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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집자리와 마을의 구조

2. 집자리와 마을의 구조

1) 황하유역
동아시아 신석기시대의 집자리는 기본적으로 움집이 주류를 이룬다. 화남지역은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초기 단계에 동굴유적이 많이 확인되기도 한다. 움집은 평면형태에 따라 원형과 방형, 장방형 등으로 나뉘며 각 시기별로 혼용되어 다양하게 사용된다. 움집 내부에는 일반적으로 중앙에 화덕자리가 설치된다. 중국 황하유역에서는 전기단계부터 본격적인 마을 유적이 형성되는데, 취락 주변에 방어용의 도랑(환호)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을 설치한 환호취락이 일반적이다. 환호취락은 전세계적으로 확인되며 농경사회의 등장과 맥을 같이 하는 특징이 있다. 농경사회가 되면 가경지의 확보, 수확한 식량의 보호 등의 문제로 인해 이러한 환호취락이 등장하는 것이다. 황하 유역의 앙소문화 반파 유적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섬서성 강채 유적위치, 요서의 흥륭와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유적 등은 이러한 환호취락의 대표적인 예이다.
환호취락은 강채유적에서 보듯이 중앙 광장을 둘러싸고 집자리들이 환상(環狀)으로 배치되고 환호 밖에는 무덤구역, 토기생산구역이 나뉘어 자리한다. 반파유적에서도 이러한 구분은 명확하게 나타난다. 강채유적에서 보이는 취락 내의 주거배치가 5개의 군으로 나뉘는 양상은 취락 내 씨족들의 주거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반면 흥륭와 유적이나 홍산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단계의 취락 등 요서지역에서는 환호 내에 환상배치 대신 정연하게 열을 이룬 열상배치 형태의 취락이 존재한다. 이 경우에도 각 열에는 가장 큰 주거지가 하나씩 위치하고, 전체 취락 내에서도 가장 대형의 취락이 따로 존재하는 등 취락 내의 위계적 구조가 확인된다.
도면 1 강채유적 취락 배치도와 복원도(中.社.科.院考古硏究所, 2010)
황하유역의 전기에는 주로 원형평면의 수혈식주거지가 유행하나 앙소문화단계 등 중기가 되면 이외에도 방형 및 장방형 주거지가 유행하고 지상식 건물도 유행한다. 더불어 2간 이상의 집을 연접한 연간식(連間式) 집자리도 나타나게 된다. 지상식집자리의 출현은 지상으로 벽체가 올라가고 지붕이 지면에서 분리되는 주거의 출현을 말하며 건축학적 기술이 진보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황하유역 신석기 후기가 되면 사람들의 거주구역이 확대되어 구릉지대에서 개간이나 경작에 유리한 평지로 진출하게 된다. 주거지의 밀집도도 증가하여 인구증가를 알 수 있다. 주거지 배치도 앙소문화시기의 환상배치와는 달리 열을 지어 배치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 시기는 이미 거의 지상식건물이 주류를 이룬다. 주로 단칸과 2칸의 집이 많다. 벽은 진흙 벽돌을 이용하거나 나무기둥과 흙벽으로 축조하였다. 바닥은 백회를 깔거나 단단하게 다져 처리하였다.
