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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여닫기 고구려 도판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압록강 북쪽의 혼강(渾江) 유역의 홀본(중국 요녕성 환인)에서 발원하여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기원후 3년에는 국내(중국 길림성 집안)로, 427년에는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최대 전성기 였던 5세기 말 고구려의 영역은 북으로는 중국 길림성 송화강 유역에서 남으로는 금강 유역까지, 서로는 중국 요령성 요하 유역에서 동으로는 두만강 너머 책성 일대까지 이르렸다. 이러한 넓은 영토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였다. 고구려 문화의 특징은 고구려의 옛 수도를 중심으로한 많은 유적과 유물에 잘 드러나 있으며,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국 내의 고구려 도성, 왕릉과 귀족무덤, 그리고 북한 내의 고구려 무덤군(벽화고분 16기 포함) 외에도, 요동 일대에는 고구려 성곽이 잘 남아있다. 역동적이고 실용적인 고구려 문화는 백제, 신라, 가야를 비롯하여 바다 건너 왜(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통일신라와 발해에까지 이어졌다. 한편 고구려는 475년 백제의 수도인 한성(지금의 서울)을 차지하게 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남한에는 임진강, 양주, 한강, 금강 일대에 5〜6세기의 고구려 성곽 유적과 유물이 확인된다. 서울대학교박물관은 한강 유역의 고구려 유적들을 발굴 조사하여 국내 고구려 연구가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바 있다. Koguryo was founded in 37 BC in the Jolbon region (present-day Huanren County, Liaoning Province) which lies north of the Yalu River, and is the first of the Three Kingdoms to have been established. Koguryo moved its capital to Gungnaeseong (present-day Jian, Jilin Province, China) in AD 3, and again to Pyongyang in AD 427. It fell to the Silla-Tang alliance in AD 668. At its zenith, in the late fifth century AD, Koguryo occupied an area which extended to the Songhwa River (Jilin Province, China) to the north, the Geum River (Daejeon, South Korea) to the south, the Liao River (Liaoning Province) to the west, and Russian Primorye to the east. Based on this territorial dominance, Koguryo was able to establish itself as one of the central powers in East Asia. The culture of Koguryo is reflected in the various sites and artifacts which have been found near the ancient capitals of the kingdom. In 2004, the significance of these material remains were acknowledged by UNESCO and the ‘Complex of Koguryo Tombs’ in present-day North Korea, comprised of 16 tombs containing wall paintings, and the ‘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 in present-day China, which includes both royal and elite tombs, as well as capital cities, were added to the list of World Heritage Sites. In addition to these sites, the Koguryo fortresses which are found throughout the Liaoning region are of note. The dynamic and pragmatic culture of Koguryo greatly influenced the cultures of Baekje, Sillaand Gaya. Elements of Koguryo culture also spread into Japan, leaving theirmark on Wa(倭) culture. The influence of Koguryo culture can also be found in the cultures of Unified Silla and Balhae. In AD 475, Koguryo came to occupy Hanseong (present-day Seoul), the capital of Baekje. Koguryo fortress sites and artifacts dating to the fifth to sixth century AD have therefore been identified around the Imjin River, Yangju, the Han River and the Geum River. The Koguryo sites of the Han River area were investigated by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and the excavated material has laid down the foundations for the continued study of Koguryo in South Korea. (translated by Ko Ilhong)고구려 5세기대 영역도

    • 리스트여닫기 홀본(환인) 이미지 고구려의 첫 도읍지였던 홀본(졸본)은 현재 중국의 요령성 환인 지역으로 혼강과 그 지류를 따라 넓은 들판이 펼쳐진 곳이다. 광개토왕릉비에 주몽이 비류곡(혼강) 홀본 서쪽 산 위 에 흘승골성을 쌓아 도읍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37년부터 기원후 3년까지 약40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다. 고구려 도성 체제의 특징은 평상시 사람들이 거주하던 평지성과 외적의 침입과 같은 비상시 방어를 위한 산성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인데, 현재 평지성은 환인댐 건설로 인해 명확하지 않으며 산성으로는 오녀산성이 있다. 이 밖에도 환인지역에는 하고성자 토성을 비롯하여 상고성자 고분군, 고려묘자 고분군 등 고구려 이른 시기의 유적들이 분포해있다.

