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넷

상세검색 공유하기 모바일 메뉴 검색 공유
닫기

상세검색

닫기
기사명
자료명
작성·수신·발신
본문
사료라이브러리 열기
  • 글씨크게
  • 글씨작게
  • 프린트
  • 텍스트
  • 오류신고

정상형(井上馨)과 미 해군 제독의 차관(借款) 협의에 관한 하여장(何如璋)의 문서

1. 井上馨과 橫濱에 정박 중인 미 해군제독이 熱海에 갔는데, 전해지기로는 借款사무를 협의한다고 합니다(井上與泊橫濱之美船提督赴熱海, 傳會商借債事). 2. 일본에 파견된 각 수행원에 대한 표창을 요청합니다(請恩獎出使日本各隨員). 3. 조선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더라도 외국인들이 조선을 더 이상 자주국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면, 여전히 그들 스스로 처리하게 해도 될 것입니다(朝鮮對外立約, 使外人不再認爲自主之邦, 仍可由其自行辦理).

 
  • 발신자何如璋
  • 수신자總理衙門
  • 날짜1881년 1월 23일 (음) , 1881년 2월 21일
  • 문서번호2-1-1-14 (349, 456a-458a)
1월 23일, 日本公使何如璋등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내왔다.

이번 달 15일 삼가 올린 제113호 서신은 이미 살펴보셨을 것입니다. 이리문제에 대해서는, 앞서 “중국과 러시아 간의 사안이 이미 종결되었다”고 한 영국 런던발 전보 이후, 뒤를 이은 전보가 아직 없었습니다. 러시아 해군제독 레소프스키는 여전히 長崎[나가사키]에 있습니다. 長崎理事餘瓗가 보낸 서신에 따르면, “일찍이 찾아가 한 번 만나보았는데, 여전히 앉아서 악수를 하고 걷는 것도 불편한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현재 橫濱에 정박 중인 미국 해군제독은 東京에 와서 外務卿井上馨[이노우에 가오루] [주001]
번역주 001
닫기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는 죠슈번(長州藩) 출신의 무사로 메이지유신에 참여, 메이지유신의 원훈(元勳)이자 구원로(九元老)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정치가이자 실업가로 메이지시대에 외무경(外務卿)·참의(參議)·농상무대신(農商務大臣)·내무대신(內務大臣)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는데, 1876년에는 부사(副使)로 강화도조약의 체결에 참여하였고, 1879년부터 외무경(外務卿)으로 일하면서 임오군란·갑신정변과 관련된 조선과의 외교 사무를 처리하였으며 1885~1887년까지는 외무대신을 지냈다. 1894년 제2차 이토 내각의 내무대신, 주중국 공사, 제3차 이토 내각의 대장대신(大藏大臣) 등을 지냈다. 근대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전략의 주도자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을 만났고, 이에 井上이 답방을 하였는데, 다음날 다시 그 배를 타고 함께 熱海[아다미]로 갔습니다(그곳은 伊豆[이즈]의 근해지방으로 東京에서 약 200리 떨어져 있고, 온천이 있어서 일본의 고관과 명문가 사람들이 때때로 가서 유람하는 곳입니다). 어제 외무성 서기관이 와서 이를 언급하였는데, “井上馨이 그 부인 및 딸과 함께 제독을 답방하였고 온천 유람 이야기가 나오자 제독이 강하게 요청하여 동행하였다”고 합니다(도착 직후 배는 橫濱으로 돌아가 정박하였습니다). 다만 다른 음모가 있는지는 반드시 다시 알아 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번 달에 차례로 熱海로 갔던 參議大隈重信[오쿠마시게노부] [주002]
번역주 002
닫기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1838~1922)는 히젠(肥前) 번의 무사 출신으로 메이지유신의 志士가운데 한 사람이다. 메이지시대의 정치가이자 재정개혁가로 입헌개진당(立憲改進黨)을 세워 총재가 되었고, 일본의 제8대·17대 내각 總理大臣을 지냈으며 와세다(早稻田)대학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 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 [주003]
번역주 003
닫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죠슈(長州)의 번사(藩士) 출신으로 메이지유신의 원로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일본 제1대 내각의 총리대신, 樞密院의원, 貴族院원장 등을 지냈으며, 제1대 조선통감을 맡기도 하였다. 메이지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고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의 창시자로 네 차례나 내각을 조직하기도 하였으나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살해되었다.

