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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강도 시중군 장자강 유역의 고구려 무덤떼

7. 자강도 시중군 장자강 유역의 고구려 무덤떼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 심귀리, 연상리, 풍청리 등지에서는 고구려 시기의 돌칸 흙무덤들이 적지 않게 조사 발굴되었다. 이곳에서 조사 발굴된 무덤길이 주검칸의 한쪽에 치우쳐 있는 무덤들을 뽑아 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번호무덤이름무덤내부
평면구성
크기(cm)무덤방향출토유물바닥상태비고
길이너비높이
1심귀리
8호무덤
주검칸270170160서향뚜껑있는 질그릇 1개강자갈을 깔았다
무덤길30070100
2심귀리
10호무덤
주검칸220180110서북향
무덤길
3심귀리
81호무덤
주검칸16011080서남향 모래를 깔았다
무덤길756080
4심귀리
88호무덤
주검칸240120동남향 강돌을 깔았다
무덤길9060
5심귀리
90호무덤
주검칸22012070 모래를 깔았다
무덤길2006060
6로남리 남파동
114호 무덤
주검칸21015040
무덤길220100
7로남리 남파동
119호 무덤
주검칸20713096서남향작은 단지
무덤길2008140
8로남리 남파동
88호 무덤
주검칸234140 강자갈을 깔았다
무덤길20070~100
9풍청리
9호무덤
주검칸2302100서남향도끼날형 활촉
질그릇 1개
무덤길14670~95107
10연상리
1무덤떼 1호무덤
주검칸250225103 강자갈을 깔았다
무덤길
심귀리81호무덤은 무덤벽을 안쪽으로 약간씩 경사지게 쌓아 천장을 궁륭천장형식에 가깝게 만든 무덤이다. 그리고 무덤의 평면짜임새는 주검칸이 길죽한 장방형을 이루고있으며 무덤길은 주검칸의 한쪽벽에 잇대어 거의다 직선으로 길게 뻗어 나갔다.
심귀리90호무덤도 81호무덤과 마찬가지로 주검칸의 한쪽벽이 그대로 이어져 무덤길의 한쪽벽을 이룬 무덤이다. 이 무덤에서는 주검칸과 무덤길의 한쪽 벽면이 직선을 이루지 못하고 곡선에 가깝게 굽어들어 길게 뻗어 나갔으나 의도적으로 각을 지어 주검칸과 무덤길을 구분한 곳은 찾아볼 수 없다. 심귀리90호무덤의 주검칸벽면 축조방식도 81호무덤과 같이 안쪽으로 약간씩 경사져 있다.
심귀리 8호무덤, 88호무덤, 로남리남파동31호무덤, 88호무덤, 119호무덤, 풍청리9호무덤, 연상리1무덤떼 1호무덤들도 위의 무덤들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무덤들이다. 내부구조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면 로남리남파동31호무덤은 무덤 길바닥이 주검칸 바닥보다 높으며 남파동119호무덤, 31호무덤, 88호무덤, 풍청리9호무덤, 심귀리90호무덤들에서는 무덤길이 바깥쪽으로 가면서 점차 좁아지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무덤들은 무덤구조의 측면에서 조금씩 차이나는 부분들이 있으나 주검칸 벽체가 안쪽으로 약간씩 경사져 있다는 측면에서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무덤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자강유역의 외칸무덤들 가운데는 안학궁1호무덤과 같이 무덤길이 주검칸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쳐 달려있고 벽체가 안쪽으로 약간 경사졌으며 평천장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주검칸과 무덤길 연결 부위의 돌을 무덤길 벽면보다 앞으로 돌출시켜 턱을 만들어준 무덤도 있다. 대표적으로 로남리남파동114호무덤을 들 수 있다. 이 무덤은 구조로 보아 위에서 분류한 첫 번째 부류 무덤들의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세 번째 부류 무덤들의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는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로부터 남파동114호무덤은 앞에서 서술한 무덤들보다 약간 발전된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된다.
