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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서양의 각국과 조약 및 통상을 권고하는 이홍장(李鴻章)의 문서

조선의 委員李容肅이 天津을 방문하여 직접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였는데, 이미 조선이 서양과 조약을 맺고 통상을 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朝鮮委員李容肅來津稟謁, 已開導該國與西洋立約通商各事).

 
  • 발신자李鴻章
  • 수신자總理衙門
  • 날짜1881년 2월 3일 (음) , 1881년 3월 2일
  • 문서번호2-1-1-17 (353, 461a-480a)
2월 3일, 北洋大臣李鴻章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내왔다.

정월 29일에 28일 보낸 공문 및 초록 주접 한 건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는) 조선 외교에 긴요한 관계가 있는 사안은 北洋衙門과 出使日本大臣에서 관련 문서를 전달하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상황에 맞추어 적절하게 조치하신 것을 우러러 보면 정말로 헤아려보신 바가 지극히 타당하니, 어찌 이보다 더 경탄스럽겠습니까? 때마침 조선 국왕이 파견한 위원 李容肅 [주001]
번역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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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숙(李容肅, 1818~?)은 자가 경지(敬之)로 조선후기의 역관(譯官)이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정박하자, 역관으로 황주목사를 수행하여 접견하였고, 1876년 4월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를 수행, 20일간 일본에 머물며 일본의 신식기관과 시설을 돌아보고 돌아왔다. 1879년 7월 무비자강(武備自強)을 위한 학도(學徒) 파견을 교섭하기 위해 헌서재자관(憲書賫咨官)으로 청에 파견되어, 이유원(李裕元)의 밀서를 유지개(遊智開)를 통해 이홍장(李鴻章)에게 전달하고, 병기제조와 군사훈련 등 무비자강 문제에 대한 자문과 지원을 요청하여 그 약속을 받아냈다. 1880년에는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宏集)을 수행하여 한 달 동안 동경에 머물었고, 주일청국 공사(駐日淸國公使) 하여장(何如璋)과 6차에 걸쳐 회담하는 데 참여하였다. 1881년 1월 자문 전달관(賫咨官)으로 재차 청에 파견되어 이홍장에게 지원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후 대원군이 청에 납치되어 갈 때 대원군을 수행하였으며, 대원군이 체포되어 천진(天津)에 호송되고, 민비정권에서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조영하(趙寧夏)가 청에 파견될 때도 김홍집과 함께 수행하여, 변원규(卞元圭)와 더불어 대원군을 방문하였다.

이 이번 조공사절을 따라 京師에 왔다가 1월 20일 天津으로 와서 저를 만나 “오로지 武備학습 관련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왔다”고 이야기하면서, 아울러 [조선에 대한 훈시를 요청하는] 『請示節略』 한 부와 原任太師李裕元의 서신을 바쳤습니다. 『節略』에서 나열한 각 조목들을 살펴보니 그 안에는 領議政李最應의 啓本이 있는데, 작년 6월 미국에서 온 사신을 완강하게 거부한 일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자못 후회하고 있으며, 말미에는 “현재의 급무로서 먼 나라 사람들을 회유하여 사직을 편안케 하는 것 만한 일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다른 조항은 또한 훗날 부득이하게 각국과 교류하게 될 때 선후로 그리고 조만간에 취해야 할 대책에 대해 문의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중국이 각국과 수교하고 체결한 通商章程과 稅則을 요청하여 돌아가는 길에 가져가 참고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何如璋의 서신에서 조선 조정의 논의가 점차 깨우치고 있으며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원한다고 한 것이 이미 명확한 증거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만 李裕元의 서신에서는 여전히 외교를 원치 않는다는 뜻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節略』에서 자문을 요청한 사안이 너무 복잡하여 우선 津海關道鄭藻如등에게 그와 만나 모든 것을 물어보고 대체적인 윤곽을 논의해보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곧이어 28일 李容肅을 불러 만나 오랫동안 필담을 나누었습니다. 만일 각국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조약 체결을 의논한다면 당연히 거절하지 않을 것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저희 국왕께서 이미 여기에 뜻을 두고 있고, 조정 신료 가운데도 또한 깨우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미국에서 와서 청할 뜻이 있다면 당연히 이전처럼 완강하게 거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은 외교 상황에 대해 생소한데, 『節略』에서 이미 그 속마음을 털어놓아 “하나하나 깨우쳐 주시고 크게 謀劃해주시기를 원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정말 반드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적절하게 지시하여 잘못된 길에서부터 이끌어내야 할 것입니다. 이전에 서양에서 交涉事務를 학습한 道員馬建忠과 鄭藻如등이 조선을 대신하여 기초한 각국과의 통상장정 초안은 현재 시세와 동·서양 각국의 교섭 통례를 참작하여 미리 이익을 취하고 손실을 방지하는 방책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이 이에 의거하도록 한다면 서양인들에게 속임을 당하는 일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李裕元에게는 이전처럼 답장을 보내 완곡하게 권도하여 더 이상 중간에서 방해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日本國書에 쓸 호칭에 대한 자문문제는 우리 쪽에서 이에 대해 뭐라고 하기 자못 어렵거니와, 또한 조선이 우리를 시험해보는 뜻이 아니라고 보장하기도 어렵습니다. 생각하건대, 서양 각국에서 황제나 왕을 칭하는 일은 본디 한결같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모두 평등하게 서로 교제하는 것이며, 고하경중의 구분은 전혀 없습니다. 조선 국왕은 오랫동안 책봉을 받았으니 그가 일본 및 다른 나라의 국서에 답할 때에는 응당 이전처럼 封號를 사용해야 하며, 이렇게 해서 國政은 비록 그들이 自主로서 행하지만 중국의 屬邦이란 명분은 상실되지 않게 하는 것이 一擧兩得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李容肅이 가져와 올린 『節略』 1부와 저희 쪽에서 조선 자문에 대해 각각 답변한 항목, 조선을 대신하여 입안한 조선과 각국의 통상조약 초안, [朝鮮委員] 李容肅과의 『問答節略』, 李裕元과의 왕래 서신 등 총 6건의 문서를 초록하여 올리오니 밝게 헤아려 검토해 주십시오. 가장 중요한 내용을 발췌해 서술하여 상주하는 것 외에 특별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總理衙門에] 비밀 답장을 드립니다.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별지 : 조선 中樞府知事李容肅이 가져와 올린 『節略』(朝鮮中樞府知事李容肅帶呈節略)
 
첨부문서:抄摺 초록

1. 「조선 中樞府知事 李容肅이 가져와 올린 『節略』」
光緖7년 정월, 武備學習과 관련된 조항에 대해 적절한 안배를 해주셨고, 이에 대한 황상의 비준도 있었기에 온 나라의 군신들이 감동하고 황송함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바로 [武備學習을 위한] 여행 준비를 하느라 당연히 시간이 걸리고 있으므로 감히 이런 연유를 고하여 헤아려 살펴주심에 대비코자 합니다. 대인께서 전후하여 서신으로 가르쳐주신 바는 조선을 위하여 그 우매함을 지적하면서 조선으로 하여금 세계 대세를 알게 해주는 것이 아님이 없으니, 정말 감격해 마지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의 땅은 궁벽지고 사람은 졸렬한데다가 항상 서로 다른 의견으로 갈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전에 수신사가 돌아온 다음 何如璋公使와 나눈 필담, 黃遵憲參贊의 『策略』을 볼 수 있었는데, 구구절절 핵심을 찌르고 있어 조정의 논의가 크게 깨우침을 갖게 되었고, 대신들 가운데에는 앞쪽에 나아가 아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修信使가 何如璋公使에게 서신을 보냈으니, 두세 명의 조정 신료들이 협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여전히 동의하지 않는 持論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선을 걱정하시는 마음이 간절하고 또한 지극하신 데 어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대인의 뜻에 부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하나하나 깨우쳐 주시고 크게 謀劃해주셔서 시종일관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별지 : 부건 1의 부건(附件一之附件):領議政李最應의 啓本(領議政李最應啓本)
 
