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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불교의 발전

4. 실천 불교의 발전

1) 밀교
중국에서는 8세기 중엽부터 9세기초에 걸쳐 밀교가 크게 융성하였다. 밀교의 초기적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주술이나 주문 등과 관련된 불경은 불교가 전래되던 당시부터 소개되어 있었고 이후에도 질병 치료나 기우(祈雨) 등을 비는 경전이나 주문 즉 다라니를 모은 경전들이 다수 전래되었다. 하지만 체계화된 밀교사상은 8세기초에 중국으로 들어온 인도출신의 선무외(善無畏, 637~735), 금강지(金剛智, 669~741), 불공(不空, 705~774)에 의하여 비로소 전해지게 되었다. 특히 금강지와 그 제자 불공이 밀교의 독특한 의례인 관정(灌頂)을 내세워 밀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황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다. 현종 이후의 여러 황제들은 밀교 고승을 스승으로 삼아 관정(灌頂)의례를 받으며 밀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들은 밀교적 기도와 주술을 통해 정치·사회적 안정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 밀교경전의 번역과 밀교의례의 거행에 힘을 쏟았다. 이를 배경으로 밀교 연구가 급속히 발전하였고 많은 승려들이 밀교연구를 위해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밀교는 9세기 중엽 이후 이후 급속히 쇠퇴하였다. 주된 후원자였던 황실의 세력이 약해지고 서역과의 교류가 위축되어 새로운 밀교사상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종 때의 폐불 이후 밀교에 대한 연구는 더 이상 계승되지 못하였다. 이후 밀교는 독자적인 종파로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밀교에서 유래한 다양한 의례는 종파에 무관하게 수용되어 중국 불교계 전체에 두루 활용되었다.
한국의 경우에도 주술과 주문의 초기적 밀교는 삼국시대부터 전래되었다. 신라 선덕여왕대에 활동한 밀본(密本)은 『약사경(藥師經)』 등의 경전을 읽어 국왕과 귀족의 병을 낫게 해주었고, 명랑(明朗)은 문무왕 때에 당나라 군대가 신라로 공격해 올 때 사천왕사를 세우고 문두루비법을 행하여 외침을 물리쳤다. 통일신라 초기에 활동한 혜통(惠通)도 밀교적 주문으로 많은 이적을 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8세기 후반에 중국에 유학한 승려들 중에 선무외와 금강지에게 수학하는 승려들이 나타나면서 본격적인 밀교가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선무외에게 배운 불가사의(不可思議)는 『대비로자나경공양차제법소(大毘盧遮那經供養次第法疏)』를 지었고, 금강지에게 수학한 혜초(慧超)는 밀교의 가르침을 구하여 인도에 유학하고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과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밀교경전에 대한 주석서를 지었다. 8세기말에 중국에 유학하였던 오진(悟眞)은 밀교경전의 원본을 구하려 인도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티벳트에서 입적하였다. 적지 않은 밀교승려들이 신라에 귀국하여 법을 전수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사상내용과 후대에 계승된 상황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의 밀교는 사이쵸와 구카이에 의해 전해졌다. 처음 천태학을 공부하였던 사이쵸는 천태학과 밀교를 종합하는 천태밀교(천태종)를 개창하였고, 구카이는 불공의 제자인 혜과(慧果)의 법을 계승하여 진언밀교(진언종)를 개창하였다. 10세기 이후 천태밀교와 진언밀교가 불교계의 주류적 흐름으로 등장하면서 기존의 불교들도 밀교적 요소를 수용하였고, 이후 일본불교는 종파에 관계없이 밀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2) 선종
선(禪)수행은 불교의 전래와 함께 수용되었고, 여러 경전과 종파들에서 각기 선정(禪定)수행을 중시하였지만, 선을 중심으로 불교사상을 종합한 독자적인 종파로서의 선종이 형성된 것은 남북조 말기 이후였다. 선종의 개창자로 알려진 보리달마[菩提達磨]는 남인도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북위 말기에 중원지방에서 독자적인 선법을 선양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정리한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 의하면 그는 나와 남이 다르지 않고 부처와 중생이 평등하다는 불성의 이치를 믿는 이입(理入)과 이러한 믿음에 기초하여 보원행(報怨行: 나쁜 일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고 이전의 업에 대한 과보라 여기는 것), 수연행(隨緣行: 삶의 좋고 나쁜 일들을 인연에 의한 것이라 여기며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무소구행(無所求行 : 좋은 일을 갈망하지 않는 것), 칭법행(稱法行: 진리에 따라서 생활하는 것) 등을 실천하는 행입(行入)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마음을 중시하고 말과 생각을 잊는 경지를 강조한 『능가경』을 중시하여 제자들에게 그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였다.