황하 중하류에서 후기 용산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단계가 되면 각지에 성지가 출현하게 된다. 황하유역에서 가장 이른 성지의 예는 앙소문화 후반 단계의 것이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용산문화 단계에 보편화한다. 성지는 흙을 다져 쌓아(판축) 평면 방형으로 축성하였는데 규모는 다양하여 한변 70여 m에서부터 180m에 이르는 것도 있다. 하남의 왕성강(王城崗)위치, 평량대(平糧台)위치, 후강(后崗) 유적 등에서 이러한 성지가 발견되었다. 성지 내부에는 주거지, 무덤, 제사시설, 회갱 등이 존재하며 성지에는 문지가 남아 있다. 왕성강 성지 내부에서는 다수의 회갱 내에서 많은 수의 인골이 확인되어 종묘(宗廟)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적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평량대에서는 성내 교혈에서 청동주조의 흔적[銅渣]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산동지역에서도 성지가 확인되는데, 등주(藤州)시 서강류(西康留)위치, 양곡(陽谷)현, 왕가장(王家庄) 유적 등 대문구 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말기에 이미 등장한다. 서강류 성지는 동서 185m, 남북 195m로 약 35,000평방미터에 달하는 규모이다. 왕가장 성지는 용산문화단계까지 사용되는데 동서 120m 남북 320m에 달한다. 용산문화 단계가 되면 성지가 보편적으로 보이는데 성을 축조할 때 기저부에 의도적으로 사람이나 돼지,개 등을 희생물로 묻거나 언과 같은 토기류를 매납하기도 한다. 이 단계의 성지는 규모에 따라 중심성과 소성으로 구분된다. 중심성은 면적 300,000평방 미터 이상의 대규모에 성 내부에는 대형 및 소형 기단이 설치되어 있다. 소형기단부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의도적 매납, 회갱내 미사용 토기[豆]의 매납 현상이 관찰되어 일종의 예기적(禮器的) 성격으로 볼 수 있으며 이로 볼 때 소형기단은 종묘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양성진에서는 도철문(饕餮文)이 시문된 옥부(玉斧)가 발견되었는데, 이 역시 예기적 성격을 가진 것이다. 중심성 주변에는 규모 30,000~60,000평방미터의 작은 성이 위치한다. 중심성 주변에서는 취락유적이 비교적 적게 발견되어 성 내부에 인구가 밀집했던 것[城市]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용산문화 단계가 되면 성지가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주동기술이 발전하며, 농업생산력도 증대되고, 사유재산제의 보편화, 빈부격차의 심화, 사회의 중층화 현상 등이 심화되면서 전쟁과 같은 사회적 긴장상태가 나타남에 따른 현상으로 생각된다.
2) 양자강유역
양자강 중류에서는 굴가령 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이전까지는 수혈주거가 나타나나, 굴가령 문화단계가 되면 지상건축이 일반화된다. 벽체는 풀과 섞은 진흙을 이용하였으며 내부 바닥은 백회를 깔았으며 화덕자리가 있다. 일부 집들은 약간 높은 기단 위에 지어져 있는데 이는 습한 기후조건에 적응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지역에서도 굴가령문화 단계부터 성지가 출현한다. 성두산(城頭山)성지위치, 주마령(走馬岭)위치성지, 음상성(陰湘城)위치, 석가하(石家河)성지위치 등이 그것인데 원형이나 방형 평면을 하고 있으며 성밖으로 해자가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석가하성지는 120만평방미터에 달하는 이 지역 중심성으로 내부에 종교구, 거주구, 묘장구 등이 구분되어 있다. 강한평원의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에 이러한 고성들이 위치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황하중류지역의 집단들과 전쟁을 상정하고 이를 고사전설(古史傳說)의 황제 집단의 전쟁과정과 연결시켜 해석하기도 한다. 어쨌든 황하유역의 용산문화시기, 장강 중류의 굴가령문화시기에 양 지역에 새로운 형태의 취락조직원리-城-가 등장하는 것은 분명하며 이것이 인구증가, 빈부격차, 야동기술발전, 농업생산력 향상 등 다른 사회 현상과 맞물려 있음도 분명하다.
