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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국제관계

2. 4세기 국제관계

4세기는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새로이 변동하는 시기였다. 중국 대륙에서 서진이 몰락하고 5호 16국시대가 전개되면서 중원왕조 중심의 국제질서가 무너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동북아시아의 여러 국가 및 종족집단의 정치적 운동력이 확대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가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통합하며 대표자로 성장하였고, 한반도에서는 백제와 신라, 가야 등이 국제질서의 주체로서 전면에 등장하였다. 일본열도에서도 독자적인 정치적 성장이 이루어지고 아울러 일본열도와 한반도와의 정치적 변동의 관련성이 깊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중원왕조가 추진해온 동방정책의 전진기지로서 낙랑군 등의 변군이 소멸되면서, 중국세력과 동북아의 여러 세력간에 직접적인 교섭이 이루어지면서, 이제는 국가 대 국가의 새로운 외교 교섭 단계로 접어 들어가게 되었다.
이 시기 동북아의 국제관계를 주도하는 존재는 고구려와 백제 및 전연(前燕)·후연(後燕)이었다. 요동지역을 놓고 쟁패를 벌이던 고구려와 전연, 후연 사이에는 외교와 전쟁의 국면이 반복 교차되었다. 342년에 전연의 대대적인 공세에 고구려는 수도 국내성이 함락되는 패배를 당하였다. 이후 전연이 멸망하는 370년까지 고구려와 전연 사이에는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 이 기간 동안 고구려는 평양 일대의 경영에 주력하면서 한반도 내에서 남진의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뒤이어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공방전이 지속되면서, 한반도 및 일본열도를 포괄하는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국제질서의 재편이 이루어지게 된 점이 주목된다.
먼저 고구려는 신라와의 연결을 적극 모색하였다. 377년과 381년에 고구려가 주선하여 신라가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좋은 예이다. 이후에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어 갔다. 광개토왕비에서 보듯이 가야와 왜의 공격을 받은 신라의 구원 요청으로 고구려의 5만 대군이 출병하면서 신라는 고구려의 세력권 아래에 들어갔고, 고구려는 신라의 실성왕과 눌지왕을 인질로 받아들이거나 귀국 후 이들의 즉위 과정에 개입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군이 신라 왕경에 주군할 정도로 양국의 관계는 거의 신속의 수준으로까지 바뀌었다. 이와같은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나제동맹이 맺어지는 4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당시 국제정세에서 백제·가야·왜의 연합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즉위 전반기에 백제전에서 거듭된 승리를 거두면서 남방 전선을 안정시킨 뒤에 요동에서 후연의 공략에 나섰다. 그 결과 대체로 402년 이후에는 요동의 주요 거점을 고구려가 거의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양국의 공방전은 407년 풍발(馮跋)의 구데타로 모용씨 왕실이 무너지고 북연(北燕)이 성립하면서 그치게 된다. 이후 요하 일대의 전선이 안정되면서 고구려는 요동 지역에 대한 완전한 장악과 지배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백제는 360년대에 들어 외교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근초고왕대의 대외교섭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가야 및 왜(倭)와의 교섭이었다.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에 백제는 금강하구까지의 해상교역망을 개설하였고, 4세기 중반 근초고왕대에 들어 한반도 서남해안-남해안-일본열도로 이어지는 교역망을 다시 복구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근초고왕대 이후의 비약적인 성장이 가능했다. 4세기 중엽에 백제가 구축한 이러한 교역망 내지 정치·군사적 동맹관계는 5세기 전반까지 작동하였다. 물론 백제는 372년에 동진(東晋)과 외교관계를 맺고 근초고왕이 동진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이후 백제와 동진이 맺은 공식적인 외교관계는 의례적인 수준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고구려와 백제는 각각 동북아시아에서 자신의 정치적 세력권과 대외 교섭망을 구축해갔으며, 이를 기반으로 양국은 한반도 내에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결하였다. 이 양대 교섭망 내지 동맹축의 역사적 기원은 후한·위진대에 구축되었던 낙랑군에서 진한으로 이어지는 내륙교역망 및 대방군에서 마한·변한을 거쳐 왜로 이어지는 해상교역망으로 소급해 볼 수 있다. 물론 과거 후한·위진대에는 중국을 기점으로 낙랑·대방군을 중계지로 편성된 교역망이었지만, 4세기를 전후하여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복구된 교역망은 고구려·백제가 각각 자신을 기점 혹은 중심축으로 하여 새롭게 구성한 교역망인 동시에 정치적·군사적 동맹의 축이었다.
그런데 과거 4세기 초까지 낙랑·대방군을 중심축으로 하여 개설된 동질적인 두 개의 교역 루트가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이제는 서로 적대적인 대립의 축으로 변화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국가적 성장 및 교역망의 장악에서 비롯한 결과이다. 여기에 4세기 중후반에 백제·고구려의 국가적 성장이 초래한 새로운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의 재편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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