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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국가 단계

2. 초기국가 단계

기원전 1900~1500년경으로 추정되는 이리두위키백과위치문화(二里頭文化)의 단계에 국가의 권력자 혹은 왕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최초의 궁정지가 하남성 이리두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그림 3). 이리두유적은 동서 2,400m, 남북 1,900m로 그 내부에서 모두 5기의 궁전지가 조사되었는데 이리두문화 2기에 3호, 5호 궁전지, 이리두문화 3기에 1호와 2호 궁전지가 해당한다. 3호 궁전지는 남북 길이 150m, 동서 50m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북원(北院), 중원(中院), 남원(南院)의 3개 중정(中庭)으로 구성되었는데, 중원에 주전(主殿)이 배치되어 있다. 중원과 남원에는 중형급의 무덤이 조성되어 동기, 옥기, 칠기, 백도, 원시청자 등의 부장품을 갖고 있다. 5호 궁전지 서측으로는 정연하게 정비된 도로망이 확인되어, 도시계획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림 3 이리두유적과 궁정지(宮本一夫, 2005 RISS )
궁전구 북쪽에는 종교적인 제의가 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단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직경 5m 이내 기단 상부에 2중의 원형 마운드 형식을 갖추고 있다. 궁전구 남쪽에는 청동기주조공방시설이 확인되어, 정치적인 중심공간, 종교적 제사공간과 함께, 전업화된 공인구역이 공존하는 도시공간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1, 2호 궁전지 따라 도로망이 있고, 다시 그 도로를 따라 궁전구를 방어하는 성벽이 확인되었다. 길이는 동서 300m, 남북 360m로서 이 성벽의 존재로 도시의 기능이 보다 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 1호 궁전은 남북 100m, 동서 108m의 기단상에 회랑이 돌려 있고, 중심축상에 문과 전당, 중정이 존재한다. 2호 궁전은 남북 73m, 동서 58m로 1호 궁전에서 150m 동북쪽으로 떨어져 있다. 전당의 북측에 대형묘 1기가 2호 궁전지의 문에서 바라보면, 중심축과 일치한 선상에 위치하는 바, 2호궁전에서 대형묘의 부속시설, 시조묘 제사의식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제작되는 것은 이리두문화 3기위키백과로서, 도끼, 끌 등의 공구와 각종 장신구, 그리고 과, 월, 촉 등의 무기와 함께 삼족의 작(爵)위키백과으로 대표되는 청동제 의기와 방울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악기가 제작 보급된다. 이리두문화 4기에는 작(酌) 이외에 가(斝)와 화(盉)의 주기와 정(鼎) 등의 용기가 제작된다. 이들 청동기를 이리두의 실력자들이 독점하고, 신성한 제사권을 행사하면서 통치의 합법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기원전 1600~1400년경의 이리강위키백과위치문화(二里崗주 010
교감주 010)
"二里崗"은 "二里岡"의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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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 단계에는 상(商)의 시대로, 전기에 언사상성(偃師商城)위키백과RISS위치, 후기에 정주상성(鄭州商城)과 소쌍교상성(小雙橋商城)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당시 궁정도시국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언사사성은 하남성 언사현에 위치하는데 소성은 740×1,100m, 대성은 1,240×1,770m의 규모로서 판축토성과 해자로 둘러싸인 4만㎡의 구역에 궁정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정주상성은 남북 1,870m, 동서 1,700m의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다(그림 4). 현재 하남성 정주의 중심부에 위치하는데, 언사상성과 마찬가지로 궁전과 원지가 조성되어 있다. 그 규모가 훨씬 확대된 것으로 왕권 확립을 입증하는 은나라 왕도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남쪽 성벽에서 남쪽으로 1㎞ 떨어져 동서 약 5㎞의 외성벽이 발견되어 외성과 내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성은 4~5m 높이의 판축토성으로서 장방형 평면내부에 궁전지와 인간희생제가 시행된 제사구 등이 확인되었다. 외성과 내성 사이에 각종 청동 예기와 무기, 공구를 제작한 공방지가 확인된 바 있다.
그림 4 정주상성(宮本一夫, 2005)
이리강 단계에 은의 영역과 그 주변에서 발견된 성곽유적은 3등급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1등급은 정주상성RISS, 2등급은 언사사성, 3등급은 산서성 동하풍상성(東下馮商城)위치, 원곡상성(垣曲商城)위치, 하남성 초작시부성(焦作市府城)위치, 호북성 반룡성(盤龍城)위치 등이 해당된다. 정주상성RISS의 내성은 언사상성의 대성 혹은 외성보다 그 규모가 크고, 제3등급의 성곽은 중심궁전과 중정을 갖춘 4합원(四合院)RISS이지만 정주상성이나 언사상성보다 단순한 바, 은나라사람들의 식민지 거점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원전 1400~1100년의 안양단계에 이르러 왕 반경(盤庚)위키백과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이 은에 도읍지를 지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안양시위키백과위치 원하(垣河) 북쪽의 원북상성(垣北商城)은허세계유산과 남쪽 은허위키백과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의 대규모 궁전과 종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적이다. 원북상성은 동서 약 2,100m, 남북 2,200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중앙에 1호와 2호궁전이 발견되었다. 1호 궁전은 동서 173m, 남북 90m로서 사합원식을 따르고 있는데, 주전의 전면에 인간과 동물희생의 제사갱이 있고, 중정에는 궁정의례, 조상의례 행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북상성의 남쪽에 위치하는 은허지구에는 왕궁과 종묘, 왕릉구가 있고, 귀족의 묘지군 또한 조성되어 있다. 왕릉구에는 반경 이후 역대 12인의 왕 중 마지작 왕인 신제(辛帝)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를 제외하고 11인의 왕이 모셔져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그림 5).
그림 5 은허의 왕릉구(宮本一夫, 2005 RISS )
무정(武丁)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 혹은 반경의 무덤이라고 추정되는 1001호 대묘는 묘광이 남북 19m, 동서 21m, 깊이 10m로서 사방에 묘도(墓道)가 있는 아자형(亞字形)을 이루고 있으나, 도굴이 되어서 부장품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
무정의 부인이라고 하는 부호(婦好)위키백과위키백과위치의 무덤을 보면 왕릉의 특징인 사방 묘도가 없고, 5.6×4m의 토광에 목곽이 안치되어 있었다. 도굴되지 않아 부장유물이 당시 그대로 전하는데, 청동기 460점, 옥기 755점이 확인되어 그보다 상위인 왕릉의 부장유물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그림 6).
그림 6 은대 청동제기(北京大, 1989 RISS )
1001호 대묘의 목곽 주위에는 12인의 순장인골, 남쪽 묘도에는 59인의 두개골이 확인되었다. 왕묘 주위 1,200여기의 토광유구 중 배장묘(配葬墓)는 131기에 불과하고 인간희생갱은 510여기를 비롯하여 다수의 동물 희생갱이 확인되었다. 희생인골의 상당수가 다른 종족에 속하는 바, 이를 통하여 대내적으로 종적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대외적으로 은왕조 주변의 종족집단에 대한 적대적 관념을 강화시켜나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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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국가 단계 자료번호 : edeah.d_0001_003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