2-(1). 「領議政李最應 [주002]
번역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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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최응(李最應, 1815~1882)은 자가 양백(良伯), 호는 산향(山響)으로 흥선대원군 하응(昰應)의 형이다. 흥인군(興寅君)에 봉해졌으며, 대원군 정권에서는 요직에 등용되지 못하다가,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한 뒤에 비로소 같은 해 12월 좌의정, 1878년 영의정이 되어 민씨정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1880년 12월 統理機務衙門의 설치로 영의정이 총리대신으로 바뀜에 따라 총리대신이 되었으나, 1881년 유림들의 반대로 사직하고 한직인 영돈녕부사를 지냈다. 1882년 잠시 광주부유수를 지낸 뒤 다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6월 10일 임오군란 때 폭동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의 啓本」
上國公使께서 여러 조목으로 논변하신 바를 보니 저의 心算과 잘 부합하여 한 번 보고 치워버릴 내용으로 삼을 게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방어하는 대책을 실로 저희가 어찌 강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만 公使의 책자 속 논설이 이처럼 상세하고 주도면밀한데다가 이를 조선에 건네주었으니 깊은 소견이 있어 그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본디 그 권고를 채용할 수도 있는데, 조선 사람들이 반드시 이를 믿지 않을 터이니, 그러면 결국 휴지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또 올해 6월 미국 선박이 東萊에 왔을 때, 그들이 東萊府에 문서를 제출하였다면 東萊府에서 접수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며, 禮曹에 올렸다면 禮曹에서 접수하는 것도 역시 괜찮았습니다. 그렇지만 東萊府使는 스스로 미국을 원수 나라라고 지칭하면서 거절하고 문서를 접수하지 않았으며, 이런 사실이 그대로 신문지를 통해 전파되어 천하의 비웃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먼 나라를 안무하는 의리에서 보자면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조선의 풍습이 본래 이와 같아 매번 번민하고 탄식하는 바입니다.
그렇지만 서양 각국으로 보자면 본디 이들과 恩怨이 없었고, 단지 처음에 조선의 간사한 무리들이 이들을 끌어들여 분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대저 서양 선박이 도래하면 사람들은 모두 邪學을 [이를 거절할] 구실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서양인들이 중국에 내왕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까지 중국 사람들이 邪學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른바 ‘邪學’이라면 배척하면 될 뿐이지 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조선 조정의 재상들은 모두가 똑같이 자기 일신과 집안을 편안히 지키려는 것만을 원해, 어느 계책 하나 진언하지 않고 물러나서 뒷공론만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러시아인들이 어느 아침에 도래하게 되면 사람들은 필시 “안으로는 內政을 정비하여 밖으로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고 떠들겠지만, 이는 하루아침, 하루저녁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무기나 재정이 다른 나라의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니, 현재의 급무는 먼 나라 사람들을 안무하여 사직을 편안케 하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별지 : 부건 1의 부건(附件一之附件):修信使金宏集이 何如璋에게 보낸 서신(修信使金宏集致何侍講書)
 
2-(2). 「修信使金宏集이 何如璋에게 보낸 서신」
何如璋公使께:
송별한 다음 시간이 흘러 달이 다시 차올랐습니다. 밤낮으로 귀하의 勸言을 생각하다보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엎드려 귀하의 신체가 맑고 왕성하시기를 빌면서, 그 뛰어난 가르침에 대해 손을 이마에 대면서 깊이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張斯桂父子및 黃遵憲·楊樞 두 분께서는 모든 몸가짐이 차분하고 온화하셨는데, 다시 그리워집니다.
저는 지난 달 말 부산에 머물렀다가 28일 復命하였습니다. 나라와 관련된 모든 일이 上國의 보호에 의지해 순조롭고 평온하여 맡은 직무에 위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번 외람되이 왕복하면서 귀하의 성대한 보살핌을 두텁게 받았으니, 中國이 작은 나라를 어여삐 여기는 은혜를 체현해주시면서, 제가 우매하다고 생각지 않고 이끌어 가르쳐주시고 안팎의 時事를 남김없이 알려주셨습니다. 또한 黃遵憲公께서 주신 『朝鮮策略』 한 권은 조선을 대신해 계획하심에 마음과 힘을 다하셨기에 돌아와 삼가 이미 국왕께 하나하나 보고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이구동성으로 탄복하면서 크나큰 은덕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비록 현재의 여론이 아직은 “통하여 깨우쳤다”고 할 수는 없으나, 특히 이전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조선의 법도는 지금껏 서투르고 껄끄러웠습니다. 하물며 또한 근심·걱정으로 동요하며, 사건이 닥치면 아예 멍해져서 아무런 계책도 내놓지 못합니다. 지금 감히 서신을 올려 알리오니, 조선의 우매함을 가엽게 여기시고 그 성의를 살펴 다시금 큰 가르침을 내려주신다면 조정에서는 이를 신령의 지시처럼 받들고 이를 통해 의심을 풀어 한결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로지 귀하께서 결정해주시면 됩니다. 짧은 글로써 저의 긴 생각을 모두 드러낼 수는 없었으니, 전체적으로 두루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003]
번역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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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앞의 (12) 문서번호:2-1-1-12(345, 451a-453b)에 실린 첨부문서 1. 「日本公使何如璋이 前修信使 金宏集에게 받은 서신」과 같은 내용이다. 여기서는 다음 구절부터 후반부가 시작되어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은 지금 일본에 개항하여 통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평소에 통상규칙에 어두워 기만과 억압을 당할까 두렵습니다. 君民상하 모두 중국 상인을 여러 개항장으로 불러들여 서로 교역하게 하는 것을 바라는데, 이렇게 되면 의기투합하여 서로 의뢰함이 반드시 커질 것입니다. 또 黃參贊의 『策略』에 “鳳凰廳무역을 확대하여 중국 상인들이 배를 타고 개항한 각 항구로 와서 통상하게 함으로써 일본인들의 독점을 막아야 한다고 奏請한다”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이 논의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사오니, 삼가 엎드려 밝은 가르침을 기다렸다가 咨文을 갖추어 청하겠습니다. 그리고 문서의 주체는 어떻게 표기해야 타당할지에 대해서도 아울러 훈시를 바랍니다.
조선이 훗날 부득이하게 각국과 교류하게 될 때 자주·자강으로 利權을 우리가 장악하여 타국의 강요를 받지 않고 선후로 조만간 취해야 할 대책에 대해서도 감히 여쭙겠습니다. 조선의 부산·원산, 두 항구의 關稅설정에 대해서는 이미 대인의 훈시를 받아 감히 성급하게 의논하여 결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말하기를, 全權委任이 아니면 이 문제를 논의하여 결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만일 全權委員이 와서 몇 %를 거둘지 논의하게 되면 응당 지도해 주신 바에 따라 기회를 봐서 도모하겠습니다. 北洋大臣衙門에 보내는 咨文형식은 禮部에 보내는 咨文형식에 따라 흡사하게 작성해 올리되, 안쪽에는 北洋督署大臣이라 쓰고 바깥쪽에도 동일하게 써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이 각국과 수교하고 체결한 通商章程과 稅則·稅額條例, 稅關官制의 凡例에 대해서는 엎드려 생각하건대 이미 간행된 문서가 있을 터이니 각각 1건씩을 하사해 주시면 삼가 가지고 돌아가 참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엎드려 살펴보니 禮部咨文 가운데 “委員, 하급 무관·병사, 學徒, 通事는 北洋大臣衙門에서 빈 통행증을 발급하여 조선에 교부하고, 조선에서 이름을 기입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빈 통행증은 이번에 가지고 돌아가 필요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십시오. 또한 엎드려 살피건대 “학습할 사람들이 왕래할 때 이미 곧장 해로를 이용하면 스스로 편리하고 빠를 것”이라는 하교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기선을 빌려 타면 순조롭게 바다를 건널 수 있을 터인데, 마땅히 어디에서 배를 빌려야 문제가 없고, 또한 공문을 주셔야 의문이 생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조선 선박은 본디 깃발 표시[旗標]가 없어, 현재 만들기 위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黃參贊은 중국의 龍旗를 그대로 받아쓰겠다고 奏請하라고 하였습니다. 감히 여쭙건대, 중국 선박의 깃발은 무늬가 어떻고, 조선은 어떤 색깔과 무늬를 써야 타당하겠습니까?
제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일본사신 花房義質이 國書를 가져왔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조정에서는 조약 내용 중에 일찍이 “우리 禮曹와 일본 外務省은 書契로 왕래한다”는 조항만 있을 뿐 國書로 왕래한다는 조항이 없는데 지금에 와서 어찌 갑자기 조약을 바꿀 수 있는가 하면서 이것으로 그를 責難하였습니다. 그는 “현재 辨理公使로 승임하였기에 외무성 문서를 지참할 수 없고, 또 각국 모두 國書교환이 있은 다음에야 더욱 친목을 다질 수 있다”고 하면서, 힘을 다해 간청해마지 않았습니다. 국왕께서는 특별히 이웃나라와의 우의를 고려하여 便殿에 친히 임하시어 저들 사신을 불러 접견하고 國書를 접수하였습니다. 國書에서 “공손히 알린다[敬白]”는 구절은 자못 공손하고 오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皇帝’와 ‘朕’을 칭하는 글자는 몹시 눈에 매우 거슬려 상하 모두가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또 國書에서 요청한 公使의 주재는 가장 응하여 따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한 인천 개항 역시 가볍게 허락할 수 없습니다. 조정의 의견은 인천 개항은 억지로 허락하는 것으로 몇 년 시간을 끌자는 것이었고, 주재문제는 인천 개항으로 미봉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따를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國書에 답하지 않을 수 없으나 저들을 ‘帝’라고 칭하는 일은 실로 원하지 않는 바입니다. 우리 쪽의 호칭에 대해서도 또한 참고할 만한 전례가 없으니, 國書를 주고받을 때 어떻게 골라써야 國體를 손상시키지 않고 각국의 비웃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의 바람은 또한 전담 인원을 통한 회답에 있는데, 저희 능력이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청할 때마다 들어준다면 어찌 손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대인께서는 이미 도탑게 마음을 쓰시고 한 집안처럼 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감히 저들의 國書와 口奏내용을 베껴서 올리오니, 굽어보시고 좋은 방책을 내려주시어 동쪽 울타리인 조선이 나라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별지 : 부건 1의 부건(附件一之附件):日本國書의 漢譯文(日本國書漢譯文)
 