, 黑田淸隆[쿠로다 키요타카] [주004]
번역주 004
닫기

쿠로다 키요타카(黑田淸隆, 1840~1900)는 사쓰마(薩摩) 번 출신으로 메이지유신에 적극 참가하였고, 메이지정부에서 병부대승(兵部大丞)·개척사차관(開拓使次官) 및 長官, 참의(參議) 등을 지냈다. 1876년 일본정부를 대표하여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고, 홋카이도(北海道) 개발에도 기여하였으며, 일본의 제2대 내각 총리대신을 지낸 원로이기도 하다.

는 모두 아직 東京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혹은 太政書記官및 大藏省의 飜譯書記官을 대동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함께 모여 借款문제를 협의할 것이라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井上이 熱海로 간 것이 여전히 이 일 때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공손히 이 서신을 올립니다. 삼가 서신을 보내니 總理衙門에서 검토하고 지시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편안하십시오.

삼가 다시 아룁니다:
저희는 현재 3년 임기의 만료가 도래하였습니다. 대동했던 參贊·理事·繙譯·隨行員등 모든 인원은 미약한 노력을 하지 않은 경우가 없기에 현재 이전 사안을 근거로 표창을 간청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간청하는 주접은 上海의 文報局(電信局)에 보냈으니, 도착하면 總理衙門에서 대신 올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저희가 종전에 올린 주접은 總理衙門에 대신 올려주실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관해 이미 “이후 이 방법에 따라 처리해도 좋습니다. 이번은 종전대로 奏事處로 자문을 보내십시오”라는 지시를 받은 바 있습니다. 또한 삼가 원건 주접 및 附片을 초록하여 올리오니 검토하시고 처리해 주십시오.
附片가운데 丁憂 [주005]
번역주 005
닫기

정우(丁憂)는 직계 존속의 상(喪)을 당해 3년상을 치르는 동안 현직에서 이탈하는 것을 말한다.

중인 任敬和등 5명 가운데, 任敬和는 현지에 머무르며 업무를 담당한지 3년이 되어 임기가 만료된 것 외에, 神戶理事官劉壽鏗은 비록 업무를 담당한 지 오래되지 않았으나, 神戶·大阪중국 상인들이 福建·廣東·三江출신 집단끼리 반목하여 그가 업무를 시작하던 초창기에 사정이 매우 복잡하고 어려웠지만 고심하여 이들을 타이르고 돕는 일에 크게 힘을 썼습니다. 수행원 吳廣霈·何定求등은 업무를 시작할 때 아주 번잡하고 어려웠으나 업무를 담당한 지 이미 2년이 지났지만 조금도 그르침이 없었습니다. 그때 이미 『奏定丁憂人員章程』이 있었으므로 본래 그대로 남아 업무를 맡을 수 있지만, 이들 모두 居喪의 의례를 지키게 해 줄 것을 단호히 요청하였기에 억지로 남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결심과 행실은 가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고향을 떠나 부모와 이별하고 멀리 떨어진 해외에서 업무를 담당하다가 홀연히 중도에 丁憂를 만났음을 고려한다면, 위로는 조정의 두터운 은혜를 입지 못할 뿐 아니라 아래로는 가정의 숨겨진 아픔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니, 또한 그 감정 또한 실의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저는 본디 이들을 각기 나누어 가늠하고 표창을 상신하고자 하였으나, 모두 3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였고 장려와 표창에 관한 장정이 없어 吏部의 반박을 받지 않을까 우려하여 여러 차례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고개 숙여 황상의 자애로운 유지를 청하는 문제에 대해 總理衙門에 넘겨 검토를 받고 타당한지 아닌지 결정을 기다리고자 합니다. 삼가 서신을 보내니 검토하고 훈시해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다시 한 번 편안하시기를 빕니다.

