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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정치이념의 전개

4. 유교 정치이념의 전개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유학이 한 때 큰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지만, 한 무제는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백가(百家)를 배척하고 유학을 국가의 유일한 지도이념으로 채택하였다.주 110
각주 110)
무제는 장안(長安)에 태학(太學)을 세우고, 5경박사를 두어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와 동시에 군국에 학교와 학궁(學宮)을 설립하여 지방에 유학을 보급하는 데에도 힘썼다. 한대에 유학을 수학한 학생들이 관리로 나아갔기 때문에 유학을 공부하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 분위기로 자리 잡았다. 동중서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제기하여 군주에게 하늘의 뜻에 따라 왕도정치를 하도록 권유하는 한편, 『공양춘추(公羊春秋)』를 근거로 사상의 통일을 제창하고, 중앙집권에 기반한 천하통일을 강조하였다. 후한대에 금문경학(今文經學) 중심의 관학(官學)에 고문경학(古文經學)을 중시하는 유학자가 문제를 제기하면서 두 학파 사이에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정현(鄭玄)은 고문을 근본으로 삼고 금문을 융합하여 수 백 년 동안 내려오던 금문과 고문의 논쟁을 일소하고 경학(經學)을 집대성하였다. 정현의 경학은 위진남북조시대의 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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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후한 이후부터 유학은 신비화 경향을 보였고, 참위설의 미신이 성행하였다. 조조는 비록 유교적 덕목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더라도 능력이 뛰어나면 관리로 등용하겠다고 주장하였지만, 그렇다고 통치이념으로서 유학을 완전히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군국(郡國)마다 경서(經書)를 배우게 하고, 현마다 학관을 두어 우수한 학생을 뽑아 교육하도록 지시하였다. 위의 건국 이후에 9품중정법을 실시하였는데, 향품의 등급을 정할 때에 유교적 덕목에 대한 평가가 크게 참조되었다. 이후 진과 남조에 이르러 귀족제가 고착화된 이래 노장사상에 기초한 이른바 죽림현학(竹林玄學)이 유행하고 귀족들의 비도덕적인 생활이 일상화되면서 유학은 크게 침체되었다. 양 무제가 한 때 수도의 국자학을 새로 건립하고, 전국 각지에 5관(館)을 설치한 다음, 각기 5경박사를 두어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면서 유학의 진흥을 꾀하였지만,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위진남조에 비하면 5호16국과 북조의 지배자들은 통치이념으로써 유학을 강조하고 그것의 보급에도 꽤나 관심을 기울인 편이었다. 서진의 멸망 이후 북중국은 5호에 의한 16국이 난립하였다. 이민족의 지배자들은 유교적 교양을 가진 한인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유학을 강조하였다. 전조(前趙)의 지배자들은 한인들의 경적(經籍)을 탐독하고, 태학과 소학 등을 세워 유학의 교육과 보급에 힘썼다. 후조의 석륵(石勒)은 유학자들을 등용하여 경학을 가르치게 하고 태학과 소학에 나아가 경의(經義)를 시험보게 하여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비단을 상으로 주었다. 또한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 후진의 요흥(姚興) 역시 유학의 진흥에 힘쓰고 성적이 우수한 태학의 학생들을 관리로 등용하였다고 한다.
5호16국에서 유학을 중시한 전통은 북조의 여러 왕조에 계승되었다. 북위의 도무제(道武帝)는 중원을 안정시킨 뒤에 태학을 세우고 5경박사와 제자 천여 명을 모집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에 국자 태학을 증설하고 제자를 3천 명으로 증원하였다. 그 후 북위의 역대 황제 역시 유학의 교육과 보급에 관심을 기울였다. 헌문제(獻文帝)는 태화(太和) 연간에 중서학(中書學)을 국자학(國子學)으로 고치고,주 111
각주 111)
명원제(明元帝) 때에 국자학을 중서학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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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明堂)·벽옹(辟雍)을 세운 다음, 3덕(三德: 정직·강(剛)·유(柔))과 5사(五事: 모(貌)·언(言)·시(視)·청(聽)·사(思))를 아는 노인을 존중하고, 공경대부의 자제들에게 유교경전을 가르치게 하였다. 효문제(孝文帝)는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호한(胡漢) 사이의 통혼의 장려, 호성(胡姓)의 한성(漢姓)으로의 개정, 호속과 북어(北語)의 금지와 한어의 강제사용, 성족상정(姓族詳定) 등을 단행하여 선비족의 한화(漢化)를 적극 추진하였다. 효문제의 한화정책은 이민족의 지도층을 유교적 교양을 지닌 지식인으로 개조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효문제의 뒤를 이은 선무제(宣武帝)는 국학을 운영하고, 4문(門)에 소학(小學)을 세우게 하였으며, 유학자를 선발하여 박사로 임명하였는데, 소위 박사가 4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북위에서 유학을 널리 장려한 결과, 『북사』 유림전에서 주·한나라와 비길 수 있을 정도로 북위에서 유학이 성황을 이루었다고 평하였다.