2-(3). 「日本國書漢譯文」
大日本國 大皇帝가 大朝鮮 대왕께 공손히 알립니다.
이전에 양국 사이의 우애를 돈독하게 하고 마땅히 실행해야 할 사무를 상의하기 위해 代理公使 花房義質을 뽑아 파견하였습니다. 花房義質은 귀국과 왕래한 지 이미 몇 년이 된 바, 양국의 우호를 도울 수 있습니다. 朕은 그의 자질을 무겁게 여겨 이에 辨理公使로 승임시키고 귀국 수도에 주재하면서 교섭 관련 사무를 관장시키고자 합니다. 花房義質의 됨됨이는 의지가 돈독하고 기민하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朕은 그가 직임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大王께서 다행히 총애와 관심을 기울이시고 때때로 알현의 기회를 내려 주셔서 朕이 아뢰도록 지시한 바를 잘 알려드림으로써 그 직무를 완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왕께 많은 복이 있기를 빌겠습니다.

神武天皇 卽位紀年 2540年, 明治 13년 11월 8일.
東京 궁중에서 친히 서명하고 옥새를 찍음. 睦仁.
奉勅外務卿正四位勲一等 井上馨이 國書를 封함.
 
별지 : 부건 1의 부건(附件一之附件):花房義質이 國書를 직접 올린 다음의 발언 초록(花房義質面進國書后致詞謄本)
 
2-(4). 「국서를 올린 다음 花房義質의 진술」초록
使臣 花房義質가 공손히 면전에서 아룁니다.
金石과 같은 맹약이 오랫동안 굳건하여 주재사절을 처음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국서를 받들어 삼가 올리오니, 양국 사이의 친목이 더욱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보배로운 國運의 無疆을 송축 드립니다.
 
별지 : 부건 1의 부건(附件一之附件):何如璋이 花房義質에게 넘겨 金宏集에게 보내는 서신(何侍講交花房義質致金宏集書)
 
2-(5). 「何如璋이 花房義質에게 넘겨 金宏集에게 보낸 서신」
道園先生께 부칩니다.
앞서 곧장 일본으로 오실 기회가 있어 곧바른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떠나가면서 귀하께서는 다시금 간절하게 각자가 報國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여 조금이나마 현재의 어려움을 만회하자고 하셨습니다. 『詩經』에 이런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마음 가운데 그것을 묻어두니 언제 잊겠습니까?” [주004]
번역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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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詩經)』 「소아(小雅) 어조지십(魚藻之什)」에 나오는 구절이다(隰桑有阿, 其葉有難, 既見君子, 其樂如何. 隰桑有阿, 其葉有沃, 既見君子, 云何不樂. 隰桑有阿, 其葉有幽, 既見君子, 德音孔膠. 心乎愛矣, 遐不謂矣, 中心藏之, 何日忘之).

국왕의 영험에 우러러 의지하여 海路로 왕래함에 무사히 편안하게 漢城에 도착하셨다니 지극히 위안이 됩니다. 지난번 修信使 일행 [주005]
번역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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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의 대종(臺從)은 가마와 그 수행원을 가리키는데, 아마 修信使일행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일본이 왔을 때, 조선과 일본은 광대뼈와 턱처럼 서로 의지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주006]
번역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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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의 보거(輔車)는 수레 덧방나무와 수레바퀴, 또는 광대뼈와 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서로 밀접한 의존관계를 비유하는 것이다.

일행께서 깃발을 펼치고 입국하면서부터 일본 측에서는 모든 연회와 음식 제공에 넘치는 성의를 보였는데, 이것은 모두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花房義質公使가 귀국으로 향하니 바라건대 성심으로써 접대하여 피차간의 교제가 나날이 조화롭고 화목해지기를 빌겠습니다. 추위가 나날이 거세지고 있는데, 北風을 타고 속히 德音을 전해주시기를 榛苓 [주007]
번역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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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령(榛苓)은 개암나무와 씀바귀를 말하는데, 원전은 『시경(詩經)』 「패풍(邶風) 간혜(簡兮)」에 나온다(“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 賢者가 각기 그 뜻을 얻는 盛世를 빗대는 말로 여겨진다.

의 마음으로 서쪽을 바라보면서 기대하면서 부칩니다. 그럼 이만 줄입니다. 10월 20일.
 
