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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하대 불교계 동향

2. 신라하대 불교계 동향

8세기 후반에 들어 신라사회는 커다란 변동을 겪게 되었다. 혜공왕대(765~779) 이후 왕위를 둘러싼 귀족들의 투쟁이 지속되면서 정치·사회적인 혼란이 계속되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특히 9세기 중엽 이후에는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경주 일원에 국한되고 지방은 새로이 등장한 세력들에 의해 할거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처럼 왕실과 중앙정부의 위상이 저하되는 가운데 국가적 차원의 사찰은 더 이상 건립되지 않았고 왕실의 원찰도 왕실과 가까운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사적으로 건립, 운영되었다. 불교계를 관리하던 정법전(政法典)도 속인 관료가 아닌 승려가 운영을 맡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불교계도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통일기 이후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기존의 교학불교는 후퇴하고 실천적인 신앙불교들이 지방을 무대로 발전해 갔다. 특히 부석사를 중심으로 실천적 신앙을 중시하고 있던 의상계 문도들과 참회고행과 점찰법을 내세워 지방민들에 대한 교화에 힘쓰던 진표(眞表)계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의상계는 중대말 왕실에 초빙되어 활동한 표훈(表訓) 이후 경주의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고, 전주(全州) 인근 금산사에서 활동하던 진표와 그 제자들은 속리산과 동해안 지역을 거쳐 수도 경주와 인근 지역에까지 교화를 넓혀갔다. 의상계를 후원한 왕실과 귀족들에 의해 불국사와 해인사가 창건되었고, 진표와 그 문도들에 의해 법주사와 동화사 등이 건립되었다.
한편 9세기 이후에는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가운데 새롭게 대두한 지방세력들의 후원을 받는 선종이 불교계의 주류적 흐름으로 등장하였다. 선종의 가르침은 일찍부터 소개되고 있었지만 9세기초까지는 소수의 승려들에 의해서만 실천되고 있었다. 하지만 830년대 이후 중국에서 선종을 수학한 승려들이 잇달아 귀국하면서 선종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갔다. 특히 당나라 무종의 폐불을 계기로 다수의 유학승들이 귀국하면서 선종의 영향력은 급속히 확대되었다. 8세기 후반 이후 중국 불교계에 선종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신라출신 유학승들도 대부분 선종을 수학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선승들은 당시 대두하고 있던 지방세력들의 지원하에 각 지역에 산문을 개창하여 적극적인 교화를 펼쳤다. 지방세력들은 새롭게 소개된 선종을 지원함으로써 중앙정부와 연결되어 있던 기존 불교계의 사상적 영향력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선종 산문을 통하여 지방에 정신적, 문화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각지의 산문들은 문도들에게 계승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 갔다.
8세기 후반에 발전한 의상계와 진표계, 9세기 이후에 대두한 선종이 10세기 이후 한국 불교계를 주도해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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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하대 불교계 동향 자료번호 : edeah.d_0002_0020_006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