    • 리스트여닫기 국내 (집안) 이미지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인 국내성은, 압록강 유역에서 가장 넓은 평야가 펼쳐진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왕은 국내의 땅이 기름져 농사를 짓기에 알맞고, 짐승과 물고기가풍부하기 때문에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면 백성의 이익이 크고 전쟁 걱정도 없어지기 때문에 천도하였다고 한다. 기원후 3년에서 427년까지 약 400년 이상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만큼, 많은 고구려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도성유적으로는 평지성으로 국내성이, 방어용 산성으로 환도산성이 있다. 한편, 집안시에는 1960년대만 해도 1만 2천여 기의 고구려 고분이 있었으나, 지금은 도시 개발로 인해 많은 고분들이 훼손되거나 소멸되었다. 2004년 집안의 주요 고구려 유적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지만, 한국인의 접근이 제한된 곳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 리스트여닫기 집안 일대의 고구려 고분 이미지 고구려는 무덤의 나라라고 할 만큼 많은 무덤들이 존재하는데, 돌무지무덤(적석총)과 돌방무덤(봉토석실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집안에 많이 분포하는 돌무지무덤은 말 그대로 돌을 쌓아 올려 만든 것으로, 중국 여러 민족의 무덤과 확연히 구별되는 고구려 고유의 것이다. 기원전부터 압록강을 중심으로 집중 분포하고 있어 고구려의 형성 과정을 잘 보여준다. 돌무지무덤은 처음에는 강돌이나 산자갈로 묘단을 만들고,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한 다음 돌을 덮었다. 이러한 형태는 세월이 흐르면 돌이 흘러내리면서 둥그런 형태가 된다. 이후 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덤의 가장자리를 다듬은 돌로 쌓아 기단을 만들게 되었고, 이후 여러 층으로 된 계단식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태왕릉이나 장군총과 같은 거대한 계단식돌방돌무지무덤은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릴 정도로 외형과 규모에서 당시 고구려의 위용 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리스트여닫기 평양 이미지 평양은 고구려의 세 번째 수도였던 곳으로, 장수왕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평지성으로는 안학궁 또는 청암리토성을, 방어용 산성으로는 대성산성을 쌓았다. 그러나 6세기 후반 주변 정세가 어렵게 되자, 고구려는 586년 현재의 평양 시내에 있는 장안성(평양성)으로 재천도하게 된다. 현재 평양에는 청암리 토성과 고방산성, 금강사지, 청호리사지, 상오리사지 및 동명왕릉과 진파리고분군 등 많은 고구려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 리스트여닫기 북한지역의 고구려 벽화고분 이미지 고구려에서는 현재까지 약90여 기의 벽화가 그려진 무덤들이 확인되었다(평양 및 인근 72기 이상, 환인 및 집안 22기 이상). 고구려의 무덤벽화는 주로 돌방무덤에서 확인되지만, 간혹 돌방돌무지무덤에서도 발견되기도 한다. 벽화의 내용은 초기에는 주로 무덤 주인의 생활을 표현한 사실적인 그림에서 이후 불교의 영향을 받아 연꽃무늬나 장식무늬 등이 새롭게 등장하며, 마지막으로는 도교의 영향이 가미되어 극락왕생의 불교 사상과 도교의 장생불사의 신선 사상이 혼합되면서 사신도와 같은 상징적 그림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벽화가 그려진 돌방무덤의 경우 그 가치를 인정받아 상당수가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 리스트여닫기 고구려 성곽 이미지 고구려는 성곽의 나라라고 지칭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성들이 존재한다. 현재 중국에만 200여 개에 이르는 고구려 산성이 남아 있으며, 이번 전시에 소개하는 요동 일대의 고구려 성곽은 1,3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견고하게 잘 남아있는 곳이 많다. 북한에도 고구려 성이 많으나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남한 지역에 존재하는 성곽은 규모가 작은 보루가 대부분이며, 분포 영역별로 보면 임진강 일대, 양주 분지 일대, 한강 일대, 금강 일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남한 고구려 성곽의 경우 초반에는 목책을 이용하여 임시로 성곽을 축조하였고, 이후 돌을 이용하여 석성을 쌓았음이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돌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는 고구려의 축성기술은 백제와 신라에 영향을 주었다. 한편, 고구려 산성은 당시 주요 교통로에 쌓은 것들이 많은데, 이는 고구려의 전투 방식 및 지배양상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적들이 고구려의 산성을 공격하지 않고 진군할 수는 있으나, 군대 후미의 보급이 차단될 우려가 있어서 산성을 점령하지 않고는 지나갈 수가 없었다. 또한 산성은 특성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적의 동태 파악이 용이하고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방어하기 쉽고, 또한 대형 산성의 경우 계곡을 끼고 있기 때문에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이 오랜 기간 동안 머무를 수 있어, 적은 병력으로도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방어체계는 6세기 후반 네 차례에 걸친 수나라 대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리스트여닫기 발해 도판 발해는 698년에 고구려 장수였던 대조영(大祚榮)에 의해 건국되어, 통일신라와 남북국을 이루다가 926년에 멸망했다. 처음에는 ‘진국(振國, 震國)’이라 했으나, 713년에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은 뒤로부터 ‘발해’란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발해의 역사는 818년 선왕(宣王)의 즉위를 경계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전기에는 2대 무왕(武王)의 대외정복과 3대 문왕(文王) 의 문물제도 정비가 두드러지나 그 뒤에는 내분기를 겪었다. 후기에 들어 왕권을 재차 강화하여 중흥과 융성을 맞이하면서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이란 영예의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10세기 초에 쇠퇴에 접어든 데다가 거란의 침략을 받아서 멸망했고, 일부 유민은 고려로 들어왔다. 영역은 현재의 만주 동 · 중부와 연해주 남부, 북한 일대에 걸쳐 있었으며, 전성기에는 사방 5천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체로 통일신라의 4~5배, 고구려의 1.5~2배정도 크기였다. 