별지 : 조선 委員李容肅과의 『問答節略』(與朝鮮委員李容肅『問答節略』)
 
3. 조선 委員李容肅과의 『問答節略』:(조선 委員李容肅은 鴻臚寺出身으로 陞任郎中이며, 일찍이 中樞府知事를 지냈으나, 지금은 가진 職名이 없다)
[이홍장-이하 동일. 생략] 질문:“(귀하는) 科擧출신입니까?”
[이용숙-이하 동일. 생략] 답변:“漢文科합격자 출신입니다.”
질문:“귀국의 科名에도 擧人·進士·翰林등의 항목이 있습니까?”
답변:“進士科·文科가 있습니다.”
질문:“이번에 오신 것은 오로지 天津에 가서 武備學習을 처리하기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조공사절을 겸한 것입니까? 조공사절이 따로 있다면 어떤 사람들입니까?”
답변:“제가 이번에 온 것은 오로지 명을 받들어 武備學習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기 위함으로, 조공사절단 일행을 따라온 것입니다. 正使는 任應準, 副使는 鄭稷朝, 書狀官은 洪鐘永입니다.”
질문:“종전에 여러 차례 京師에 왔던 것은 무슨 일 때문입니까? 일본에 갔던 것은 또한 무슨 일 때문입니까?”
답변:“혹 조공사절로 파견되었거나 혹은 咨文을 가져온 일이었습니다. 일본에 두 번 갔던 것은 修信使를 따라 갔던 것입니다.”
질문:“金宏集이 일본에서 돌아온 후 또 어떤 사람이 일본에 파견되었습니까? 중국의 何公使를 만난 것은 도대체 무슨 일 때문입니까?”
답변:“작년 金宏集이 돌아온 후 다른 사람을 파견해 보낸 적은 없습니다. 金宏集이 일본에 갔을 때는 國命에 따라 함께 何公使께 가서 인사를 드린 것입니다.”
질문:“우리는 작년 10월에 何公使가 보낸 서신을 받았는데, 거기에서는 귀국이 어떤 사람을 일본에 파견해 보냈고, 그가 『조정의 논의 절략(廷議節略)』을 가져 와서 이를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답변:“국왕께 黃遵憲의 『策略』을 올려서 살펴보셨는데, 이는 작년 金宏集이 가져온 것입니다.”
질문:“黃參贊의 『策略』은 金宏集에게 주어 가지고 돌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이후에 또한 어떤 사람이 일본에 가서 귀국 조정의 논의가 점차 깨우치고 있다는 대략을 알렸는데, 귀하는 그 사람을 압니까?”
답변:“金宏集이 돌아온 후, 何公使께 서신을 보내었는데 거기서 저희 조정의 논의에 대해 대략적으로 언급했습니다. 그 후에 다시 사람이나 서신을 보낸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출발한 이후의 일은 아직 들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감히 그 유무를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질문:“귀하가 보기에 이후 만일 서양 각국에서 사신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약 체결을 논의하려고 한다면 거절할 것인지 어떨지? 나는 단연코 서양인들을 위한 중매자가 될 생각은 아닙니다. 다만 귀국이 여러 차례 거부한다면 혹 말썽이 생길까 우려합니다.”
답변:“저희 임금의 뜻이 이미 여기에 있고, 조정 신료 가운데에도 또한 깨우친 사람이 있으니 만일 미국에서 뜻을 품고 다시 찾아와 요청한다면 아마도 이전처럼 완강히 거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질문:“일본의 花房義質이 현재 서울에 있다고 하는데, 귀국에서는 어떻게 접대하였습니까? 또한 숙소와 식사도 제공하셨습니까?”
답변:“이번 접대에 대해서는 비록 듣지 못하였으나, 이전에 이미 우대하였으므로 이번에도 그때처럼 우대하였을 것입니다.”
질문:“어떻게 우대하였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려주십시오.”
답변:“숙소는 힘써 깨끗하고 화려하게 하였고, 시종 또한 더욱 조심하고 삼가도록 하였으며, 二品官員을 보내 근처에 거주하면서 사안에 따라 세심히 살피도록 하였습니다. 저희 임금께서는 종종 관원을 파견하여 그 안부를 묻고 때때로 혹 음식을 보내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은 여전히 빈곤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고 감히 대답드릴 수는 없습니다.”
질문:“듣자하니 金宏集修信使가 東京에 있을 때 일본의 대접이 매우 주밀했다고 합니다. 花房義質이 서울에 도착하면 실로 응당 그에 상응하는 접대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후 만일 그가 서울에 상주하거나, 혹 서양 각국 공사가 각 개항장에 이르게 될 경우 통례에 따라 모두 단지 관원을 파견하여 응접하면 될 뿐이니 그들을 대신하여 公館이나 식사를 대신 준비할 필요가 없어 쓸데없는 지출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답변:“삼가 (이상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저희 조정에 돌아가 알리고 준수해야 하는 가르침으로 삼겠습니다.”
질문:“귀국의 하급 무관·병사를 天津으로 파견하여 훈련을 받고 있습니까? 卞元圭가 가지고 간 총은 이미 시험해 보았습니까? 이전에 쓰던 조총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답변:“하급 무관·병사가 파견되어 훈련을 받는 것은 咨文에 의거하여 거행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조선은 수백 년 동안 중국의 은덕을 우러러 받은 덕분에 외적의 수모를 받은 일이 없었습니다만,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느슨해지고 게을러져서 군대의 인원 정액은 대부분 비어 있고 재정 또한 대부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어, 지금 바야흐로 이처럼 우물쭈물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줄곧 돌보아주는 관심을 받아 조금이나마 힘에 여유가 생긴다면 그때 가서 다시 훈련을 청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卞元圭가 가져간 총에 대해서는 응당 제가 출발한 이후에 도착하였을 터, 시험 여부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질문:“琉球가 평소 군대와 무기를 준비해 두지 않아 일본이 매우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익히 아실 것입니다. 조선의 군대 정액은 비어있고 무기는 날카롭지 않으니 일본이 지금 조선과 통상을 하면서 반드시 경시하는 바가 많을 것입니다. 만일 또다시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하게 되면 쉽사리 엿볼 기회를 만들어주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財源을 확충하고 武備를 정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가 될 것입니다.”
답변:“훈시해 주신 말씀과 뜻은 또한 마땅히 저희 조정에 돌아가 상세히 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국가 재정은 매년 대략 얼마 정도입니까? 세입은 얼마입니까?”
답변:“國稅로 매년 들어오는 바는 銅錢으로 계산하면 단지 500만 吊에 불과합니다. 지출 이외에 별달리 남는 것이 없습니다. 1만 吊은 단지 중국 制錢1천 文에 해당합니다.”
질문:“세입이 매우 적으니 이처럼 힘든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만일 각국에 개항하여 통상하고 稅則을 다시 정한다면, 세입이 필시 배로 늘 것입니다. 政事가 없으면 재정이 부족하고, 재정이 없으면 사람을 기르기에 부족합니다. 돌아가 귀국 집정에게 고하시어 반드시 시급히 방침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답변:“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질문:“일본인들이 조선에 와서 무역을 할 때에 銀錢을 사용합니까?”
답변:“매번 화물로 교환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혹 銅錢을 주면 그 또한 받기도 하며, 장래의 무역 밑천으로 삼습니다.”
질문:“은의 사용과 매매를 금지하는 법령은 반드시 방법을 마련하여 풀어준다면 유통에 편리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답변:“삼가 또한 돌아가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질문:“가져온 책자는 조정의 뜻입니까, 아니면 집정대신의 뜻입니까?”
답변:“저희 임금의 뜻이며 집정 또한 이미 모두 알고 있습니다.”
질문:“이미 질문한 사안에 대해 하나하나 헤아려 답을 하였고, 아울러 빈 통행증 10장을 넘깁니다. 또한 관원을 보내 조선이 각국과 체결할 通商章程을 대신 기초함으로써, 때가 되었을 때 스스로 참고하여 적절히 처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익을 취하고 손해를 방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점들은 본디 여기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답변:“하사해주신 답변과 빈 통행증 10장은 삼가 모두 가져가 국왕께 올리고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기초해 주신 통상장정도 함께 상세히 알리고 바치겠습니다.”
질문:“原任太師李裕元은 퇴직 이후에도 여전히 조정에 간여합니까? 올해 몇 세입니까? 정력은 강건합니까?”
답변:“李裕元은 퇴직 이후 국사에 간여하지 않습니다만, 자문을 하시면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해 67세로 정력은 여전히 좋습니다.”
질문:“여기에 답장이 있으니 가져가 건네주시기를 바랍니다. 언제 天津에서 출발하십니까? 귀국하신 후 국왕 및 집정대신 모두에게 제 뜻을 대신 전해 주십시오.”
답변:“내려주신 답장은 삼가 마땅히 가지고 돌아가 직접 건네도록 하겠습니다. 출발 일정에 대해 계산해보면 이번 달 2일에 북경으로 출발하여 조공사절과 함께 귀국할 것입니다. 하교하신 뜻 또한 삼가 받들어 준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광서 7년 1월 28일
 