안학궁1호무덤과 같이 무덤길이 주검칸의 한쪽에 완전히 치우쳐 있는 외칸무덤들에 대한 자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다음의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로, 무덤길이 주검칸의 한쪽에 완전히 치우쳐 있는 외칸무덤들이 어느 한 지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영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알려지는 보편적인 형식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개별적인 매 부류의 무덤들이 전반적인 구조에서는 서로 비슷하나 평면 및 입면 짜임새에서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며 이 차이로 구분되는 네가지 부류의 무덤들은 구조적인 측면에서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네 가지 부류의 외칸무덤들이 축조되어 쓰인 시기는 언제인가? 먼저 무덤길이 완전히 치우쳐 있는 네 가지 부류 무덤들의 연관관계, 구조변천상 선후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고구려 돌칸 흙무덤의 구조변천에서 벽체의 축조상태와 천장짜임새는 비교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위에서 구분한 네 가지 부류의 무덤들 가운데서 첫 번째 부류와 두 번째 부류의 무덤들을 대비하여 볼 때 그 차이는 벽체가 경사져 있는가 아니면 수직으로 곧게 서 있는가, 그리고 천장형식이 평천장인가 고임천장인가 하는 데 있다.
첫 번째 부류의 무덤들은 벽체가 안으로 경사져 있고 평천장이 대부분이며, 두 번째 부류의 무덤들은 벽체가 비교적 곧게 서 있고 고임천장이 일반적이다. 고구려 무덤의 천장구조에서는 평천장이고임천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의 천장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평천장무덤에서는 넙적한 판돌을 외벌로 길게 덮었기 때문에 자체의 중량과 그 위에 덮은 무덤무지의 중압으로 판돌이 꺽어질 위험성이 많다. 그러므로 무덤 위에 흙무지를 높이 올려 쌓을 수 없으며 결국 비가 많이 내리는 경우 빗물이 무덤내부에 침습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와 함께 무덤내부의 벽체를 높이 축조하지 않는 이상 무덤내부의 웅장한 감을 보장할 수 없다. 이로부터 천장부분 판돌의 크기를 줄이고 무게를 많이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무덤천장 맨 윗면의 면적을 줄이는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된다.
고구려 사람들은 평천장의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고 무덤의 내부와 외부를 웅장 화려하게 만들기 위한 방도로서 먼저 벽면을 경사지게 쌓아 평천장의 윗면을 줄였으며 점차 평천장으로부터 평행고임, 삼각고임형식의 천장구조를 창조해내고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평행고임천장, 삼각고임천장, 궁륭천장 등의 천장형식들은 평천장보다 발전된 것이고 상대적으로 늦게 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두 번째 부류의 무덤들이 첫 번째 부류의 무덤들보다 발전된 형태이고 시기적으로 늦은 것이라고 보게 된다.
첫 번째 부류, 두 번째 부류의 무덤들과 세 번째 부류의 무덤들을 대비해 보면 그 차이는 무덤길이 꺽이지 않고 곧게 뻗어 나갔는가, 아니면 꺽이거나 턱을 지어준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무덤길이 꺽이거나 턱을 지어준 세 번째 부류의 무덤들은 첫 번째, 두 번째 부류의 무덤들에 비하여 하나의 구조시설이 더 첨부된 형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무덤구조의 순차적 변천과정에서 볼 때 발전된 양상이며 상대적으로 이후 시기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네 번째 부류의 무덤들도 첫 번째, 두 번째 부류의 무덤구조에 감시설이 결합된 형식의 무덤이다. 이것은 네 번째 부류의 무덤이 첫 번째, 두 번째 부류의 무덤들보다 늦은 시기의 무덤들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세 번째 부류무덤들과 네 번째 부류무덤들만을 대비하여 볼 때 어느 것이 이른 시기의 것인가하는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부류의 무덤들은 무덤길과 벽체구조에서 계승적인 측면이 뚜렷하여 그 시기적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으리라고 보는 것 만큼 세 번째 부류의 무덤형식이 네 번째 부류의 무덤형식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해당하리라고 인정한다.
무덤의 내부 주검칸에 감이 생기는 것은 돌칸흙무덤들 가운데서 남옥리2호무덤이 제일 이르다고 말할 수 있다. 횡혈식의 돌각담무덤인 우산밑3105호무덤에서는 무덤길에 감이 축조되는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들이 알려졌다. 이로부터 네 번째 부류의 외칸무덤들도 그 출현시기를 올려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없지 않다. 무덤들의 선후관계에 근거하여 그 절대연대를 추정해보기로 한다.