보리달마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나라 초기에 활동한 도신(道信, 580~651)과 홍인(弘忍, 602~675)의 단계에는 수백 명의 집단을 형성할 정도가 되었다. 특히 홍인에게는 뛰어난 제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중국 각 지방으로 흩어져서 선종의 가르침을 홍포하였고 이로 인하여 선종은 중국사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더욱이 홍인의 제자인 신수(神秀, 606?~706)가 측천무후의 존숭을 받아 궁중으로 초청되면서 선종의 영향력은 급속히 확대되었다. 이후 8세기 중반에는 홍인의 손제자에 해당하는 신회(神會, 668~760)가 등장하여 신수를 비판하고 자신의 스승인 혜능(慧能, 638~713)이야말로 홍인의 정통 제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형식적인 좌선수행이나 마음을 집중하는 태도 등을 버리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중시하는 혜능의 선사상이야말로 선종의 참된 모습이라고 하였다. 신회의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통하여 혜능계의 선사상이 점차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후 신수와 혜능의 선사상은 각기 북종과 남종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는데, 혜능 문하에서 뛰어난 선사들이 계속하여 배출되면서 점차 남종이 선종의 주류적 흐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당나라 후기의 사회적 혼란과 폐불정책 등으로 교학불교가 쇠퇴하면서 선종은 중국 불교계의 가장 중심적인 흐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8세기말 이후의 도시와 상업경제 쇠퇴에도 불구하고 농촌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자급자족적 생활을 하였던 선종은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유지하면서 불교계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선종 승려들은 혜능의 어록으로 알려진 『육조단경(六祖壇經)』과 유력한 선승들의 어록(語錄)을 토대로 다양한 선사상을 제시하였고, 나아가 천태사상과 화엄사상과 비롯한 교학불교의 이론들도 주체적으로 수용하면서 교학과 선사상을 통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에 선종이 전래된 것은 7세기부터였다고 전해진다. 도신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법랑(法朗)이 초기의 선사상을 전하였고, 그 제자 신행(神行) 또한 중국에 유학하여 신수의 가르침을 전하였다고 한다. 법랑과 신행의 가르침을 계승한 흐름은 9세기 이후까지도 지속되었지만 불교계에서 선종의 영향력은 극히 미미하였다. 9세기초 남종선을 수학하고 돌아온 도의(道義)는 기존 불교계에 배척되어 경주에 머무르지 못하고 설악산 지역에 은거하였다. 하지만 9세기 중엽 이후 중국에서 선을 수학하고 온 홍척(洪陟), 혜소(慧昭, 774~850), 혜철(慧徹, 785~861), 현욱(玄昱, 787~868), 도윤(道允, 798~868), 무염(無染, 800~888) 등이 전국 각지에 산문을 건립하면서 선종세력은 급속히 확대되었다. 9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선종은 기존의 교학불교를 압도할 정도의 세력을 갖게 되었다. 각 산문의 조사들은 정부에 의해 국사, 왕사 등으로 책봉되면서 불교계를 주도해 갔다. 9세기 이후 귀국한 승려들은 모두 남종선을 수학하였으므로 남종선이 한국 선종의 정통적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일본의 경우에도 선종은 8세기부터 전래되었다. 736년 신수의 문도에게서 수학하였던 도선(道璿)이 일본에 들어와 북종선의 사상을 전하였다. 천태종을 개창한 사이쵸는 국내에서 일찍이 도선이 전한 선사상을 수학하였으며 중국유학 중에도 선종 관련 문헌을 다수 구하여 자신의 사상 형성에 활용하였다. 이후에도 중국에 유학한 승려들을 통하여 선종에 관한 정보가 적지 않게 전래되었다. 하지만 12세기까지는 선종에 대한 본격적인 수용이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 불교계가 국가의 후원하에 밀교 및 이전에 전래된 교학불교에 대한 연구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선종이 수용될 여지가 많지 않았다. 9세기까지 중국에 유학한 일본승려들 중 선종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고, 그 이후에는 중국과 일본의 교류가 제한되었다. 12세기 이후 남송과 일본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비로소 선종이 일본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에사이[榮西, 1141~1215]를 비롯한 다수의 승려가 중국에 건너가 선종을 수학하고 돌아왔고, 몽골에 의해 남송이 멸망한 이후에는 남송의 선사들 다수가 일본으로 건너와 가르침을 전하였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무인막부도 왕실 및 중앙귀족들과 결합되어 있던 기존의 불교계를 견제하기 위하여 새로 전래된 선종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3) 정토신앙