양자강 하류 태호주변의 마가빈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취락은 장방형을 기본으로 하고 습기가 많은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바닥에 점토와 조개가루, 돌가루 등을 섞어 불다짐을 한 흔적들이 확인된다. 또한 기둥자리 밑에 나무판을 깔아 침하를 방지한 시설도 특징적이다. 양저문화에 이르면 대규모 취락유적들이 형성되는데 태호위치의 북, 동, 남쪽 지역에 주로 분포한다. 태호 남쪽의 막각산(莫角山) 취락군항주넷위치과 성지는 그 중에서도 중심지구에 해당되는데, 성지는 남북 1,800-1,900m, 동서 1,500-1,700m로 290여만 평방미터의 해당시기 중국 최대규모급이다. 성지는 바닥에 돌로 기초를 깔고 흙을 쌓은 것으로 현재 최대 4m 높이로 남아 있다. 성지의 중앙에는 자연언덕을 이용해 축성한 면적 약 30만 평방미터의 인공 토대가 있는데 이곳이 막각산이다. 토대 위에는 궁전건축으로 추정되는 대규모의 기둥자리들이 남아 있고 주변에는 묘지들이 배치되어 있다. 주변 묘지들[反山, 瑤山]은 중대형묘들로 대형묘의 경우는 부장품이 최대 500여 점이 넘으며 옥종, 옥벽, 옥월 등 예기들이 다량의 토기들과 함께 부장된다. 이 옥기들에는 도철문 등 이후 청동예기의 주요 문양이 되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묘지구에는 제단이 형성되어 있다. 상해 복천산 무덤위치에서는 대형묘에 순장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중심궁전, 성지, 대형묘, 예기의 존재는 양저문화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가 중국 신석기시대 말기의 중심지 중 하나임을 보여준다.
항주 이남지역에서는 전중기단계에 수변 취락이 유명하다. 지형상 해안 저지에 형성된 이 유적들은 나무기둥을 기초로 세우고 집의 바닥을 공중으로 띄운 고상가옥(高床家屋)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干欄式建築]. 이는 습지에 적응한 가옥형태로 이러한 가옥은 대부분 장방형 대형가옥이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로 절강성 하모도(河母渡)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위치 유적, 전라산(田螺山)위치 유적 등을 들 수 있다. 하모도 문화 후기에는 기둥 바닥에 나무판을 깔아 초석으로 쓰는 것이 등장하는데 이는 마가빈문화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3) 한반도 지역
한반도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움집이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종일관 중심적인 집자리로 나타난다. 움집은 전, 중기에는 원형이나 방형이 주류이나 후기가 되면 장방형이 각지에 등장한다. 움집 내부에는 화덕자리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가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반도에서는 환호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취락이 신석기시대에 확인된 예는 없다. 한반도의 환호취락은 청동기시대가 되어야 등장한다. 취락은 2~5기의 집자리로 이루어진 소규모 취락부터 20여기 이상의 대규모 취락에 이르기까지 규모가 다양하나 일반적으로는 10여기 미만이 주류이다. 취락은 일반적으로 강변 충적지나 낮은 구릉에 입지하는데, 후기로 갈수록 구릉 입지가 현저해진다. 취락의 배치형태는 정형성을 띠고 있지는 않지만 일부 열상배치의 형태를 보이는 것도 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의 예처럼 명확한 환상취락 형태는 나타나지 않아 취락내부구조가 주변지역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기에 유행하는 장방형 평면의 집자리들은 가옥의 규모도 커지고 지붕의 형태도 맞배지붕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형태를 기본으로 하며, 내부 생활 공간 분할[거주/저장/식료처리] 양상이 현저해지는 등 앞 시기와 비교해 가옥형태가 발전된 양상을 나타낸다. 취락내 공간분할과 관련해서는 김천 송죽리 유적에서 가옥 및 이에 딸린 외부 저장시설, 토기생산시설이 분리되어 확인된 예가 있다. 또는 일반 취락 내에 소형의 수혈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저장시설?]이 혼재하거나 옥외의 공동 조리시설로 생각되는 야외노지가 확인되는 예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아직 한반도에서는 신석기시대의 토기요지나 농경관련 경지, 무덤의 조사예가 극히 적어 취락과의 관계가 불명확하다. 따라서 사회조직이나 구성에 대한 연구가 아직은 미진한 상황이다.