위에서 서술한 무덤들의 절대연대를 꼭 찍어 이야기할 수 있는 명백한 기록자료는 알려진 것이 없다. 하지만 고구려 돌칸흙무덤들에 대한 선행연구성과들 특히 국내외 여러 학자들 속에서 비교적 연구가 심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벽화무덤 편년자료들을 기준으로 무덤길이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친 외칸 무덤들의 연대를 밝혀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부류의 무덤에 해당하는 우신리3호무덤은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친 안길을 가진 무덤내부 평면짜임새와 평전정에 가까운 시초형의 고임천장, 벽화색깔이 단순하게 검은색과 자주색 뿐이라는 것 등을 근거로 3세기경에 축조된 무덤으로 인정되고 있다.주 174
각주 174)
1987, 『조선고고연구』2호, 2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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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만보정1368호무덤은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외칸무덤으로서 무덤내부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무덤은 내부 평면구조와 천장형식, 기둥과 도리만을 그린 단순한 벽화내용, 아직 세련되지 못한 벽화형상 수법 등으로 하여 그 상한을 대략 3세기 중엽경으로 보고 있다.주 175
각주 175)
1983, 『고고』4기, 308~314쪽 ; 1980, 『고고학보』2기, 176쪽 ; 『조선고고학전서』중세편 1 (고구려)(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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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리2호무덤도 벽화가 그려져 있는 무덤이다. 이 무덤은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데 나무를 깔아놓은 주검칸 바닥시설과 칠기류가 고조선 유민들이 남긴 문화적 잔재라는 것, 벽화내용과 형상수법이 미숙하다는 것, 무덤내부 평면짜임새가 완전히 치우친 안길로서 이른시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2세기 후반기~3세기에 해당주 176
각주 176)
1987, 『조선고고연구』2호, 22~23쪽 ; 1993, 『조선고고연구』2호, 17~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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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고 간주하고 있다.
벽화무덤인 태성리2호무덤은 네 번째 부류의 외칸무덤이다. 이 무덤의 축조연대는 고구려 돌칸흙무덤의 내부구조에 감시설이 출현하는 시기를 평양 역전벽화무덤, 감신무덤 등의 연대(4세기 전반기)와 결부시켜 3세기 말~4세기 초경주 177
각주 177)
1991, 『조선고고학전서』중세편 1(고구려)(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239쪽 ; 1987, 『조선고고연구』2호, 2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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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편년하고 있다.
이상의 편년자료들에 토대하여 무덤길이 주검칸의 한쪽 벽에 완전히 치우친 외칸무덤들의 연대를 추정하여 보면 네 번째 부류의 무덤들은 그 시기적인 폭을 넓게 잡아 3세기~4세기 전반기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산리2호무덤의 연대 고증에서는 나무각재를 깐 바닥시설과 칠기들이 중요한데 그것을 귀틀무덤 구조의 마지막 잔재로 보고 그 연대를 2세기 후반기~3세기 후반기로 편년한다.
이로부터 만보정1368호무덤, 우산리2호무덤들이 속한 세 번째 부류 외칸무덤들의 연대는 2세기 후반기~3세기경으로 본다. 우산리3호무덤은 같은 형식의 무덤들 가운데서는 비교적 세련된 양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세 번째, 네 번째 부류의 우산리2호무덤, 태성리2호무덤들과의 구조적인 공통성도 인정되는 것만큼 두 번째 부류의 외칸무덤들 가운데서는 좀 늦은 시기의 무덤으로 보게 된다. 즉 두번째 부류 무덤들의 하한을 우산리3호무덤의 축조연대와 일치시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류 무덤들의 상한이 세 번째 부류의 무덤들보다는 늦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 연대를 2세기 중엽~3세기 말경으로 인정한다.
첫 번째 부류의 무덤들은 두 번째, 세 번째 부류의 무덤들보다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것만큼 그 상한을 2세기 초중엽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의 무덤들 가운데서도 비교적 완성된 형태를 가진 만보정1368호무덤의 연대가 3세기 중엽경으로 인정되는 것만큼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의 무덤 형태에 해당하는 첫 번째 부류 무덤들의 하한은 늦어도 3세기 초경으로 보게 된다.