정토신앙은 다른 학파나 종파에 비하여 잘 정비된 이론체계를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일반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사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예토(濊土)를 떠나 부처님이 계시는 정토(淨土)에 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원만히 따르고자 하는 정토신앙은 불교수용 초기부터 유포되어 있었다. 이른 시기에 번역된 경전들 중에 이미 미륵정토와 극락정토에 관한 내용들이 들어있었고, 4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던 도안과 혜원은 각기 미륵신앙과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을 실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토신앙이 본격화된 것은 6세기 이후였다. 특히 담란(曇鸞, 476~542?)에 의하여 정토신앙에 대한 이론이 정비되면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그는 다른 이론적 수행과 달리 정토신앙을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이행도(易行道)로서 적극적으로 선양하였다. 그는 또한 경전에 나오는 정토왕생을 위한 염불(念佛)을 명상 속에 부처의 모습을 보는 것[관상(觀想)]이 아니라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것[칭명(稱名)]이라고 하여 염불신앙 대중화의 기반을 닦았다.
7세기에는 도작(道綽, 562~645)과 선도(善導, 613~681), 가재(迦才) 등이 말법신앙에 기초하여 스스로 교학을 연마하고 참선을 하는 자력신앙보다 아미타불의 서원력에 의지하는 정토신앙의 타력신앙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빠른 길이라고 주장하며 정토신앙과 염불행을 적극적으로 홍포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정토신앙은 불교신앙의 대표적인 흐름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다른 종파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8세기 이후에는 염불수행과 교학, 선수행의 조화가 강조되면서 교학과 선, 염불의 병행이 불교계에 널리 추구되었다. 선종과 천태종에서도 정토신앙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중국의 경우 정토신앙은 무종의 회창폐불 이후 선종과 함께 불교계의 가장 대표적인 흐름이 되었다. 하지만 정토신앙은 독립된 종파가 아니라 선, 교, 율이 혼합된 신앙형태인 염불결사로 발전하였다. 송나라 이후 불교의 영향력이 점차적으로 쇠퇴하는 가운데에도 정토신앙은 대중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널리 유포되었다.
한국에서는 불교대중화가 본격화된 7세기 중엽 이후 정토신앙이 크게 유포되었다. 귀족이 아닌 일반인들에 대한 교화를 중시한 불교 대중화의 실천자들은 일반인들에 대한 주요 교화의 수단으로 정토신앙을 활용하였다. 7세기말 이후에는 일반인들 뿐 아니라 왕실과 귀족들까지 정토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정토신앙은 이후 신분과 관계없이 모든 불교 신자들의 가장 친숙한 신앙으로 실행되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 정토신앙은 10세기 이후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9세기까지도 국가의 후원을 받는 제도화된 종파불교들이 득세하였지만 사회적 불안이 커지고 말법사상이 유행하면서 내세의 안녕을 추구하는 정토신앙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특히 저자거리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교화하였던 구야[空也]의 활동 이후 정토신앙은 대중들 사이에 널리 퍼져갔다. 11세기에는 정토신앙이 지배층들에게도 확산되었다. 집권자 후지와라[藤原] 가문이 극락정토를 묘사한 뵤도인[平等院]을 건립하는 등 왕실과 귀족들은 다투어 아미타불을 봉안하는 사찰을 건립하였다. 카마쿠라막부시기에는 정토신앙만을 수행할 것을 주장하는 정토종이 등장하여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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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불교의 발전 자료번호 : edeah.d_0002_0020_006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