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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의 삶

 
 

1. 구석기시대의 삶

 

구석기시대의 생활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에 관한 실체는 아직 대부분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도 긴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역사를 단시간에 전부 파악하기에는 오늘날의 우리가 겪은 경험은 일천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과거의 삶은 복원하기에 시간적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과학이 발달하며 여러 측정 방법이나 연구 방법이 함께 개발되어 이전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새로운 사실들을 과학적 자료와 함께 검증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가 겪은 경험의 99%가 구석기시대인데 그 이후 아주 적은 시간 동안 우리의 삶은 우주로의 확장을 계획하고 일부 실천하고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근본은 처음과 같이 먹고, 마시고, 자며, 여가와 일을 적당히 섞어 행하고 있다.
구석기시대의 삶은 기본적으론 오늘날의 삶과 동일하다. 말을 바꿔 얘기하면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 공통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실질적인 예를 들면, 후기 구석기시대의 석기를 만드는 돌감 중에 흑요석을 즐겨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흑요석위키백과문화유산DB(일본)은 화산이 폭발한 화구 주변으로 산지가 제한되어 있기에 아무 곳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간단한 돌감이 아닌데, 이 돌감을 얻기 위해 1,000㎞가 넘는 거리를 생활반경으로 하는 삶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물론, 직접 가지러 가기도 하지만, 중간에서 물물교환 등의 방법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 또한 동물의 뼈를 통해서도 경제행위를 알 수 있는데, 지역적으로 한정적인 동물의 서식지역을 살펴보아 그 범위가 서식범위를 벗어난 경우를 통해서도 인류가 관련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여러 자료를 이용하여 최신 고고학적 발굴사례를 통해 실생활을 복원해 본다.
전라남도 장흥군 신북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흑요석은 구석기시대의 인류의 이동에 관련된 소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적에서 출토된 흑요석이 가깝게는 백두산 지도 에서 멀게는 일본의 홋카이도[北海道] 지도 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이는 가깝게는 900㎞, 멀게는 2,000㎞ 떨어진 곳에서 일부러 석기를 만드는 소재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먼거리를 직접 갈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도중에서 물물교환과 같은 방식을 통해 교환이나 증여와 같은 방식을 통한 유물의 이동이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신북 뿐만이 아니라 구석기시대 후기에는 홋카이도산의 흑요이 시베리아 내륙 1,000㎞정도 떨어진 유적에서 발견되는 사례가 있는 걸로 보아 그리 특수한 경우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 것일까? 외국의 연구사례를 살펴보면 당시의 물물이동은 통상 150㎞정도의 범위 안에서 석재를 공급받거나 직접 채취하기 위해 이동생활을 하였다. 이동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수렵채집 경제 사회에서는 적어도 한장소에서 모든 행위의 시작과 끝을 찾을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러한 예에서 시작과 끝이 다른 삶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일본의 구석기시대 연구에서는 후기구석기시대의 사람의 이동을 석재와 같은 장소를 알고 있는 유물과 연계시켜 사람의 이동을 복원하였다. 그 결과 구석기시대의 인류는 한 지역 또는 비슷한 범위의 장소를 반복해서 이용하는 일종의 회귀형 생존 전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석기시대의 인류는 되풀이 되는 생활 패턴을 지니고 있었다. 생활의 영역을 넓혀가며 필요에 따라 진로의 연장 선상에서 석재를 획득하는 과정을 넣은 방식을 이용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생활이 운영되었던 시기는 신북유적의 방사성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에 의하면 25500~18500 B.P. 사이에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시기는 빙하기 안에서도 아주 추웠던 시기에 해당된다. 일본 칸토[關東]지방의 경우도 25000~16000 B.P.의 시기에 도쿄[東京] 지도 부근의 유적들이 약 100~200㎞ 떨어진 신슈[信州] 지방을 중점지역으로 하여 석재의 공급과 소비를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연구에 의하면 석재 원산지와 소비지를 연결하는 광역 경제망이 형성되어 일상의 생활속에 원격지를 권역에 넣은 경제활동을 엿볼 수 있다. 일상생활이 이뤄지는 베이스캠프지인 평야지대에선 수렵과 채집에 관련된 생활을 하면서 소비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소모되는 도구의 재생산 등을 포함한 멘테넌스를 하는 도구의 소비가 일어나게 되고, 재생산을 위한 계획속에 석재 산지(産地)를 포함한 산지(山地)로의 이동이 있게 된다.
산지는 평지와는 다른 동물상과 식물상이 있는 지역으로 현존하는 수렵채집민의 생활 속에서도 특별한 계획에 의한 계절적 또는 특수목적을 위한 공간에 해당된다. 이러한 양상은 현생 수렵채집민의 성스러운 장소라는 인식을 통해서 신성시되고 보호되는 행위를 볼 수 있다. 산에서의 생활은 임시적이며 계절적이기 때문에 단조로운 제한된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오늘날 산지에서 볼 수 있는 많은 구석기시대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단조로운 모습이 평지의 대규모 유적과 차이를 보이는 점도 역시 그러한 연유에서이다.