별지 : 조선 原任太師李裕元으로부터 온 서신 및 禮單(朝鮮原任太師李裕元來函, 附禮單)
 
4. 「조선 原任太師李裕元으로부터 온 서신 및 禮單」
李 中堂大人께 올립니다.
올해 12월 초에 내려주신 답신을 받았으니, 이는 9월 28일에 중국에 간 卞元圭가 가지고 온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李 中堂大人의 위엄과 은혜로움은 나날이 융성하여 천하가 仰望하는 바입니다. 또한 조선은 후한 보살핌을 특별히 받아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돌아봐 주셨고, 부르짖음이 있으면 반드시 응해주셨습니다. 비록 따르고 도와주기 어려운 일이라도 위로는 황상께 아뢰어 주셨고 아래로는 조정 논의를 수렴해 주셨으니, 마치 가족을 애호하고 스승이 가르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군사적 문제는 지극히 신중히 다루어야 할 터이지만 하나라도 물어보면 바로 문을 열어 가르침을 주셨고, 정세가 예측할 수 없으면 누차 움직여 대신 조치해 주셨으니, 바다나 숲처럼 넓은 大人의 德量을 누가 敬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조선에서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의지하는 바가 보통의 경우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먼 나라와 교제하지 않으면 大人의 압박이 점점 무거워질 것이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지 않는 것이 大人께서 유지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그러니 어찌 여러 개의 큰 바다 밖에 있는 나라를 기다리고, 어찌 강을 사이에 둔 것처럼 가까운 적을 근심하겠습니까!
생각하건대 大人께서는 절실한 마음으로 돌봐주셔서 미꾸라지처럼 미천한 존재도 오랫동안 멀리 버려두지 않으셨고, 서신을 가져간 관원이 미미함에도 우대하여 접대해 주셨으니, 이를 통해 大人께서 조선을 마치 골육처럼 보시고 그 마음과 정력을 쓰고 계신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실로 소생이 교우를 나눔에 있어 大人께 미치지 못하고, 걱정을 끼쳐 드리는 바가 점점 커져 지극히 죄송함에 후한 용서를 바랄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다만 삼가 말씀드릴 수 있는 바는 국왕께서 각하의 德意에 깊이 감명 받으셔서 소생으로 하여금 공손히 답장을 쓰게 하시고 禮物24종을 보내시니, 역시 받아주시면 정말 이보다 극진한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入學과 관련된 일은 의외로 이와 같이 순조롭게 성사되었으니 본디 마땅히 짧은 시간조차 남기지 말아야 하지만, 준비하노라면 자연히 시간이 걸리는 것이지, 저희가 굼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 사정 때문에 그런 것으로 조금 지나면 더욱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로지 은혜로운 보살핌이 시종일관 두루 드리워지기만을 바랍니다.
신체가 언제나 萬康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소생은 은혜를 입어 퇴직하고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가, 이제부터 여유있게 은거하게 되었습니다만, 감사함은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형언하여 아뢸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에 서신을 써서 조공 사절을 통해 감히 大人께 올립니다.
嘉梧退生 李裕元 올림. 庚辰年 11월 11일.

禮單:
『논어』 한 질, 『맹자』 한 질, 『중용』 한 질, 『대학』 한 질, 『시전』 한 질, 『서전』 한 질, 『주역』 한 질, 『춘추』 한 질, 頂上山參 네 뿌리, 鹿茸 두 쌍, 上上製 山稏淸新元 1백 개, 苔紙 20권. 총 12종.
 
별지 : 조선 原任太師李裕元에게 보내는 답신(覆朝鮮致任太師李裕元函)
 
5. 「조선 致任太師李裕元에게 보내는 답신」
致任太師李裕元께 보냅니다.
근자에 李容肅군이 天津에 도착하여 작년 겨울 11월 11일에 보내신 서신을 받아 펼쳐 보았습니다. 칭찬으로 지나치게 장식하여 오로지 부끄러움이 늘어날 뿐입니다. 12종의 예물을 후하게 보내주셨는데 글의 감정과 문채는 촘촘하게 포개져 있으며, 서적은 특히 깨끗하고 정성스러워 그 아름다움이 눈을 가득 채우니, 주신 것을 받으면서 송구함과 감사함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근래 듣기로는 행복하시고 건강하고 유쾌하게 山水에서 은거하신다고 하는데, 원대한 계획을 알려주시면서 시세의 어려움을 널리 구하고자 하시니 지극히 우러러 송축하게 됩니다.
조선은 중국 동방의 울타리로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한 지 이미 수백 년이 되었습니다. 근래 서양 각국이 동쪽으로 항해하여 오면서, 지구의 대세는 그 때문에 일변하였습니다. 우리는 불행히 이러한 시국을 맞이하여 반드시 非常한 근본을 만들어 낸 다음에야 非常한 변화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지난 해 귀국 왕께서는 大計를 깊이 생각하시어 군대 훈련과 무기 마련에 열심이셨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런 것들이 마땅히 힘써야 하는 급무이기 때문에, 실로 매우 깊이 기쁘고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서로 간의 경계를 가리지 않고 힘을 다해 도우려고 급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조선에서 武備가 진흥되고 風氣가 나날이 개화되어, 외국의 모욕을 막아내고 동쪽 변방이 공고히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전에 卞元圭군과 논의하여 정한 각 조항은 원래 정해진 숫자에 구애되지 않고 또한 시간에도 한정하지 않는 것으로써, 귀국에서 역량을 헤아려 실행하여 상당한 시간 동안 쌓여야 비로소 성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李容肅군이 휴대해 가져온 別冊에서 자문한 여덟 가지 사무에 대해서는 이미 하나하나 답변하였으니 이것을 보시면 될 것입니다.
조선의 목전 형세를 논한다면, 비록 가까운 나라를 공격할 필요는 없으나 먼 나라와 교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중국의 일본주재 黃參贊이 기초한 『朝鮮策略』은 이미 일찍이 살펴보셨을 줄 압니다. 이 책략은 실로 시세를 살펴 조선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또한 장래 부강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귀하께서는 노련하게 국가 이익을 도모하시고, 견식과 모략이 넓고 두루 통하시니, 옛것에 얽매이는 편견에 구애받지 않고 장기적이고 원대한 계획을 확충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조선 국왕과 집정 대신들께서는 지금까지 서신을 교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느닷없이 큰 소리로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귀하와는 천리나 떨어져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눈 것이 이미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너무 빈번하다는 혐의를 무릅쓰고 재삼 말씀드리는 것이니, 진실로 귀하께서 그 고충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현재 러시아와의 조약 체결에 대한 합의가 비록 이루어졌으나, 러시아의 대군(海軍)이 오랫동안 일본에 머무르고 있으며, 귀국의 동북쪽 항구는 대부분 러시아와 인접해 있으니, 광대뼈와 턱과 같은 조선·中國의 밀접한 관계를 생각한다면, 감춰져 있는 근심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李容肅군이 오가는 데 바빠 그리 많지 않은 예물도 갖출 겨를이 없었습니다. 제가 받은 귀한 예물에 하나라도 보답하는 것은 잠시 후일을 기다리겠습니다. 송구스러운 마음은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귀 국왕과 집정 대신들께 대신 誠意를 전달해 주십시오. 봄바람이 차가우니 오로지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서신으로는 저의 뜻을 모두 담지 못하였습니다.
辛巳年 정월 28일
 
별지 : (조선을) 대신하여 기초한 조선과 각국 사이의 통상조약(代擬朝鮮與各國通商約章)
 
6. 「대신 기초한 조선과 각국 간의 통상조약」(道員馬建忠 [주008]
번역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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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건충(馬建忠, 1845~1900)은 강소성(江蘇省) 단도(丹徒) 출신으로 자는 미숙(眉叔)이다. 1876년 이홍장에 의해 유학생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어 변호사 등의 자격을 얻어 귀국하였다. 이홍장의 지휘 아래 인도와 조선에서 외교 교섭에 종사하였고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 때에는 대원군(大院君)을 중국에 연행하는 일 등을 맡았으며, 조선이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과 조약을 맺는 일에도 관여하였으나, 관직은 도원(道員)에 그쳤다. 그는 철도 부설, 이금(釐金) 감면에 의한 상공업 발전을 주창한 양무파 관료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저서에 『적가재기언기행(適可齋記言記行)』, 『동행삼록(東行三錄)』, 『마씨문통(馬氏文通)』 등이 있다.