[그림 2] 안학궁2호무덤
안학궁1호무덤은 바로 첫 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무덤이다. 안학궁1호무덤과 구조적으로 공통한 무덤들의 축조연대가 2세기 초중엽~3세기 초경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만큼 안학궁1호무덤의 연대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혹시 이 무덤의 천장부분, 벽체 윗부분이 거의 다 파괴된 것을 이유로 안학궁1호무덤을 고임천장구조를 가진 두 번째 부류의 무덤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 하한연대는 3세기 중엽을 벗어나지 않는다. 즉 안학궁1호무덤의 축조연대는 2세기 초중엽~3세기 초경에 해당하며 아무리 내려 잡아도 3세기 이후로는 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안학궁2호, 3호무덤들의 내부평짜임새를 살펴보기로 한다. 안학궁2호무덤은 무덤길이 주검칸 한쪽벽 가운데 부분에 달려 있는 외칸무덤이다. 이 무덤은 주검칸이 거의 다 정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무덤길은 비교적 좁고 동쪽으로 약간 비뚤어진 것이다. 무덤길에는 바닥이나 양옆 벽체에 턱을 지어준 시설이 존재하지 않으며 바깥쪽으로 뻗어 나가면서 아래위로 혹은 좌우로 꺽여 넓어진 부분이 없다. 안학궁2호무덤의 규모는 주검칸의 길이 240cm, 너비 240cm , 현존높이 85cm이다. 무덤길은 길이 225cm, 너비 90cm, 현존높이 85cm이다. 무덤방향은 서쪽으로 4°정도 치우친 남향이다. 이 무덤의 내부평면 짜임새에서 주목되는 것은 무덤길이 좁고 동쪽으로 약간 삐뚤어져 있다는 것, 꺽여 넓어진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고구려 돌칸흙무덤들에는 무덤길이 가운데에 달려있는 외칸무덤들이 수적으로 매우 많다. 그 중에서 안학궁2호무덤과 같이 무덤길이 꺽이지 않고 직선으로 뻗어나간 무덤들을 뽑아 표로 제시하여보면 다음과 같다.
번호무덤이름무덤내부
평면구성
크기(cm)무덤방향출토유물바닥상태비고
길이너비높이
1식물원
3호무덤
주검칸23322251서남향
무덤길588522
2식물원
7호무덤
주검칸250232 자배기1개
무덤길21089
3식물원
8호무덤
주검칸298233125
무덤길1609384
4식물원
13호무덤
주검칸253209147
무덤길20082131
5룡산리
8호무덤
주검칸330257120남향벽걸이못 1개
무덤길12012466
6강서보림리
소동1무덤떼
5호무덤
주검칸240200~220110
무덤길1007766
7안학동
7호무덤
주검칸20017580서향단지 3개
쇠관못 3개
회벽벽화
무덤길11070
8고산동
20호무덤
주검칸270245100~150남향쇠관못 4개
회다짐
회벽벽화
무덤길220190100~120
9십귀리
150호무덤
주검칸16015080서남향쇠관못13개
인골
무덤길1406060
10로남리남파동
30호무덤
주검칸200165160인골
무덤길16660112
11로남리남파동
140호무덤
주검칸263250219질그릇 1개
무덤길38796100
12로남리남파동
125호무덤
주검칸213160160남향활촉 3개
꺽쇠
쇠갈구리1개
무덤길20694120
13로남리남파동
130호무덤
주검칸250200100
무덤길1245240
14로남리남파동
131호무덤
주검칸237200129
무덤길1948884
15로남리간평
10호무덤
주검칸281237187서향
무덤길2128368
16우산밑
326호무덤
주검칸2.51.8120동남향도기 2개돌을 깔았음
무덤길1005050
17우산밑
2890호무덤
주검칸17011065
무덤길506335
18동대파
217호무덤
주검칸264203193서북향
무덤길167120200
19동대파
365호무덤
주검칸270230200서남향회색도기 1개
유약바른
도기 1개
회벽벽화 흔적
무덤길167100120
20통구
840호무덤
주검칸274250223남향
무덤길150100100
21통구산성밑
234호무덤
주검칸240190170서남향 회벽
무덤길1808080
표에 제시된 무덤들 가운데는 벽면이 비교적 수직으로 곧게 축조되어 있는 무덤형식이 대부분이지만 로남리간평10호무덤과 같이 주검칸 네벽면이 안쪽으로 심히 경사진 무덤들도 있다. 주검칸의 벽면은 안쪽으로 경사지게 하여 천장돌 덮음부분과 면적을 작게 만들려는 시도는 고구려 돌칸흙무덤 축조의 시초단계에서부터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시중군로남리남파동, 간평무덤떼들에는 고구려 이른시기의 돌각담무덤들과 함께 돌칸흙무덤도 적지 않게 분포되어 있다. 이로부터 무덤벽체가 안쪽으로 경사져 있는 무덤들은 무덤벽면이 비교적 곧게 서 있는 무덤들보다 구조변천상 선행한 단계의 무덤형식으로 보게 된다.