북주의 무제는 불교와 도교를 탄압하고, 항상 유가의 예악에 따라 행사를 진행하였다. 또한 『주례』를 모방하여 6관(官) 및 6군(軍)을 설정하였으며, 백관과 승려, 도사 등을 모아놓고 『예기』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수의 건국 이후 한 때 문제는 왕조를 찬탈하였다는 오명을 불식시키기 위한 정치적 방편으로 유학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곧바로 유학을 탄압하고 불교와 도교의 진흥에 더 힘썼다. 예를 들어 수 문제는 601년에 수도와 지방의 여러 학교를 폐쇄하고, 국자학 한 곳만 남겨 두면서 동시에 사리를 각지에 보내 5,000여 개의 불탑을 세우도록 지시하였다. 『구당서』 소덕언전(蘇德言傳)에 ‘수 왕조 시기에는 사회가 혼란하고 학교가 자취를 감추어 유도(儒道)는 진흙탕에 떨어지고 시서(詩書)는 구렁텅이에 쳐 박아 넣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수에서 유학을 경시한 사실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당의 건국 이후 고조 이연과 태종 이세민이 유학의 진흥에 크게 힘썼다. 고조는 학교를 다시 재건하고, 국자학에 주공과 공자의 묘를 각각 하나씩 세우고 사시(四時)마다 절제(節祭)를 올리게 하였으며, 그 후손을 찾아서 상세히 고증한 후에 작위를 내리라고 지시하였다. 태종은 국학에 공자 묘당(廟堂)을 세우고, 중니(仲尼: 공자)를 선성(先聖)으로, 안자(顔子: 안회)를 선사(先師)로 추봉하였다. 또한 국학의 학사(學舍)를 4백여 칸으로 증축(增築)하고, 국자와 태학, 사문(四門) 등의 학생 수를 증원하였으며, 서학(書學)과 산학(算學)에도 각기 박사와 학생을 두어 여러 기능을 갖추도록 하였다. 태종은 자주 국학에 나아가 좨주(祭主), 사업(司業), 박사들에게 강론케 하였는데, 끝나면 각자에게 비단을 사여하였다. 그리고 토번(吐藩)·고창(高昌)·고려(高麗: 고구려)·신라(新羅) 등 주변국의 왕들이 자제를 파견하여 배울 것을 청하자, 이를 흔쾌하게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태종대에 국학에서 강의를 듣는 자가 1만 명에 달할 정도로 유학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태종은 공영달(孔穎達) 등에게 명령하여 5경을 주석한 『5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것은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통일되어 있지 않은 5경의 주소(註疏)를 집대성하여 정리한 것이다. 태종은 이것을 기준으로 매년 과거 시험을 치르도록 지시하였다. 당대에 유학과 과거제도가 밀접하게 결합되면서 유학이 당나라의 통치이념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후대의 중국 왕조뿐만 아니라 고대 한국과 일본, 베트남에도 전래되어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것은 한나라와 마찬가지로 제가(諸家) 가운데 유학의 정통적 지위를 공고하게 다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당 중·후기에 한유(韓愈)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가의 도통(道統)을 강조하였고, 이고(李翶)와 유종원(柳宗元)은 불교와 도교, 유학 등 3교를 통합하는 사상체계를 제시하여 송명(宋明) 이학(理學)의 기초를 닦았다.

  • 각주 110)
    무제는 장안(長安)에 태학(太學)을 세우고, 5경박사를 두어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와 동시에 군국에 학교와 학궁(學宮)을 설립하여 지방에 유학을 보급하는 데에도 힘썼다. 한대에 유학을 수학한 학생들이 관리로 나아갔기 때문에 유학을 공부하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 분위기로 자리 잡았다. 동중서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제기하여 군주에게 하늘의 뜻에 따라 왕도정치를 하도록 권유하는 한편, 『공양춘추(公羊春秋)』를 근거로 사상의 통일을 제창하고, 중앙집권에 기반한 천하통일을 강조하였다. 후한대에 금문경학(今文經學) 중심의 관학(官學)에 고문경학(古文經學)을 중시하는 유학자가 문제를 제기하면서 두 학파 사이에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정현(鄭玄)은 고문을 근본으로 삼고 금문을 융합하여 수 백 년 동안 내려오던 금문과 고문의 논쟁을 일소하고 경학(經學)을 집대성하였다. 정현의 경학은 위진남북조시대의 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바로가기
  • 각주 111)
    명원제(明元帝) 때에 국자학을 중서학으로 고쳤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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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정치이념의 전개 자료번호 : edeah.d_0002_0030_001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