이 기초하여 올림)
朝鮮과 某國이 함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朝鮮國과 某國은 화목을 돈독하게 높이고 商民을 은혜로써 돌본다. 각기 全權大臣某를 파견하여 조약 체결에 관한 지시를 서로 비교하며 열람한 다음, 논의하여 결정한 조항을 다음에 열거한다.

제1조. 朝鮮國과 某國양국 民人들은 영구히 화목을 유지하고 영구히 우의를 돈독히 한다. 피차 조약 내에서 개방을 허용한 항구에서 僑居할 수 있다. 각기 신체·가정과 재산을 보호받고, 모든 사항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동일한 이익을 누릴 수 있다.
제2조. 이번에 조약을 맺어 우호관계를 맺으면 某國에서는 某通商港口에 1명의 총영사를 파견하여 주재시킬 수 있고, 그 나머지 通商港口에는 領事를 파견하여 사무를 처리할 수 있다. 본국 商民이 交涉에 관련된 중대 사건을 당하였으나 가까운 곳에서 적절히 상의 할 수 없는 경우, 해당 總領事가 中國北京에 주재하는 公使에게 그것을 상세하게 보고하면, 방법을 마련해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다만 파견되는 領事官은 반드시 정직(正直)한 관원이어야 하며, 상인이 겸직할 수 없고, 또한 무역을 겸하여 종사할 수도 없다. 무릇 재임하는 동안 그곳 지방관과는 모두 평행한 예절로써 상대한다. 이들이 얻는 다양한 혜택은 가장 우대를 받는 국가의 영사관과 다름이 없다.
제3조. 朝鮮國은 현재 某港을 通商港口로 정하여 某國商民이 가서 무역하는 것을 허용한다. 개항에 앞서 반드시 양국에서 따로 관원을 파견하고 해당 港口의 모처를 답사하여 해당 商民이 거주하는 구역으로 정하며, 조약을 어기고 그 구역을 벗어나는 사람은 즉시 본지 지방관이 체포하여 가까운 곳에 있는 領事館으로 이송하여 징계하도록 한다. 그 구역은 여전히 본국의 영토에 속하며, 해당 상민은 단지 값을 치르고 임대하여 사용하되, 영구적인 재산처럼 간주할 수 있다. 이러한 租界 [주009]
번역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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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는 界地(‘구역’으로 번역)라고 쓰고 있으나 여기서는 갑자기 조계(租界)라고 쓰고 있다.

내의 지방 관할문제는 여전히 본지의 지방관이 처리한다.
제4조. 무릇 某國관원과 商民은 某某港口에서 통상을 하거나 주재하면서 각 직종의 인원을 고용·초청하여 직무상 기술 작업을 돕거나 처리하게 할 수 있으며, 본지 지방관은 트집을 잡아 이를 막아서는 안된다. 다만 각종 직업의 사람들이 본국의 법을 어기면, 고용주는 또한 이들을 비호·은닉하여 본지 지방관이 定例에 따라 이들을 체포·심문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제5조. 무릇 通商港口에서 某國군함·상선은 모두 입항하여 식량·땔감·식수를 사들이고, 船體를 수리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조금의 방해도 있을 수 없다. 군함은 항구를 들어오고 나갈 때 선박세[稅鈔] [주010]
번역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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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박세는 톤세(tonnage dues)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톤세는 외국 무역선이 입항할 때 등록된 배의 톤수를 기준으로 부과하는 세금을 가리킨다.

를 납부할 필요가 없다. 개방하지 않은 항구는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한 경우 외에 군함과 상선이 입항할 수 없으며, 위반할 경우 억류하여 처벌한다.
제6조. 무릇 某國商民이 通商港口에서 무역을 할 때, 나가고 들어오는 화물에 대해 모두 關稅를 내야 한다. 다만 각종 화물의 물동량은 예측할 수 없으므로 稅則또한 미리 정하기 어렵다. 이에 각종 수입품의 세율은 예상가의 10%, 수출품은 예상가의 5%로 정하며, 스스로 사용하는 식량 모두는 수량이 총 10건이 되지 않는 경우 모두 면제한다. 다만 鴉片은 조금이라도 판매할 수 없으며, 위반한 경우 몰수하고 처벌을 논의·결정한다. 모든 선박은 입항할 때 반드시 선박세를 납부해야 하며, 톤 당 대략 銀5錢으로 하고, 매 계절마다 한 차례 납부한다. 商船의 入·出港에 대한 규정, 商民이 通商港口에서 화물 창고를 개설하는 것에 대한 定例는 모두 개항할 때 양국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함께 상의하여 적절하게 결정한다.
제7조. 무릇 通商港口에서 양국 인민이 재산 및 각 범죄와 관련하여 교섭해야 하는 사건을 만나면 모두 피고가 속한 나라의 官員이 原審을 맡아 판결하고, 각기 本國의 律例에 비추어 定罪한다. 다만 절도·채무 등의 사안은 양국 관원이 단지 체포하여 추궁할 수 있을 뿐 대신 배상할 수 없다. 만일 사건 원고가 달게 승복하지 않으면 응당 그가 소속된 쪽의 관원이 피고가 속한 관원에게 照會를 보내 다시 조사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공정함을 보인다.
제8조. 이번에 처음 개방하는 항구에서 모든 세무와 관련된 사무는 모두 試行하는 것으로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다. 양국은 단지 오로지 조약의 내용에 있는 바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 개항하는 날부터 5년 후에 다시 적당하게 헤아리고 수정함으로써 적절하게 바꾸어 양국 인민이 손해보지 않고 이익만 보도록 한다.
제9조. 이번에 議定한 조약은 中國語·朝鮮語·某國語를 사용하여 각각 4장씩 작성하여, 이미 공동으로 번역·교감하여 각각이 서로 부합하여 조금이라도 잘못된 곳이 없다. 만일 피차간에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본국어 판본을 사용하는 것 외에는 오로지 중국어 판본을 정본으로 삼는다.
제10조. 현재 이상에서 의정한 조약은 양국에서 파견한 전권대신이 우선 서명하고 도장을 찍어 신뢰를 분명히 나타낸다. 양국 군주가 비준하기를 기다려 서로 약정한 곳에서 [조약문서를] 교환한 다음, 간행하여 널리 알림으로써 양국 관민이 모두 알고 준수하도록 한다.
 
별지 : 北洋大臣이 조선이 자문한 사안에 대해 각각 답변한 내용(北洋大臣酌覆朝鮮詢問各條)
 
7. 「조선의 咨文에 대한 北洋大臣의 답변 항목」(1월 28일) [주011]
번역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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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질문 부분은 위에 나오는 「부건 1의 부건」 (2) 「修信使金宏集이 何如璋에게 보낸 서신」의 후반부에서 나오는 내용이고, 이홍장은 이에 대해 조목조목 답변을 해주고 있다.