무덤길이 주검칸 짧은벽의 중심에 나있는 무덤들 가운데서 벽체가 안쪽으로 기울어진 무덤들은 구조변천의 측면에서 고찰하여 볼 때 무덤길이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쳐 달려있는 외칸무덤 첫 번째 부류와 세 번째 부류무덤들의 구조가 결합된 상태에서 무덤길이 점차 중심으로 옮겨간 형태의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무덤길이 한쪽으로 치우쳐 달려있는 외칸무덤 첫 번째 부류, 세 번째 부류 무덤들이 구조상 무덤길이 중심에 나 있으면서 주검칸 벽면이 경사져 있는 무덤들과 상호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덤길이 중심에 있으면서 주검칸 벽체가 곧게 서 있고 고임형식의 천장구조를 가진 무덤들도 무덤길이 한쪽으로 치우쳐 달려있는 외칸무덤의 두 번째 부류, 세 번째 부류 무덤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덤길이 중심에 있으면서 주검칸 벽제가 안쪽으로 기울어진 무덤들이 점차 벽체가 곧게 서 있고 평행고임, 삼각고임 형식의 천장을 이룬 무덤으로 변하여 갔다고 보는 것은 무덤구조 변천상 크게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무덤들과 무덤길이 치우쳐 달려있는 외칸무덤의 두 번째 부류무덤들과는 무덤길의 위치가 중심에 있는 가 하는 것이 차이날 뿐이다. 이로부터 안학궁2호무덤과 같이 무덤길이 중심에 나있는 무덤들도 평면짜임새나 입면짜임새(벽체, 천장)에서 무덤길이 한쪽으로 치우쳐있는 무덤들과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인정된다.
안학궁2호무덤의 무덤길이 직선 직각으로 규모 정연하게 축조되지 못하고 약간 비뜰어져 있는 점도 무덤길이 치우쳐 달려있는 외칸무덤들 가운데서 무덤길이 밖으로 나가면서 폭이 좁아지며 오무라들거나 삐뚤어진 무덤들과의 연관속에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즉 안학궁2호무덤은 무덤길이 중심에 달려있는 외칸무덤들 가운데서도 완성된 짜임새를 갖춘 늦은 시기의 무덤이 아니라 비교적 선행한 단계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무덤길이 중심에 나있는 무덤들과 치우쳐 달려있는 무덤들과의 시기적 연관성을 보여주는 데서 주목되는 것은 집안 마선구1445호무덤의 내부평면 구조이다. 이 무덤은 무덤길이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쳐 달려있는 무덤2기와 무덤길이 중심에 있는 무덤1기가 하나의 무덤 무지안에 함께 나란히 축조되어 있는 무덤이다. 이것은 이 무덤들이 상호 구조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혹시 3기의 무덤들이 동시에 축조되지 않고 하나씩 차례차례 만들어 졌다고 가정하더라도 무덤길이 치우쳐 달려있는 무덤들과 중심에 달려있는 무덤들의 시기적 차이는 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부터 무덤길이 중심에 달려있는 무덤들은 무덤길이 한쪽으로 치우쳐 달려있는 무덤들과 조상, 시기상 완전히 어긋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상호 밀접히 관련되는 매우 가까운 형식의 무덤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3] 남파동1445호무덤
[그림 4] 안학궁3호무덤
안학궁3호무덤은 무덤길이 주검칸의 한쪽에 완전히 치우쳐있는 무덤2기가 하나의 무덤 무지안에 나란히 축조되어 있는 쌍간무덤이다. 이 무덤도 안학궁1호무덤, 2호무덤들과 마찬가지로 무덤벽체와 천장부분은 거의 다 파괴되어 잘 남아있지 않다. 무덤바닥은 숯을 섞은 진흙을 15cm 정도 다지고 그 위에 다시 10~20cm 정도의 잔돌들을 진흙에 섞어 다져서 깔았다. 벽면은 회미장을 하였다. 안학궁3호무덤의 개별적인 무덤들은 6°서쪽으로 치우친 서남향으로서 방향이 같으나 그 크기는 서로 약간씩 차이가 난다. 개별적인 무덤들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구분주검칸(cm)무덤길(cm)
길이너비높이길이너비높이
동쪽무덤270212452209343
서쪽무덤340128271609543
동쪽무덤과 서쪽무덤은 무덤길이 다 같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 이 두 무덤의 사이는 얼마간 떨어져 있는데 그 간격은 96m이다. 이 두 무덤들은 하나의 무덤 무지안에 나란히 놓여 있으나 크기가 꼭 같지는 않다. 즉 동쪽무덤의 주검칸은 서쪽무덤의 주검칸에 비하여 길이가 짧으나 너비는 훨씬 넓다. 서쪽무덤 주검칸의 폭이 좁고 길이가 상대적으로 긴 것이 안학궁3호무덤의 내부구조에서 특이한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구려무덤들 가운데서 무덤길이 한쪽으로 치우쳐 달려있는 쌍칸무덤들로는 식물원5호무덤, 보림리대동6호무덤, 7호무덤, 18호무덤, 19호무덤, 21호무덤, 심귀리115호무덤, 로남리남파동99호무덤, 127호무덤, 간평27호무덤, 우산밑1758호무덤, 742호무덤, 733호무덤 등을 들 수 있다. 이 무덤들을 무덤내부 평면짜임새에 근거하여 두 무덤의 무덤길들이 한쪽 방향으로 나있는 무덤(안학궁3호무덤, 식물원5호무덤, 보림리 대동21호무덤)과 가운데 부분에 모여있는 무덤(보림리대동19호무덤, 추산리 추동5호무덤, 로남리남파동99호무덤, 96호무덤, 우산밑1758호무덤, 742호무덤)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무덤 사이의 간격이 넓은가 좁은가 구체적으로는 서쪽무덤의 동쪽벽과 동쪽무덤의 서쪽벽(남향인 무덤의 경우)을 공동으로 함께 이용하도록 축조하였는가 아니면 따로따로 만들었는가 하는 데 따라 무덤유형이 나뉘어 진다고 말할 수 있다.