가장 오랜 기간 수도였던 상경(上京)을 포함한 5경(京)지역이 있었던 만주 동부지역이 정치적 · 문화적 중심지를 이루었다. 지배층은 고(高)씨를 위시한 고구려계 인물이 주축이었고 피지배층은 말갈족(靺鞨族)이 다수였다. 대외적으로는 당나라에 가장 활발히 왕래했고 일본, 신라, 중앙아시아 지역과도 자주 교류했다. 이에 따라 발해문화에는 고구려와 말갈 및 당나라의 요소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고, 그 밖의 지역에서 유입된 것들이나 발해 독자적인 요소도 발견된다. 발해사는 지리적으로 한 · 중 · 러에 걸쳐 있었기에 한국에서 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자국사로 연구하고 있으며, 여기에 일본도 동참하고 있으니, 한국사에서 가장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어 있는 분야이다. 문헌 기록의 부족을 고고학 연구로 메우고 있지만, 아직은 자국적 관점에서 연구함으로써 정보의 교류는 활발하지 못하다. 국내에서는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발해 유물을 유일하게 소장하고 있다. Balhae was established in AD 698 by Dae Jo-yeong, a former Koguryo general. Its territory included the northern regions of the Korean peninsula, with Unified Silla occupying the southern regions. Therefore, this period from the late seventh century to AD 926, whenBalhae fell to the Khitans, is at times referred to as the ‘North-South States Period’. When first established, the kingdom was called ‘Jin’, but it was renamed ‘Balhae’ in 713, following the Tang Dynasty’s formal acknowledgement of its legitimacy. Balhae history can be divided into the ‘Early’ and ‘Late’ periods; the latter refers to the period following the coronation of King Seon in AD 818. The Early period witnessed, in particular, territorial expansion by the second king Mu and the consolidation of administrative and military systems by the third king Mun, but internal conflict, soon followed. The strengthening of royal authority which took place in the Late period brought about a new phase of restoration and prosperity which led the Tang Dynasty to refer to Balhae as ‘Haedong Seongguk(海東盛國)’, which means ‘the flourishing country that lies east of the sea’. Balhae fell into decline, however, in the late tenth century and Khitan invasions ultimately led to its demise. Of the Balhae refugees, some fled southwards and became subjects of the Goryeo kingdom. Balhae territory covered the eastern and central regions of present-day Manchuria, the southern part of the Russian Primorye region and the nor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It is said that at its zenith, Balhae occupied an area of around five thousand ‘li’, (approximately 3,853,000 square kilometers), which is 4〜5 times greater than the territory of Unified Silla, and 1.5〜 2 times greater than that of Koguryo. The eastern region of Manchuria, where its five capitals, including the supreme capital Sanggyeong, were located may be regarded as the political and cultural center of Balhae. The Balhae ruling elite consisted mainly of Koguryo descendants with the family name of Ko(高), while the majority of the underclass were of Malgal(Mohe) descent. Balhae maintained active foreign relations with the Tang Dynasty, as well as with Japan, Unified Silla and Central Asia. Balhae culture therefore contains strong influences from Koguryo, Malgal and Tang, in addition to elements from other regions, as well as cultural traits which are distinctive to Balhae. The Balhae kingdom was spread out over an area which overlaps the present-day boundaries of Korea, China and Russia, and therefore the history of Balhae is regarded as ‘national history’ by these countries. As Balhae history has also attracted the attention of Japanese scholars, it can be said that Balhae representsa part of Korean history which is subject to great international interest. Due to the lack of written records, archaeological material has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reconstructing Balhae history. The issue of nationalism which surrounds the study of Balhae remains, however, has hindered the exchange of information between researchers. Seoul National University is currently the only institution in South Korea to have a collection of Balhae artifacts. (translated by Ko Ilhong) 발해 9세기 영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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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