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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의 서거에 대한 각국 사절의 애도 표시 및 조선 외교 관계에 대한 하여장(何如璋)의 문서

1. 慈安皇太后의 서거에 대해 각 개항지 商民및 각국 사절이 모두 애도를 표시하고 있습니다(慈安皇太后之喪, 各口商民及各國使領均表哀悼). 2. 조선 君臣들은 몹시 외교관계의 개선을 원하지만 민간에서는 이견이 아주 심합니다(朝鮮君臣極願外交, 惟民間甚有異議).

 
  • 발신자何如璋
  • 수신자總理衙門
  • 날짜1881년 4월 23일 (음) , 1881년 5월 20일
  • 문서번호2-1-1-23 (361, 504a-505b)
4월 23일, 出使日本大臣何如璋등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왔다.

지난 달 28일 제125호 서신을 삼가 올렸으니, 이미 받아보셨을 줄 압니다. 이번 달 1일, 3월 11일에 발송하신 경비의 會計報告처리, 수행원 표창 등에 관한 문서 4건, [주001]
번역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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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12) 문서번호:2-1-1-12(345, 451a-453b), (14) 문서번호:2-1-1-14(349, 456a-458a)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本字 제53호 總理衙門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공경히 읽어보고는 모두 확인하였습니다.
이번 大行慈安皇太后 [주002]
번역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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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 1837~1881)는 뉴호록(鈕祜祿) 씨(氏) 출신으로 만주양황기인(滿洲鑲黃旗人)이며, 함풍제(鹹豐帝)의 황후였다. 1852년 입궁하여 10월에 황후가 됐지만, 1861년 함풍제가 사망하자, 모후황태후(母后皇太后) 또는 동태후(東太后)가 되었다.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이 일으킨 신유정변(辛酉政變)으로 자희태후(慈禧太后, 西太后)와 함께 동치체(同治帝)를 위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1875년 동치제가 사망하자 다시 순친왕(醇親王)의 아들 재첨(載湉)을 광서제(光緒帝)로 삼아 황제의 뒤를 잇게 하였으며 양궁태후(兩宮太后)는 다시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그러다가 1881년 4월 자안황태후는 갑작스레 사망하였다. 원문의 대행(大行)은 방금 사망하여 아직 시호(諡號)가 정해지지 않은 황제나 황후를 가리킬 때 쓰는 용어이다.

大喪에 대해 橫濱·神戶[고베]·長崎등의 理事官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는데, “슬픈 소식이 도착하자 모든 우리 商民은 한 목소리로 애도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紳董들은 모두 상복을 입었고, 각 상점에서는 모두 비단장식을 제거하였습니다. 典制와 관계되는 일이라 모두 삼가 따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해외 거주 백성의 마음 또한 매우 충성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 항의 영사 및 외국 군함도 모두 20일부터 3일 동안 국기를 절반쯤 내릴 예정입니다. 이 기간에 각 장관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조문을 왔습니다. 외무성 관원은 서기관 이상이 모두 왔고 전 중국주재 공사 伊達宗城[다테 무네나리] [주003]
번역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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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 1818~1892)는 막부 말기의 다이묘(大名) 출신으로 메이지유신기의 정치가이기도 하다. 1871년 중국에 파견되어 중일수호조규(中日修好條規)를 체결하였다.

는 현재 파직되었지만 찾아왔습니다. 다만 宍戶[시시도] [주004]
번역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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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도 다시키(宍戶璣, 1829~1901)는 죠슈(長州) 번 번사(藩士) 출신 정치가로 1879년 주중국 공사가 되어 琉球문제를 둘러싸고 청조 측과 여러 차례의 교섭을 가진 다음 1881년 귀국하였다.

공사는 방문하지 않아 크게 결례를 범했는데, 혹자는 그가 중국에서 귀국한 후 비난을 많이 받아 매우 상심한 나머지 지금까지도 출입을 삼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들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으니 이러한 말들은 아마도 믿을 만한 것 같습니다. 外務卿井上馨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이달 중순이면 휴가가 끝납니다. 조선의 君相은 외교를 몹시 원하지만 다만 백성들 중에는 다른 의견이 분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달 安東進士李應接등이 지방의 老儒수백 명을 이끌고 대궐 앞에서 글을 올리며 외교 금지와 더불어 전에 일본에 간 金宏集및 국왕의 외척 閔泳翔등의 견책을 요청하였습니다. 조선 국왕은 진노하여 처벌하려고 했다가 나중에는 해산하도록 권유하였습니다. 이번에 東京에 온 조선 委員들은 풍속을 관찰하고 정치를 문의하며 다른 일에는 간여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卓挺植이란 사람이 오늘 이곳으로 와서 인사를 올리고는 “조정의 신료 가운데 외교를 원하는 사람은 열에 일곱이지만, 민간에서는 열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金宏集이 제게 보낸 다음과 같은 비밀서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조정의 논의는 약간의 차이만 있지만 민심은 아주 되돌리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당분간은 물론 제대로 진행할 수 없습니다. 古中世로부터 政體의 개혁은 지극히 어려운 시세에 처하였습니다. 하물며 조선은 지금까지 문을 걸고 외국인을 거부해 왔고, 또한 기독교도들을 죽였다가 프랑스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서양인에 대한 원한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통상수호에 관한 논의를 듣고 반대의견이 들끓는 것은 본래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차분히 틈탈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렸다가 시기에 맞추어 움직여야할 따름입니다.
제가 듣기에 국왕과 집정대신이 모두 매우 영명하여 현재 분발하여 힘써 개혁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러시아인들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습니다. 저들이 차츰 방법을 찾아보며 점차 외국 정세를 파악하고, 우리 또한 사안에 따라 권고하면서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으면, 수년 내에 끝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許景澄은 喪禮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고 새로 임명된 黎庶昌89)이 일본에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합니다. 응당 장정에 따라 그가 도착하는 날에 직접 교대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삼가 서신을 보내니 總理衙門에서 검토해주시기 바랍니다. 편안하십시오.
 
별지 : 조선 김홍집이 보낸 서신(朝鮮金宏集來函)
 
첨부문서:鈔單照錄

1. 「日本에 파견되었던 조선의 前修信使金宏集이 보낸 서신」(光緖7년 4월 3일에 도착)
何如璋公使께 올립니다.
卓挺植이 東京에서 돌아와 보내주신 서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것과 같았으니 놀라움과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서신을 보낸 뒤 해가 바뀌었는데, 건강하실 것이라 생각하며 목을 늘어뜨리고 동쪽을 바라보며 힘써 기도해마지 않습니다. 지금 훌륭한 가르침을 받아보니 방대한 분량의 글로 機務를 알려주시면서 속마음을 조금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겸하여 조약 관련 책자들을 다방면으로 구해주신 것은 더욱 기대 밖의 일이었습니다. 즉시 이상의 책들을 저희 조정에 전달하겠습니다. 진심으로 돌봐주시는 마음이 이렇게 보통을 훨씬 넘기시니, 너무나도 감복하며 몸과 마음에 새겨 잊지 않겠지만, 정말 어찌 보답해야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보내주신 하교를 통해 조선의 상황을 분석해보면, 조정 안에서의 논의는 비록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백성의 뜻은 여전히 아직도 돌리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즉각 결정하는 것은 어려울 터인데, 이것은 걱정하는 것이지 감히 훌륭하신 마음을 저버리려는 뜻이 아닙니다. 귀하께서 살펴보시고 본심을 헤아려주신다면 정말 다행이겠습니다. 이에 삼가 감사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辛巳年2월 3일 조선 金宏集이 再拜하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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