무덤 짜임새의 구체적인 세부에서는 일련의 차이들이 나타나지만, 이 차이들은 무덤유형들의 순차적 변천과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무덤 사이벽을 공동으로 이용한 무덤들에서는 한 무덤무지 안에 있는 두개의 무덤들이 동시에 축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일정한 간격을 사이에 두고 있는 무덤들은 시기적인 차이를 두고 따로따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먼저 만들어진 무덤의 곁에 잇달려 축조된 무덤인것 만큼 그 시간적 차이는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이로부터 한 무덤무지 안에 두개의 무덤들이 축조되어 있는 쌍칸무덤들을 하나의 독자적인 실체로 보고 다른 무덤들과의 구조적인 변천관계, 시기적인 선후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안학궁3호무덤은 치우친 안길을 가지무덤2기가 나란히 축조되어 있는 무덤인데 그 내부의 개별적인 무덤들은 안학궁1호무덤과 평겸짜임새가 거의 같다. 차이가 있다면 안학궁1호무덤은 벽면이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지만 안학궁3호무덤 내부의 개별적인 무덤들은 벽면이 거의 수직으로 축조되어있다는 점이다. 벽면이 수직으로 서 있는 무덤들은 무덤길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외칸무덤들 가운데서 두 번째 부류에 해당하는 것만큼 안학궁3호무덤도 이 부류의 무덤들과 구조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무덤 무지안에 안학궁3호무덤과 같은 형식의 쌍칸 무덤이 나란히 축조되어 있고 바로 그 옆에 안학궁2호무덤과 같은 구조형식의 무덤길이 중심에 있는 외칸무덤1기가 나란히 잇달려 마선구1445호무덤이라고 하는 하나의 큰 무덤을 이루고 있는 것을 통하여 위의 두 무덤형식들이 같은 시기에 서로 함께 쓰였다고 보게 된다.
안학궁2호무덤, 3호무덤들의 내부평면 및 입면 구조에 기초하여 그 절대연대를 살펴보기로 한다. 안학궁2호무덤은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무덤길이 한쪽으로 치우쳐있는 외칸무덤의 두 번째 부류무덤들과 구조상 순차적인 계승관계에 있는 형식의 무덤이다. 이와 함께 안학궁2호무덤의 선행단계라고 말할 수 있는 무덤길이 중심에 있으면서 벽면이 안쪽으로 기울어진 무덤들은 무덤길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외칸무덤의 첫 번째 부류, 세 번째 부류 무덤들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무덤길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외칸무덤의 첫 번째 부류 무덤들은 대체로 3세기 초경까지 존재하였고 두 번째 부류 무덤들은 2세기 후반기~3세기 중엽경에 해당하며 세 번째 부류의 무덤들은 그 연대를 2세기 후반기~3세기경으로 보는 조건에서 안학궁2호무덤은 위의 세 가지 부류 무덤들과 시기적으로 거의 같거나 약간 늦은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즉 2세기 후반기~3세기 말 4세기 초경의 무덤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연대고증은 안학궁2호무덤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고산동20호무덤, 안학동7호무덤들의 연대와 대비해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고산동20호무덤은 벽화의 내용과 무덤 구조형식에 기초하여 만보정1386호무덤, 로산동1호무덤과 비슷한 시기 즉 3세기 중엽경에 축조된 무덤으로 인정되고 있다.주 178
각주 178)
1990, 『조선고고연구』2호,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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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안학동7호무덤에서는 질그릇 3개가 알려졌는데 그 중 회색단지는 아구리가 비교적 해바라지고 목이 약간 긴 단지로서 중강군 토성리유적의 로남리 형질그릇과 형태가 유사하다. 또한 정백동151호무덤, 칠성산96호무덤들에서는 이와 비슷한 목이 약간 긴 질그릇이 알려졌다.주 179
각주 179)
1983, 『압록강, 장자강유역 고구려유적발굴보고』(과학백과사전출판사),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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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안학동7호무덤의 축조연대를 3~4세기경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로부터 우산밑326호무덤, 고산동20호무덤, 안학동7호무덤 등과 비슷한 평면짜임새를 가진 안학궁3호무덤의 연대는 대체로 2세기 후반기~3세기 말 4세기 초경으로 시기를 좀 더 내려잡아 본다고 하여도 4세기까지로 편년된다.
