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당 초기 국제정세 변동

2. 당 초기 국제정세 변동

618년 수의 뒤를 이어 새로 건국된 당 왕조 앞에 놓여져 있던 대외적 과제는 수의 멸망으로 해체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다시 구축하는 것이었다. 당 초기의 대외적 과제 중에서도 중국의 내란을 틈타 다시 강성해진 돌궐을 견제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였다. 당시 화북의 많은 지방세력은 돌궐과 연결되어 칭신하고 돌궐의 봉호를 받들고 있었다. 사실 당 고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당의 고조도 돌궐에 대해 신하를 칭하고, “만일 장안에 입성하게 되면 토지와 백성은 당에게 돌리고, 금·옥·비단은 돌궐에게 돌리겠다”고 공언하는 실정이었다. 실제로 당의 건국 초기에 돌궐은 사신을 장안에 파견해 재물을 거두어 갔고, 한편으로는 다른 지방 할거세력으로 하여금 당을 견제하도록 조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은 지방세력을 진압하여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돌궐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예컨데 620년부터 626년까지 돌궐은 거의 매년 당을 침공하였으며, 626년 당 태종의 즉위 초에는 돌궐의 10만 대군이 장안 부근의 위수까지 진입하여 당에게 심각한 위협을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은 돌궐과의 본격적인 투쟁을 중원의 통일을 완성한 628년 이후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수왕조 말기부터 당에 의해 중국이 다시 통일될 때까지는 수왕조 때에 구축되었던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해체된 시기였다. 이러한 면은 삼국과 당과의 외교관계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625년·626년에 백제·신라가 고구려를 견제해 달라고 요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은 겨우 사신을 파견하여 삼국간의 강화를 중재하는 데 그쳤으며, 그나마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돌궐과의 대결이 급박하였던 당으로서는 고구려와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주 140
각주 140)
당시 당이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을 인정한 것은 당 고조(高祖)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잘 보여 주고 있다. “명분과 실제 사이에는 모름지기 이치가 서로 부응하여야 되는 법이다. 고구려가 수(隋)에 칭신하였으나 결국 양제(煬帝)에게 거역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신하이겠는가. 내가 만물의 공경을 받고 있느나 교만하지는 않겠다. 다만 모든 사람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힘쓸 뿐이지, 어찌 신하를 칭하도록 하여 스스로 존대함을 자처하겠는가?”(『舊唐書』 권199, 高麗傳)
닫기

628년에 당이 중국을 재통일하자,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당시 돌궐에서는 내분이 계속되고 있었고, 더욱 627년에는 돌궐에 예속되어 있던 철륵(鐵勒)·설연타(薛延陀)·회흘(回紇) 등이 모두 돌궐에 반기를 들었다. 기회를 잡은 당은 629년에 설연타와 동맹하여 동돌궐에 대한 대규모 정벌에 나섰다. 동돌궐은 여러 해 동안 내분이 계속되었고, 또 대설의 재해를 입어 수많은 말과 양을 잃는 타격을 입은 터라, 제대로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대패하였다. 이듬 해에는 힐리가한(詰利可汗)이 당군에 사로잡힘으로써 사실상 동돌궐은 와해되었다(630). 이 때 돌궐을 비롯한 제번의 군장들은 당 태종에게 돌궐의 최고 군주인 ‘천가한(天可汗)’의 칭호를 올림으로써 당에 순종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황제천가한(皇帝天可汗)’이라 칭하여 명실공히 중원과 막북의 최고 군주임을 자처하고, 당은 남북 몽고일대의 북방민족들을 도독부와 자사부로 편입시켜 소위 ‘기미체제(羈.體制)’를 건설하였다.
돌궐이 당에 복속되자, 당과 고구려와의 관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고구려는 당 건국 직후인 591년에 당에 입공한 것을 시작으로 거의 매년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당도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다. 622년에는 수의 고구려 정벌시 피차간에 사로 잡은 포로들을 교환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624년에 고구려는 당에 책력(冊曆)의 반포를 청하였고, 당도 영류왕을 책봉하는 한편 도사(道士)를 보내어 고구려에 도교(道敎)를 전하고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강론케 하였다. 630년에 당이 돌궐을 격파하자, 고구려는 이를 축하하는 사절을 보내고 봉역도(封域圖)를 당에 바쳤다.