4) 일본열도
죠몽시대위키백과의 주거와 마을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하나, 최종빙기위키백과 이후의 온난화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식물성 식료의 적극적 이용, 사슴나리스이나 멧돼지나리스 등의 포유류 사냥, 저장전략의 구사를 통한 정주마을의 등장이라는 면에서 공통성을 가진다. 죠몽시대의 집자리는 평면형태가 크게 원형이나 타원형, 방형이나 장방형을 갖는데, 기본적으로는 땅을 파고 축조한 움집의 형태이다. 정주취락은 초창기 융기선문 단계부터 등장하는데 남구주의 가쿠리야마 취락, 관동지역의 무장대(武藏台) 유적군 등 복수의 주거지와 취락으로 구성되는 양상이다. 북해도와 북일본의 경우는 수혈주거 취락은 조기단계에 본격화한다. 조기에는 주거역, 저장혈, 무덤, 광장 등이 공간 분할되어 환상(環狀)으로 배치되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해 전기에 본격화 한다. 특히 관동과 중부고지 일대에는 전기에 환상으로 배치된 주거지군의 내측에 묘역이 형성되어 있는, 묘역을 중심으로 한 취락유적이 널리 분포한다.
집자리의 평면형태는 죠몽시대 조기나 전기처럼 이른 시기에는 방형이나 장방형이 많고 중기에는 원형이나 타원형이 많다. 늦은 시기로 가면 원형과 방형이 모두 사용된다. 집자리의 규모는 시기가 내려갈수록 커지는 경향이 있다. 관동지역의 경우는 전기에 대칭구조의 장방형 평면에 지붕이 지면으로부터 분리되는 벽체형 주거가 성립한다. 여기에는 벽가를 두르는 기둥, 중앙의 노지, 토기매설 등의 특징이 나타난다. 그 후 중기에는 구심구조의 원형평면, 4주식 중심기둥, 중앙노지(위석, 토기)를 갖는 주거가 중부고지에서 성립하여 관동지역에 유행하게 된다. 후기초두에는 다시 벽가를 두르는 기둥을 가지는 전기형의 주거가 나타나지만 나머지와 혼재한다. 출입시설은 중기 후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후기 초두에는 돌출된 출입구를 갖는 경병형(鏡柄型) 주거지로 발전한다. 후기 중엽이 되면 방형평면의 주거가 압도적으로 많아진다. 이 시기에는 벽가 기둥이 매우 얇아지는 경향이 있어 이때부터 토벽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형식의 주거는 마지막까지 지속된다. 북해도 지역은 대칭구조가 주류를 이루나 중기 이후 구심구조와 혼재한다.
죠몽시대 마을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마치 도넛 모양으로 중앙을 비우고 주변으로 집과 여러 시설들을 배치한 소위 환상취락이 유명하다. 환상 취락의 기본 구조는 중앙에 광장을 두고 그 외곽에 무덤과 고상가옥, 움집을 방사상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중대구조라 한다. 취락의 규모는 큰 것은 직경 150m에 달한다. 환상취락은 주로 중부, 관동, 동북지역의 같은 동일본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조기에 출현해 전기에서 후기까지 지속되나 후기에는 해체되는 양상을 보인다. 환상취락은 당시의 취락 중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거점취락으로 기능하였으며 인구가 집중된 곳이었다. 오랜 기간 중심취락으로 기능하며 각 시설들의 축조에 규제가 강한 탓에 집자리들의 중복관계가 매우 심한 것이 특징이다. 환상취락들은 주거지나 무덤 등 취락내 시설들이 몇 개의 군으로 묶여 분포하는 패턴을 보이는데, 이러한 취락구조를 분절구조라 부른다. 취락내에서 나뉘어지는 이러한 분절구조의 각 단위는 혈연에 기반한 집단(즉 씨족)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취락내에 몇개의 소집단이 나뉘어지는 환상취락의 예는 중국의 황하 중류지역 신석기취락에서도 확인된다. 취락의 내부구조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당시의 집단구조를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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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자리와 마을의 구조 자료번호 : edeah.d_0001_0020_004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