[(金宏集) 질문]:“조선은 지금 일본에 개항하여 통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평소에 통상규칙에 어두워 기만과 억압을 당할까 두렵습니다. 君民상하 모두 중국상인을 여러 개항장으로 불러들여 서로 교역하게 하는 것을 바라는데, 이렇게 되면 의기투합하여 서로 의뢰함이 반드시 커질 것입니다. 또 黃參贊의 『策略』에 ‘鳳凰廳무역을 확대하여 중국 상인들이 배를 타고 개항한 각 항구로 와서 통상하게 함으로써 일본인들의 독점을 막아야 한다고 奏請한다’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이 논의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사오니, 삼가 엎드려 밝은 가르침을 기다렸다가 咨文을 갖추어 청하겠습니다. 그리고 문서의 주체는 어떻게 표기해야 타당할지에 대해서도 아울러 훈시를 바랍니다.”
[(李鴻章) 답변]:“조선은 지금까지 해상 무역을 한 전례가 없습니다. 현재 외국과 통상하려고 하는 이상 중국 상인이 조선에 가서 무역하는 일 또한 금지할 수 없습니다. 黃參贊의 策略에서 일본인의 독점을 막아야 한다고 한 내용과 관련해서 장래에 만일 중국 상인이 조선에 가서 무역하기를 원한다면 응당 국왕께서 실제 상황을 咨文으로 보내면, 이를 검토하고 上奏하여 처리할 것입니다.”
[질문]:“조선이 훗날 부득이하게 각국과 교류하게 될 때 자주·자강으로 利權을 우리가 장악하여 타국의 강요를 받지 않고 선후로 조만간에 취해야 할 대책에 대해서도 감히 여쭙겠습니다.”
[李鴻章]:“이 조항은 이미 작년 9월 22일 상주문 전달관 卞元圭에게 일찍이 상세하고 분명하게 언질을 주었으니, 귀국하면 응당 필시 직접 아뢸 것입니다. 요컨대, 마땅히 일이 생기기 전에 예방해야 자주의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馬建忠 道臺가 기초한 『외국과의 통상약장 절략(與外洋通商約章節畧)』 한 책을 넘겨드리니 가져가 참고하여 채택하십시오.”
[질문]:“조선의 부산·원산, 두 항구의 關稅設定에 대해서는 이미 대인의 훈시를 받아 감히 성급하게 의논하여 결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말하기를, 全權委任이 아니면 이 문제를 논의하여 결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만일 全權委員이 와서 몇 %를 거둘지 논의하게 되면 응당 지도해 주신 바에 따라 기회를 봐서 도모하겠습니다. 北洋大臣衙門에 보내는 咨文형식은 禮部에 보내는 咨文형식에 따라 흡사하게 작성해 올리되, 안쪽에는 北洋督署大臣이라 쓰고 바깥쪽에도 동일하게 써도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이 각국과 수교하고 체결한 通商章程과 稅則·稅額條例, 稅關官制의 凡例에 대해서는 엎드려 생각하건대 이미 간행된 문서가 있을 터이니 각각 1건씩을 하사해 주시면 삼가 가지고 돌아가 참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李鴻章]:“부산·원산 두 항구의 關稅를 정할 때에는, 마땅히 귀국에서 관원을 파견할 때 ‘議稅全權’이라는 권한이 쓰인 증서를 근거로 삼아 저 나라 사신과 서로 교환해 확인보고 믿음을 얻어야 합니다. 이는 각국에서 사신을 보내 사안을 논의할 때의 통례입니다. 화물 가격의 몇 %를 稅則으로 할지에 대해서는 중국에서 정한 通商稅則을 끌어들여 기준으로 삼을 필요 없습니다. 이전에 중국이 외국의 상황에 대해서 아직 깊이 알지 못하고 단지 상인들을 體恤하기 위해 설정한 것이었기 때문에, 항구를 출입하는 각 화물의 稅律을 모두 5%로 했던 것입니다. 만일 서양 화물이 내지로 운송되면 다시 2.5%의 부가관세[子口稅]를 거두지만, 실제 한결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내용은 작년에 자문전달관 卞元圭에게 직접 알려준 바 있습니다. 외국에서 關稅를 거둘 때는 모두 화물의 물동량[暢滯]을 보고 稅則기준을 정하며, 놀랍게도 30~100%를 징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각각의 화물을 총체적으로 논한다면 대략 15% 이하가 없습니다. 지금 조선에서 외국과 통상하려고 하는데, 만약 각 화물의 물동량을 미리 알지 못한다면 몇 %를 거둘지 또한 미리 정하기 어려우므로, 차라리 시험적인 총괄세칙을 정해 수입품 예상가의 10%, 수출품 예상가의 5%를 거두는 편이 더 낫습니다. 식품 등 화물의 수가 10건 이상이 되면 역시 세칙에 따라 관세를 거둡니다. 이렇게 시험 삼아 3~5년을 시행하면 화물의 물동량을 알 수 있으며, 곧 세칙의 높낮이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외국과 稅則을 다시 정한다면 서양인들도 결코 따르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대개 수호조약과 통상조약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 수호조약을 위배하지 않으면 결코 전쟁의 발단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쪽에서 통상조약을 수정하자고 한다면 단연코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유럽의 스위스·벨기에는 총알처럼 작은 나라로서 여러 대국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통상조약도 맺지 못하고 세율도 올리지 못해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국 각 항구의 세관에는 혹 監督을 두어 전담하여 관리하게 하거나 혹 巡道에게 겸하여 관할하게 합니다. 종전에 처음으로 通商港口를 열었을 때 중국인 가운데 서양의 문자와 말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기에 關稅징수업무는 서양인을 고용해 처리하게 하되 監督·巡道의 통제 아래 두었습니다. 지금 조선이 각국과 통상하려고 하는데, 일본은 조선이 서양 언어·문자 및 稅關사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다는 것을 탐지하고 있으므로, 관세 담당 직무를 그들이 추천해 충당하지 않으리라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과 겨우 바다 하나만을 두고 떨어져 있어 왕래하는 상품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 또한 통상을 시작한 후 5년 동안 아직 關稅를 징수하지 못하여 손해가 이미 심하다고 하였는데, 만일 일본인을 고용해 稅務를 담당케 한다면 더욱 폐해가 생길까 우려됩니다. 삼가 서양인 중에 세무를 잘 알면서 한문에 능통한 사람을 잠시 고용하고, 그가 조선에서 파견한 稅關관원과 함께 관세 징수업무를 처리토록 하는 것이 비교적 타당할 것입니다. 아울러 다른 한편으로는 총명한 자제들을 속히 선발하여 고용한 서양인에게 언어·문자 및 稅務를 배우게 한다면, 학습이 완료된 다음 실로 다시는 서양인을 고용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일본이 처음 각국과 통상할 때, 서양인을 잠시 고용하여 稅務를 처리하게 하고 敎習을 겸하도록 맡긴 것은 매우 적절한 방안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은 현재 稅務에서 서양인을 퇴출시키고 이미 스스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중국의 모든 通商章程의 稅則, 稅額項目을 津海關道로 하여금 검토하여 조선 委員에게 교부하고, 그가 가지고 돌아가 살펴 참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질문]:“北洋大臣衙門에 보내는 咨文형식은 禮部에 보내는 咨文형식에 따라 흡사하게 작성해 올리되, 안쪽에는 北洋督署大臣이라 쓰고 바깥쪽에도 동일하게 써도 괜찮지 모르겠습니다.”
[李鴻章]:“北洋大臣衙門에 보내는 咨文형식은 마땅히 禮部에 보내는 자문과 동일해야 합니다. 안쪽과 바깥쪽의 직함은 응당 欽差北洋通商大臣衙門이라고 써야합니다.”
[질문]:“엎드려 살펴보니 禮部咨文가운데 “委員, 하급 무관·병사, 學徒, 通事는 北洋大臣衙門에서 빈 통행증을 발급하여 조선에 교부하고, 조선에서 이름을 기입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빈 통행증은 이번에 가지고 돌아가 필요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십시오.”