그러나 화평 관계도 잠시 고구려와 당 사이에는 점차 긴장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631년에 당은 고구려가 수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 군사들의 유골을 모아 세운 경관(京觀)을 헐어버렸으며, 고구려도 즉각 이에 대응하여 부여성에서 요하를 따라 발해만까지 이어지는 천리장성을 16년간에 걸쳐 축조하였다. 그리고 이후 고구려와 당 사이의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런데 이때 천리장성의 축조는 거란과 말갈을 둘러싼 고구려와 당의 주도권 다툼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즉 고구려와 당의 전쟁 과정에서 당은 주로 거란을 동원하였고, 고구려는 말갈을 동원하였다. 따라서 고구려는 요하 중상류와 송화강 일대에 천리장성을 축조하여, 거란의 침공을 방어하는 한편 말갈의 이탈을 방지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고구려와 말갈의 군사 동맹은 상당히 강고하였는데, 이러한 면에서 645년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지원군이 당 태종의 군대에게 패배한 뒤 고구려군과 말갈군에 대한 당의 차별적인 조치는 주목된다. 즉 고구려인 포로는 내지로 끌고 가거나 방환한 것과는 달리 말갈군은 모두 생매장하였던 것이다. 이는 당과의 전쟁에서 고구려의 중요 군사력으로 활동한 말갈에 대한 경고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고구려가 당에 대해 시종 강경한 입장만을 취하였던 것은 아니다. 640년에 고구려는 그 동안의 소원한 관계를 청산하고 태자 환권(桓權)을 당에 사절로 파견하였으며, 아울러 귀족들의 자제를 보내어 당의 국학(國學)에 입학할 것을 청하는 유화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 무렵 당도 고구려에 대해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아직 서역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당의 관심은 서역(西域)에 쏠려 있었다. 634년에 토욕혼에 대한 대규모 정벌로 이를 멸하고, 640년에는 고창국을 정복하여 서역에 대한 지배력을 완전하게 확보하게 되었다. 나아가 641년에는 돌궐을 대신하여 서북방의 위협세력으로 떠오른 설연타마저 정벌하여 서방과 북방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동시에 직방낭중(職方郞中)인 진대덕(陳大德)을 고구려에 파견하여 고구려의 내정을 탐지하며, 고구려 정벌의 기회를 엿보았다.
한편 왜를 둘러싸고 삼국 및 당의 외교전도 전개되었다. 630년에 고구려·백제는 공동으로 왜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왜도 630년 8월에 최초로 사신을 당에 파견하였다. 이에 당도 왜를 반(反)고구려 진영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였지만, 631년에 백제는 왕자 풍장(豊璋)을 왜에 파견하여 다시 동맹관계를 돈독히 하였으며, 왜의 서명천황(舒明天皇)은 친백제적 외교노선을 유지하였다.
이러한 대외 정세의 변동 과정에서 고구려 내부에서도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642년에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세워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연개소문은 집권 직후 당에 대해서는 유화책을 구사하였으나, 신라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642년에 신라 김춘추의 강화요구를 거절한 것도 그러하며, 이후에도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늦추지 않았다. 644년에 신라의 요청으로 당이 사신을 보내어 중재에 나섰을 때에도 신라가 고구려의 옛땅을 돌려줄 것을 조건으로 내세워 중재를 거부하였다. 당과의 전쟁을 앞두고 배후의 신라를 적대세력으로 돌린 것은 이후 고구려 멸망의 대외적 요인이 되었다.