안학궁3호무덤은 무덤길이 치우쳐 있는 외칸무덤의 첫 번째 부류, 두 번째 부류 무덤들과 구조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만큼 그 축조연대의 상한을 2세기 후반기로 보게 된다. 그리고 무덤길이 중심에 있는 외칸무덤과도 같은 시대에 함께 존재하였다고 인정되는 조건에서 그 하한은 3~4세기 초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안학궁3호무덤의 내부 평면짜임새에서 무덤길이 꺽여 넓어지는 현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데로부터 이 무덤의 연대를 너무 늦은 시기까지로 보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안학궁3호무덤의 축조연대는 2세기 후반기~3세기 말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안학궁3호 무덤의 연대를 2세기 중엽~3세기 말경으로 보는 것은 이 무덤과 구조상 비슷한 무덤들 즉 무덤길이 치우쳐 달려 있는 쌍간 무덤들의 연대와 결부시켜 보아도 타당성을 가진다.
시중군로남리간평27호무덤, 남파동96호무덤, 99호무덤, 127호무덤, 강서군보림리대동19호무덤, 21호무덤들은 무덤 내부구조가 정연하게 짜여 있지 못하며 일부 무덤들에는 주검칸 벽면이 안쪽으로 기울어진 것도 있다. 또한 이 무덤들의 가까이에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돌각담무덤들도 함께 분포되어 있다. 이것은 위에서 지적한 무덤들이 돌각담무덤과 돌칸흙무덤이 함께 쓰이던 시기 또는 수혈식의 돌각담무덤으로부터 횡혈식의 돌칸흙무덤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축조된 무덤들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고구려 무덤 구조 변천과정에서 수혈식의 무덤이 횡혈식의 무덤으로 이행한 시기가 2~3세기경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이 무덤들의 축조연대는 대체로 3세기경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안학궁3호무덤의 연대를 2세기 후반기~3세기 말로 규정하는 데 모순되지 않는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안학궁1호무덤, 2호무덤, 3호무덤들은 2세기 중엽~4세기 중엽경에 만들어져 쓰인 무덤 즉 4세기 중엽 이전에 축조된 무덤들이다. 안학궁 아래 문화층에서 알려진 고구려 무덤들 즉 안학궁1호무덤, 2호무덤, 3호무덤들이 4세기 중엽 이전에 축조된 무덤들이라는 것은 그 위에 건설되었을 안학궁이 4세기 말이나 5세기 초경의 건축물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바로 안학궁은 427년에 집안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대성산 남쪽 소문봉 기슭에 건설한 고구려의 왕궁이었다. 고구려는 왕궁성인 안학궁성과 수도 방위성인 대성산성을 중심으로 이곳 대성산 일대에 큰 규모의 도시를 건설하고 중세 동방의 대강국으로, 선진문명국으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제국주의 어용사가들은 지난 시기 개별적인 기와수집품이나 몇 개 얻어가지고 안학궁의 성격과 축조연대를 제멋대로 왜곡하였으며 오늘까지도 그릇된 견해를 집요하게 되풀이하고 있다. 세끼노(關野)는 『조선의 건축과 예술』(1941, 이와나미서점)에서 안학궁은 고구려 말기의 별궁이며 장안성(모란봉과 창광산을 중심으로 6세기 중엽 이후에 건설된 고구려 평양성)보다 뒤늦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였으며 스기야마(杉山)는 고려시기 구체적으로는 고려 인종(1122~1146) 시기의 대화궁일 것이라는 황당한 궤변을 늘어 놓았다.