[李鴻章]:“關道등의 면담 내용 보고에 따르면, ‘먼저 기예를 배울 學徒들이 파견되어 오므로’ 이미 해당 道員등이 詳文을 올려 빈 통행증 10장을 발급해 줄 것을 청하였고, 이를 조선 관원에게 교부하여 그들이 문서를 갖추어 수령해 가지고 돌아가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만약 기예를 학습할 學徒들이 반을 나누어 따로따로 온다면, 응당 각 반마다 한 장의 통행증에 기입하여 통솔 관원이 소지하도록 하여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질문]:“學徒들이 왕래할 때 이미 곧장 해로를 이용하면 스스로 편리하고 빠를 것”이라는 하교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기선을 빌려 타면 순조롭게 바다를 건널 수 있을 터인데, 마땅히 어디에서 배를 빌려야 문제가 없고, 또한 공문을 주셔야 의문이 생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李鴻章]:“關道등의 면담 보고에 따르면, 조선에서 鳳凰廳邊門까지의 거리는 1,100여 리이고, 다시 牛莊、營口까지는 약 300리이니, 곧 營口에서 輪船이나 혹 帆船을 타고 天津으로 오는 것이 비교적 편리하고 빠를 것입니다. 邊門에 들어설 때는 통행증을 東邊道의 衙門에 올려 검사를 받고, 營口에 도착하면 奉錦山海關道의 衙門에 올려 검사를 받는데, 모두 직인을 찍은 다음 통과시킬 것입니다. 만일 교섭해야 할 사안이 생기면, 이전처럼 지방관이 통제하고 심문·판정합니다.”
[질문]:“조선 선박은 본디 깃발 표시[旗標]가 없어, 현재 만들기 위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黃參贊은 중국의 龍旗를 그대로 받아쓰겠다고 奏請하라고 하였습니다. 감히 여쭙건대, 중국 선박의 깃발은 무늬가 어떻고, 조선은 어떤 색깔과 무늬를 써야 타당하겠습니까?”
[李鴻章]:“무릇 서양 상선의 깃발 표시는 모두 군주의 깃발입니다. 이 때문에 해상에서 왕래할 때 어떤 나라의 선박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귀 국왕이 스스로 사용할 깃발에 대해 말한 바에 따르면 용을 그린 네모난 깃발인데, 이는 또한 중국의 龍旗와 서로 비슷합니다. 실로 용을 그린 깃발을 國旗로 삼고 아울러 선박의 깃발 표시로 삼아도 좋습니다. 응당 정해서 사용하기에 앞서 龍旗의 길이·색깔·그림양식 등을 본 대신 아문에 자문으로 보내주어 검토하여 상주하고 (그 결과를) 자문으로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질문]:“제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일본사신 花房義質이 國書를 가져왔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조정에서는 조약 내용 중에 일찍이 “우리 禮曹와 일본 外務省은 書契로 왕래한다”는 조항만 있을 뿐 國書로 왕래한다는 조항이 없는데 지금에 와서 어찌 갑자기 조약을 바꿀 수 있는가 하면서 이것으로 그를 責難하였습니다. 그는 “현재 辨理公使로 승임하였기에 외무성 문서를 지참할 수 없고, 또 각국 모두 國書교환이 있은 다음에야 더욱 친목을 다질 수 있다”고 하면서, 힘을 다해 간청해마지 않았습니다. 국왕께서는 특별히 이웃나라와의 우의를 고려하여 便殿에 친히 임하시어 저들 사신을 불러 접견하고 國書를 접수하였습니다. 國書에서 “공손히 알린다[敬白]”는 구절은 자못 공손하고 오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皇帝’와 ‘朕’을 칭하는 글자는 몹시 눈에 매우 거슬려 상하 모두가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또 國書에서 요청한 公使의 주재는 가장 응하여 따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한 인천 개항 역시 가볍게 허락할 수 없습니다. 조정의 의견은 인천 개항은 억지로 허락하는 것으로 몇 년 시간을 끌자는 것이었고, 주재문제는 인천 개항으로 미봉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따를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國書에 답하지 않을 수 없으나 저들을 ‘帝’라고 칭하는 일은 실로 원하지 않는 바입니다. 우리 쪽의 호칭에 대해서도 또한 참고할 만한 전례가 없으니, 國書를 주고받을 때 어떻게 골라 써야 國體를 손상시키지 않고 각국의 비웃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의 바람은 또한 전담 인원을 통한 회답에 있는데, 저희 능력이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청할 때마다 들어준다면 어찌 손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대인께서는 이미 도탑게 마음을 쓰시고 한 집안처럼 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감히 저들의 國書와 口奏내용을 베껴서 올리오니, 굽어보시고 좋은 방책을 내려주시어 동쪽 울타리인 조선이 나라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李鴻章]:“사신이 수도에 주재하는 것은 서양 각국이 모두 같습니다. 이미 통상을 하고 있다면 반드시 교섭해야 하는 사안이 있으니, 公使가 수도에 주재하는 것은 領事가 통상항구에 주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사안이 생겼을 때 서로 상황을 참작하여 양국의 우의를 지속하고 다툼을 수습할 수 있으니, 실로 이익은 있되 손해는 없습니다. 특히 동·서양의 풍속은 서로 달라 갑작스레 사신의 수도 주재를 논의하게 되면 우려가 생기지 않는 경우가 드뭅니다. 중국도 종전에 처음 서양과 통상하고 개항했을 때의 상황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事勢를 헤아려보면 이미 조약을 맺고 통상을 하고 있으니 계속 거절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나중에 억지로 그들의 요구에 따르기 보다는 개탄스럽더라도 지금 허락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하물며 일본 사신의 수도 주재문제는, 살피건대 光緖2년 귀국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의 제2항에 이미 실려 있습니다. 현재 저들은 조약에 근거하여 요구하고 있으므로, 만일 허락하지 않는다면 조약 위반이 됩니다. 그 잘못은 우리 쪽에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빈틈을 주게 되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인천항은 해로를 통해 서울에 이를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입니다. 만일 이미 개항을 허락했다면, 그 승낙을 이행하고 준수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을 듯합니다. ‘우리 쪽의 호칭에 대해서도 또한 참고할 만한 전례가 없으니, 國書를 주고받을 때 어떻게 골라 써야 國體를 손상시키지 않고 각국의 비웃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일본에서 보낸 사신이 국서를 받들어 가져 왔으니, 장래 귀국에서 국서로써 답하는 것이 양국이 서로 왕래함을 예로서 귀중히 여기는 의리일 것입니다. 답서에서 용어와 어구를 어떻게 가려 쓸지는, 귀국에서 자체적으로 논의하여 윤색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國書에서의 호칭에 대해서는 서양 각국 서적에 기재되어 있는 바를 두루 조사해보니 사신이 방문하여 제출한 국서에서 그 호칭을 번역한 것이 본래 한결같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등의 군주는 모두 ‘帝’라고 칭하였고, 이탈리아·에스파냐·스웨덴 등의 군주는 모두 ‘王’이라 자칭하였으며, 그동안 한문으로는 군주 및 군왕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영국 군주가 남자일 경우 곧 王으로 칭하고, 여자일 경우 后라고 칭했으며 6년 전에 비로소 印度皇后라는 호칭을 더하였습니다. 가령 王을 칭하는 나라가 帝를 칭하는 외국으로 국서를 보낼 때 양쪽 모두 또한 각기 본래의 호칭을 따르며, 帝를 칭한다고 해서 존귀하고 王을 칭한다고 해서 약소하다고 여긴 적이 없습니다. 귀국에서는 오랫동안 중국의 책봉을 받아 왔기 때문에, 만일 일본의 국서에 답할 때에는 이치상 마땅히 封號를 그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장래 이 소식이 각국에 전해져 서양의 통례로 따지더라도 귀국이 실례하였다고 비웃음을 사는 경우는 당연히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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