북방과 서방을 안정시킨 당으로서는 고구려 정벌의 명분을 찾는 일만 남았으며, 연개소문의 정변은 좋은 구실이 되었다. 당은 645년 당 태종의 친정으로 고구려와의 전쟁을 시작하였으나, 결국 요동에서 더 진격하지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이 때 신라는 군사 3만을 파견하여 고구려 남변를 공격하는 등 적극적으로 당을 지원하였으나, 이 틈을 타 백제가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신라군은 곧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백제가 고구려를 간접적으로 지원한 결과가 되었다. 이를 보면 645년 전쟁 때에 고구려와 백제, 당과 신라라는 양대 동맹구도를 형성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는 당 태종의 정벌이 있자 말갈을 통하여 설연타와 제휴하려고 하였지만, 설연타는 당의 위협 때문에 호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자 그해 12월에 설연타는 당을 공격하였다. 이는 곧 고구려 정벌에 나선 당의 배후를 공격한다는 의미에서 고구려와 설연타가 동맹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자 당은 이듬해 설연타를 공격하였으니, 곧 고구려와 설연타의 연결을 차단하여 고구려를 대외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1차 정벌에 실패하고 당 태종이 돌아간 후에도 당의 조정에서는 고구려 정벌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다. 이 때 고구려에 대한 공격 전략이 바뀌었다. 즉 대규모 정벌을 지양하고, 소규모 군대를 끊임없이 파견하여 고구려를 피로케 한 뒤에 공격한다는 지구전략이 채택된 것이다. 이 전략에 따라 주로 요동지역에 대한 당의 산발적인 공격이 이어졌으며, 649년에 당 태종이 죽은 이후에도 이러한 대고구려 전략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또다른 국제정세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우선 한반도에서 삼국간 역관계가 변화하였다. 백제가 친고구려 입장으로 돌아서고,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양면 공세에 시달리던 신라가 당과의 동맹에 힘을 기울였다. 신라의 김춘추는 648년에 당으로 건너가서 백제 정벌을 위한 당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당의 관복을 요청하고 자신의 아들을 당 조정에서 숙위케 하였으며, 독자적인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적극적인 중화(中華) 정책을 추진하였다. 한편 당도 이미 여러 차례의 단독 작전에 의한 고구려 정벌이 실패한 후였기 때문에, 신라와의 연합 작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에 나당 군사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나당 군사동맹이 결성되었음에도 실제로 당의 군사력이 백제 정벌에 동원되기에는 당시 대외정세가 그리 순탄치 않았다. 645년 이후 설연타의 공세가 거듭되자, 646년에 당은 회흘과 손을 잡고 이를 멸하였다. 650년에는 서돌궐이 당에 반기를 들었다. 당은 658년에야 철륵을 이용하여 서돌궐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나당 군사동맹이 맺어진 이후에도 당의 고구려 공격은 계속해서 단독으로 수행되었다. 그러나 655년부터 659년까지 계속된 고구려 공격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마침내 당도 전략을 바꾸었다. 백제 공략을 우선 순위로 결정한 나당연합군은 660년에 백제를 공략하여 멸망시켰다. 그리고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사실 당은 돌궐이나 설연타, 서돌궐 등을 제압할 때, 이들과 적대적인 다른 세력을 이용하였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이라 할 수 있다. 당이 동방의 최종 목표인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서 신라와 손을 잡은 것은 당의 대외정책상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등한 외교 관계의 한 표현에 불과하던 조공외교가 정치적 신속을 전제로 하는 차등적 외교관계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것은 신라가 당의 연호(年號)와 역(曆)을 채용하고 또 일종의 인질이라 할 수 있는 숙위(宿衛)를 받아들인 점에서 엿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당의 현실적인 물리적 힘이 배경이 된 것이지만, 통일과정에서 당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었던 신라로서도 당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않되었던 것이다. 더욱 통일 이후 중대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신라왕실의 중화(中華) 정책은 중국 중심의 명분론적 천하관을 보편화시킴으로써 이후 한중관계에 있어서 조공관계는 비록 의례적인 관계에 불과하더라도 관념적실질적으로 정치적 차등질서를 전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 각주 140)
    당시 당이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권을 인정한 것은 당 고조(高祖)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잘 보여 주고 있다. “명분과 실제 사이에는 모름지기 이치가 서로 부응하여야 되는 법이다. 고구려가 수(隋)에 칭신하였으나 결국 양제(煬帝)에게 거역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신하이겠는가. 내가 만물의 공경을 받고 있느나 교만하지는 않겠다. 다만 모든 사람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힘쓸 뿐이지, 어찌 신하를 칭하도록 하여 스스로 존대함을 자처하겠는가?”(『舊唐書』 권199, 高麗傳)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당 초기 국제정세 변동 자료번호 : edeah.d_0002_0040_005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