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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전기 국가불교의 변형과 민간불교의 성장

1. 당나라 전기 국가불교의 변형과 민간불교의 성장

7세기 전반 당(唐) 왕조가 수립되면서 불교의 위상은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당의 건국자들은 유교 정치이념에 입각한 합리적 국가운영을 지향하였고, 그에 따라 불교는 더 이상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당 황실은 자신들과 성(姓)이 같다는 이유로 노자(老子)를 국가적 차원에서 숭상하면서 노자를 받드는 도교의 위상을 강화시켜 주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불교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일부 예외는 있지만 황제가 이전과 같이 부처나 보살, 전륜성왕 등으로 자처하지 않았고, 승려들이 황제의 존숭을 받으며 국정에 참여하는 일도 보기 드물었다. 승려들에게도 유교 윤리가 강조되어 군주와 부모에게 예를 표할 것이 강요되었고, 교단이 가지고 있던 승려들에 대한 재판권도 국가가 장악하였다. 승려들을 통괄하는 승통, 승정 등도 과거처럼 국가의 존숭을 받는 고승이 아니라 속인 관료의 지휘를 받는 행정 담당자로 위상이 격하되었다. 이처럼 불교교단의 위상이 약화되고 승려들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종래 황제에 대해 ‘빈도(貧道)’나 ‘사문(沙門)’이라고 자처하던 승려들이 8세기 중엽 이후에는 ‘신(臣)’을 칭하게 되었다.
국가의 불교에 대한 지원이 약화되면서 불교를 배격하는 논의들도 등장하였다. 일부 유교 지식인들은 남북조 및 수나라 시기의 정치, 사회적 혼란 원인을 지나친 불교신앙에서 찾으면서 불교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중단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불교비판에 대응하여 불교계에서는 불교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한편 불교인들의 자성과 분발을 촉구하였다. 당나라 초기에 편찬된 『광홍명집(廣弘明集)』에서는 불교 배척 이론들을 반박하면서 불교가 국가에 도움이 되는 점을 강조하였고, 『속고승전(續高僧傳)』에서는 ‘호법(護法)’편을 만들어 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들을 선양하는 동시에 계율의 엄정한 실행을 강조하였다. 한편으로 불교계는 국가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불교의 호국적 성격을 한층 더 강조하였다. 하지만 불교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다시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회복되지는 못하였다.
황실과 정부 내에서의 불교의 위상은 약화되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불교의 영향력은 결코 약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사회 상층부의 절대 다수에게 수용되었고, 일반 민중들에게도 널리 신앙되게 되었다. 정부의 사원과 승려 축소 정책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사원과 승려의 수는 더욱 늘어났다. 귀족들의 원찰은 확대되었고, 일반인들의 신앙모임인 의읍(義邑)과 법사(法社)의 활동도 더욱 활발해져 갔다. 황제를 비롯한 황실 구성원들도 개인적으로는 불교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불교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황제의 존숭을 받는 고승들이 궁중의 내도량(內道場)에 초빙되어 설법하는 사례도 빈번하였다.
서역과의 활발한 교류도 불교의 영향력 확대에 기여하였다. 7세기 중엽 당나라가 중앙아시아 지역을 장악하면서 서역과 당나라의 교류는 한층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불교를 신봉하는 서역 국가들과의 교류 및 이들 국가에 대한 당나라의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있어서 불교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인도 구법여행을 달성하고 왕래한 지역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긴 현장(玄奘, 602~664)과 의정(義淨, 635~713), 혜초(慧超) 등의 활동은 정부가 불교에 대해 우호적 태도를 취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불교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신앙층도 확대되었다. 특히 7세기에 불교사상에 대한 연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유교 지식층 사대부들 중에도 불교 이론과 신앙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남북조가 통합되고 인도에서 새로운 불교이론이 수용되면서 7세기에는 기존의 여러 불교사상들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나타났다. 그러한 시도들을 통하여 기존의 인도적 사상이 중국화되어 이해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중국화를 통해 불교사상은 지식인들에게 폭 넓게 수용될 수 있었다. 종래 불교에 무관심하였던 사대부들 중에 새롭게 제시된 불교이론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사대부들은 의례나 사원건립 등과 같은 불교의 외형적 측면보다 사상과 수행 등 내면적인 문제에 주된 관심을 가졌고, 이는 불교 신앙의 성격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사찰을 건립하고 큰 의례을 거행하는 것을 비판하고 내면의 마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이라는 인식이 확대되게 되었다. 일찍이 불교신앙의 이상적 모습으로 칭찬되었던 양나라 무제를 비롯한 제왕들의 신앙행위에 대하여 외면적인 것에만 치중하고 실제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는 비판적인 인식도 등장하였다. 8세기초의 재상으로 독실한 불교신앙을 가졌던 요숭(姚崇, 650~721)은 올바른 법을 깨닫는 것이 불교의 진짜 가르침이고 외형적 의례는 쓸데없는 것이므로 자신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상이나 경전을 만들고 법회를 여는 등의 행위를 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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