또한 일부 사가들은 지난 시기의 그릇된 견해를 고집하면서 안학궁터 아래 문화층의 안학궁1호무덤, 2호무덤, 3호무덤들의 축조연대가 5세기 후반기~6세기 전반기에 해당한다고 보고 안학궁은 427년 고구려 평양천도 당시의 왕궁성이 아니라 고구려 말기의 별궁이라고주 180
각주 180)
1995, 『고구려의 력사와 유적』(일문 : 중앙공론사), 218~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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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하고 있다. 이것은 안학궁 유적과 고구려 무덤들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 및 발굴사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일부 문헌기록들과 단편적인 조사자료들에 매달려 깊은 연구가 없이 세운 부당한 견해들이다. 특히 안학궁1호무덤, 2호무덤, 3호무덤의 연대를 6세기까지로 내려본 것은 고구려 돌칸흙무덤의 자체 기원과 구조형식의 합법칙적 변천과정을 완전 무시하고 고구려 문화의 유구성와 독자성, 우수성을 체질적으로 거부하는 비뚤어진 사관에서 나온 결론이다.
제국주의 어용사가들과 그 추종자들은 고구려 돌칸흙무덤이 선행한 고대 조선 주민들의 무덤형식들과의 계승관계 속에서 자체로 기원하여 고구려 영역의 전반적인 지역에서 순차적 과정을 거쳐 발전하여 온 것이 아니라고 보았으며 고구려 돌칸흙무덤의 연원이 후한, 위, 진 시기 요동지역의 벽돌칸무덤, 돌칸무덤들에 있고 그것들이 고구려 무덤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때문에 이들은 고구려 영역 안에서 알려진 무덤들의 구조변천도 여러칸무덤, 감있는 두칸무덤 등의 복잡한 형식으로부터 단순한 외칸무덤으로, 돌가공기술이나 축조수법이 세련된 무덤으로부터 거칠고 서투른 무덤형식으로 변하여 갔다는 논리상 모순되는 억지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한 사고관점의 연장으로 안학궁1호무덤, 2호무덤, 3호무덤의 연대도 과학성와 논리성, 순차성을 떠나 5세기 후반기 6세기경으로 그릇되게 추정한 것이다.
앞에서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안학궁1호무덤, 2호무덤, 3호무덤과 같은 형식의 무덤들은 유형별, 부류별로 어느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넓은 지역에 모두 분포되어 있으며 매 무덤들은 내부구조 변천에서 일정한 순차성을 가지고 차례차례 변화 발전하여 간다. 그리고 돌칸흙무덤의 시초형태도 고구려의 주변지역 변방에서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선행한 수혈식의 돌각담무덤, 돌곽흙무덤들로부터 발생하여 구조적으로 완성되어 나간다. 무덤구조의 합법칙적 변천과정은 안학궁1호무덤, 2호무덤, 3호무덤의 평면짜임새 변화에서도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역사는 부정하거나 왜곡한다고 해서 절대로 달라질 수 없는 객관적인 진리이다. 동방의 강국 고구려의 왕궁성인 안학궁은 명백히 427년 평양천도를 계기로 건설된 것이며 안학궁1호무덤, 2호무덤, 3호무덤들은 안학궁 건축연대의 상한을 과학적으로 해명하여 주는 가치있는 유적이다. 강대한 고구려의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전하여 주는 안학궁 유적의 성격과 연대문제를 과학적으로 보다 깊이 있게 밝히는 것은 북과 남의 역사 고고학자들의 사명이며 응당한 본분이다. 우리는 우리 민족끼리의 이념 아래 서로서로 손잡고 조선민족의 우수한 역사와 문화를 더욱 빛내고 풍부히 함으로써 통일조국건설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할 것이다.

  • 각주 174)
    1987, 『조선고고연구』2호, 2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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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75)
    1983, 『고고』4기, 308~314쪽 ; 1980, 『고고학보』2기, 176쪽 ; 『조선고고학전서』중세편 1 (고구려)(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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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76)
    1987, 『조선고고연구』2호, 22~23쪽 ; 1993, 『조선고고연구』2호, 17~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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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77)
    1991, 『조선고고학전서』중세편 1(고구려)(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239쪽 ; 1987, 『조선고고연구』2호, 2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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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78)
    1990, 『조선고고연구』2호,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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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79)
    1983, 『압록강, 장자강유역 고구려유적발굴보고』(과학백과사전출판사),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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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80)
    1995, 『고구려의 력사와 유적』(일문 : 중앙공론사), 218~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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