첨부합니다 :
제가 일본으로 건너온 이후 모든 공무와 관련된 주접은 모두 聯名으로 上奏하였는데, 美國·英國 등 각국에 파견된 公使가 단독으로 上奏하는 경우와 약간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번에 표창을 추천한 인원 가운데 주접에서 아뢴 隨行員張鴻淇는 張斯桂의 아들로서 張斯桂가 60세가 넘었고 대양을 건너 멀리 와야 했기 때문에 일본으로 수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미 그를 상의하여 수행원으로 충당하였고 현재 임기가 만료되었습니다. 張鴻淇도 실로 응당 일률적으로 표창을 추천해야 하지만, 이 경우 아버지인 張斯桂와 함께 연명하여 상주하기 곤란합니다. 삼가 이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진술하오니 주접이 도착하면 곧 검토해주시기를 지극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재차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첨부합니다:
현재 輪船을 기다리면서 서신을 발송하지 않았던 차에 보내주신 문서와 本字49호 지시를 받아 삼가 공손히 모두 읽었습니다. 조선의 외교와 관련하여 제가 이전에 올린 『主持朝鮮外交議』는 總理衙門 [주006]
번역주 006
닫기

원문의 원(院)은 중앙정부의 관청이나 그 장관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어디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일단 總理衙門으로 간주하여 번역하였다.

에서 다듬어 올린 다음 다시 여러 차례 생각해 보니, 제가 제안한 관원을 조선에 파견하여 대신 외교를 주지하는 일과 조선으로 하여금 조약을 체결케 하도록 諭旨를 청하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바로 실행하기 곤란한 것 같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조선이 전에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였고, 조약 내에 “조선은 自主之邦이다”라는 文句가 있었습니다. 이후 조선 禮曹에서 일본 外務省에 보낸 문서에서 “上國이 指揮한다”라는 문구가 있고 이를 擡頭하여 올려 썼기 때문에 일본 공사 花房義質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고 공문을 보내 반박·힐책하였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바람은 조약 체결 자체는 그대로 조선이 주지하되, 다만 그들로 하여금 조약문 가운데 저촉되거나 어긋나지 않게 중국의 屬國이라는 그림자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함으로써 외국인들이 조선을 自主之邦으로 인정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향후 아무 일이 없을 때는 서로 연락하면서 크게 응원할 수 있고, 일이 있을 때는 서로 策應하면서 中立의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외교와 관련된 모든 사무는 여전히 그들 스스로 처리하도록 합니다만, 그들이 능히 처리할 수 있을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또한 總理衙門에서는 제가 뜻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중국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라] 제 개인적인 의견인 것처럼 하라고 지시하였는데, 이것은 특히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방법입니다. 제가 이전에 미국 공사와 만났을 때에도 제 의견인 것처럼 가장하여 그와 협상을 하였는데, 이것도 總理衙門에서 지시한 취지와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올린 제110·111호 서신에서 이미 자세하게 진술하였습니다. 또한 李中堂大人은 “중국과의 조약을 모방하게 되면 조선에 불리할 것”이라 하셨는데, 제가 그토록 서둘러 조선이 우선 미국과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李中堂大人은 또한 “다른 나라들이 잇따라 모두 조선에 가게 되면 오히려 중간에 장애가 있을 것”이라 우려하셨습니다. 전 영국 대리공사 케네디도 이 일을 언급하였으나 제가 또한 이미 완곡한 말로 사절하였습니다. 현재까지 모든 처리 방법이 다행히 어긋나거나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러시아 군함은 여전히 長崎에 정박해 있지만, 新聞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또한 때로 러시아가 군함을 파견한다는 이야기가 있으므로 결국 조선이 무사하리라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조선에서 앞서 파견했던 委員李東仁은 이미 조선에 돌아갔고, 나중에 파견한 委員卓挺植또한 가까운 시일 내에 응당 釜山에 도착할 것입니다. 진실로 조선으로 하여금 이제부터라도 각성하게 하여 外交에 대한 뜻을 결심하게 한다면 실로 아시아 대국에 크고 유익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시세가 절박하여 조금이라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저는 밤낮으로 방황하면서 오로지 조선이 낡은 견해를 깨뜨리고 신속하게 처리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공손히 이 서신을 올립니다. 재차 삼가 서신으로 전하니 總理衙門에서 검토하여 훈시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편안하시길 다시 청합니다.
 

태그 :

태그등록
이전페이지 리스트보기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