구석기시대에 살던 인류가 즐겨 찾던 장소로는 물가를 들 수 있다. 물 없인 살 수 없기에 상시 물의 보급을 염두에 둔 생활거점의 설정이 필수이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발견되는 대부분의 유적이 강이나 냇가와 같이 물을 끼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굳이 얘기 하자면 친수생활이라 할 수 있겠다. 물가 생활은 내수면과 해수면으로 권역을 나눌 수 있으며 생활내용 또한 수렵과 어로로 나눠진다.
어로는 인류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경제행위 중에 하나이다. 가장 일찍 완성된 어로의 형태는 최근의 발달된 어로기술에도 기본적 도구는 같다. 낚시에 사용되는 바늘은 이전에는 동물의 뼈나 조개 등을 이용해 만들었으며 기본적 구조와 원리가 동일하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낚시군의 실력만을 가지고 논한다면 과거의 인류가 더 뛰어났을 것이다.
인류는 ‘Out of Africa’를 실천하는 순간부터 바다를 염두에 둔 생활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어지는 발걸음은 계속되었다. 초기인류는 이동을 위한 ‘1번 국도’로 동쪽으로 뻐어난 길을 선택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서쪽으로의 길은 아프리카대륙을 남북으로 가른 대지구대에 의해 장벽이 솟아있었으며 서쪽은 아직도 포식자들의 세상이며 어두운 정글이 전개되었던 거친 세계였다. 즉 초기인류의 먼 친척인 침팬지를 포함한 영장류의 세상이었다. 또한 운 좋게 이동을 감행한다 하더라도 대서양이 기다리는 막힌 지역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동쪽은 이어진 대륙으로의 길이 해안선을 이용하면 끝없이 동쪽으로 뻗어 갈 수 있었다. 해안선은 산을 넘어야 하는 내륙 코스보다 훨씬 편하게 이동을 할 수 있는 동선을 그을 수 있었다. 특히 이동하면서도 목적지에 대한 시야가 확보되며 먹거리를 비교적 손쉽게 해안가에서 획득할 수가 있었다. 조개 채취나 물고기 또는 해초류를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었던 점은 유단조직(band)으로 정의되는 집단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해안선을 이동 루트로 이용하는 데는 또 하나의 장점이 있었는데 살아 가는데 필요한 염분의 획득을 쉽게 할 수 있었다는 잇점이 있었다. 자연계의 모든 생물들은 거의 예외 없이 염분을 흡수하려 노력 한다. 일부러 먼 곳의 염분을 찾아 길을 떠나기도 하고 부족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염분 확보를 염두에 둔 이동 생활을 주기적으로 행하기도 한다.
이렇듯 인류는 산에서의 생활과 바닷가에서의 생활 그리고 강가에서의 생활 등으로 각각의 지역에 맞는 생활을 전략적으로 선택해 삶을 유지해 왔다. 구석기시대의 인류는 지역적인 상황에 맞춘 맞춤형 생활양식이 이뤄졌으며 이로 인해 인류는 점차 지역성을 지니게 된다. 지역성은 고고학적인 자료로는 후기구석기시대인 3만 년 정도에 이르러 극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는 장소에서 가장 필요한 도구를 가까운 거리에 사는 또 다른 집단을 포함하여 효율적인 도구 조합을 만들게 된다. 이러한 도구 조합은 형식학적인 면에서 뚜렷해지는데 광역적인 요소와 국지적인 요소로 크게 나눌 수 있게 된다.
광역적인 요소로는 슴베찌르개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아라야형새기개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좀돌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날몸돌을 들 수 있다. 그 중에 후기구석기시대의 전형적인 수렵구라 할 수 있는 슴베찌르개를 살펴보기로 하자. 물론 학자 들 중에는 수렵구가 아닌 가공구로서 만능도구로써 인식하는 경우도 있지만 끝이 뾰족한 그 모습은 관통을 염두에 둔 도구라는 생각을 먼저 가지게 한다. 슴베찌르개는 한반도 남부를 기점으로 남쪽으로는 일본의 남쪽에 있는 큐슈도[九州島]와 북쪽으로는 러시아의 우스티노프카(Ustinofuka)에 한점 정도 존재하는데 현재까지의 출토 상황을 살펴보면 그 중심은 한반도 남부에 있음이 유력하다.
기술적인 면을 살펴보면 긴방향떼기라는 방식으로 너비에 비해 길이가 긴 격지 또는 돌날을 이용한다는 소재 이용에 있어서 규약이 있다. 이러한 기술적 제약은 지역적 범주 안에서 강하게 작용하게 되는데 오늘날의 공업규격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며 기술력의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준비된 소재를 이용하여 모양을 다듬어 가는 2차 가공을 실시하게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요소가 나타나게 된다. 날을 다듬고 모양을 만드는데 필요한 타격을 배면에서 등면 방향으로 한쪽 방향으로만 실시하게 된다. 수 많은 슴베찌르개가 있지만 이특징을 벗어난 슴베찌르개는 단 한점도 없다. 아니 이렇게 만들지 않으면 슴베찌르개가 아니라고 분류를 하게 된다. 이밖에도 또다른 특징들이 있으나 세세한 것은 생략하나 이렇게 만들어진 슴베찌르개는 소중하게 여겨지며 그 관리에 세심한 주의를 들이게 된다.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에게 석기는 생계를 이어주는 소중한 도구였다. 따라서 직간접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 기술로 신경을 써 제작을 하였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중요한 석기로 여겨질 경우는 오랜 시간 동안 지니고 다니며 손에 익숙해 지도록 사용하였다. 중요하지 않은 석기일 경우에는 석재의 선택과 가공에 있어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일종의 일회성 사용과 제작을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자를 ‘관리적석기(curated tool)’라 하였으며 후자를 ‘편의적석기(expediant tool)’라고 분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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