 두마음이 생겨 맹약을 어기고 발해를 멸망시켰으니, 이것은 무도한 짓이라며 교빙을 거절하고, 그 사신 30인을 섬에 유배하고 낙타를 만부교 아래에 매어놓아 다 굶어 죽게 하였다.주 172
각주 172)
『高麗史』2권, 世家2, 太祖2, “二十五年冬十月 契丹遣使來 遣橐駝五十匹 王以契丹嘗與渤海連和 忽生疑貳背盟殄滅 此甚無道 不足遠結爲隣 遂絶交聘 流其使三十人于海島 繫橐駝萬夫橋下 皆餓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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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거란은 3차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다. 즉, 939년 10월 소손녕(蕭遜寧)의 침입, 1010년(현종 1) 11월 강조(康兆)가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성종의 직접 침입,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의 침입이 있었다. 1019년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교가 회복되고, 고려는 송 대신에 요의 연호를 사용하고, 요가 멸망하는 1125년까지 양국 사이에 무역과 불교 등의 방면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 각주 160)
    甲辰統和二十二年 宋真宗景德元年 春三月 契丹侵宋…冬十月 攻瀛州 為守臣李延渥敗死者三萬餘人 傷者倍之 乃解去…契丹自瀛州率衆三十萬…契丹既陷德淸 率衆抵澶州北直犯大陣 圍合三面…十一月 宋真宗親駕澶淵 是時曹利用之書已通契丹 尋遣左飛龍使韓杞持國書偕至南朝 跪授書函 復以關南為請 宋帝曰 所言歸地事極無名 若必邀求 朕當決戰耳 實念河北居人重有勞擾 歲以金帛濟其不足 朝廷之體固亦無傷 誓書不必具言但令曹利用與韓杞口述茲事可也 利用一再往返 乃許歲遺絹二十萬疋 銀一十萬兩 兩議遂定 契丹且請以兄禮事之 乃命李繼昌齎國書與姚柬之俱往 契丹遣丁振奉誓書之宋 遂退師 自是不復侵邊矣(『契丹國志』권7, 聖宗天輔皇帝). 바로가기
  • 각주 161)
    양측의 「宋眞宗誓書」와 「遼聖宗誓書」에는 ‘남조’ ‘북조’ ‘兩朝’ ‘不宣’ ‘大宋皇帝’와 ‘大契丹皇帝’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契丹國志』권20, 晉表, 宋真宗誓書/契丹聖宗誓書). 바로가기
  • 각주 162)
    피터 윤(2005), 「몽골 이전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관계」 『만주연구』제3집, 47쪽. 바로가기
  • 각주 163)
    羅朝霞(2000), 「“澶淵之盟”之性質辨」 『貴陽師專學報(社會科學版)』2000-1, 35~38쪽. 바로가기
  • 각주 164)
    芮忠漢(2002), 「談澶淵之盟」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院學報』2002-5, 105~106쪽. 바로가기
  • 각주 165)
    田相林(2001), 「宋遼“澶淵之盟” : 古代少數民族與漢族長期和好的範例」 「平原大學學報」18-4, 45~47쪽 바로가기
  • 각주 166)
    李錫厚(2007), 「論“非”城下之盟“](張希淸, 田浩, 穆紹珩, 劉鄕英 主編, 『澶淵之盟新論』, 人民出版社), 1~22쪽. 바로가기
  • 각주 167)
    이상은·박지훈(2010), 「중국학계의 북송과 요의 관계사 연구동향」 『동북아 중세의 한족과 북방민족-최근 중국학계의 연구동향과 그 성격』, 동북아역사재단, 119~122쪽 참조. 바로가기
  • 각주 168)
    松丸道雄 외 저·조성을 역(2004), 『중국사개설』, 도서출판 한울, 260~261쪽. 바로가기
  • 각주 169)
    유원준(2010), 「중국의 서하사 연구동향-언어, 문자, 문헌, 기원 및 관계사 연구를 중심으로」『동북아 중세의 한족과 북방민족-최근 중국학계의 연구동향과 그 성격』, 동북아역사재단, 155~158쪽. 바로가기
  • 각주 170)
    [後晋 齊王 開運二年]初 高麗王建 用兵呑滅隣國 頗彊大(事見二百八十一卷高祖天福元年) 因胡僧襪囉言於高祖曰 勃海我昏姻也 其王爲契丹所虜 請與朝廷共擊取之 高朝不報 及帝與契丹爲仇 襪囉復言之 帝慾使高麗擾契丹東邊 以分其兵勢 會建卒 子武自稱權和國事 上表告喪 十一月戊戌 以武爲大義軍使高麗王 遣通事舍人郭仁遇使其國 諭指使擊契丹 (畏契丹知之 不形諸詔命 以詔指諭之而已) 仁遇至其國 見其兵極弱 曏者襪囉之言 特建爲誇誕耳 實不敢與契丹爲敵 (宋白曰 晋天福中 有西域僧襪囉來朝 善火卜 俄辭高祖 請遊高麗 王建甚禮之 時契丹倂勃海之地有年矣 建因從容謂襪囉曰 勃海本吾親戚之國 其王爲契丹所虜 吾欲爲朝廷攻而取之 且欲平其舊怨 師廻 爲言於天子 當定期兩襲之 襪囉還 具奏 高朝不報 出帝與契丹交兵 襪囉復奏之 帝遣郭仁遇 飛詔謙建深攻其地以牽脅之 會建已卒 武知國事 與其交之大臣不叶 自相魚肉 內難稍平 兵威未振 且夷人怯懦 襪囉之言皆建虛誕耳) 仁遇還 武更以它故爲解(『資治通監』권제285, 後晋紀6, 齊王下, 開運2年條(上海古籍出版社, 1987), 1979~1980쪽). 바로가기
  • 각주 171)
    고려 태조가 거란을 공격하여 발해왕을 구하려는 이유는 “발해는 나와 혼인한 사이” 혹은 “발해는 본래 나의 친척의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임상선(1999), 『발해의 지배세력 연구』, 도서출판 신서원). 바로가기
  • 각주 172)
    『高麗史』2권, 世家2, 太祖2, “二十五年冬十月 契丹遣使來 遣橐駝五十匹 王以契丹嘗與渤海連和 忽生疑貳背盟殄滅 此甚無道 不足遠結爲隣 遂絶交聘 流其使三十人于海島 繫橐駝萬夫橋下 皆餓死”.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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