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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중일한관계사료

월경(越境)한 조선인이 가족들과 귀의(歸依)를 청한 일에 대한 길림장군(吉林將軍)의 문서와 탄원서

월경한 조선의 빈민 류운근 등이 본국에서 연이어 기근이 들어 도저히 살 수 없어 가족을 이끌고 귀의하고자 하니, 땅을 나누어 주고 안치시킴으로써 러시아인에게 수용되는 것을 피할 수 있도록 간청하는 바입니다(朝鮮越界貧民柳雲根等, 以本國連年饑饉, 民不堪命携家來歸, 懇請撥地安揷, 以防爲俄人收用).
  • 발신자
    吉林將軍 希元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85년 3월 29일 (음)(光緖十一年三月二十九日) , 1885년 5월 13일 (光緖十一年三月二十九日)
  • 문서번호
    1-4-1-03 (981, 1765a-1768a)
3월 29일 길림장군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서를 보내왔습니다.
올해 3월 21일 혼춘부도통 依克唐阿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자문을 받았습니다.
현재 조선 빈민 류운근 등 백여 명이 가족을 이끌고 토문강의 鐘城 건너편 지역으로 건너왔는데, 이 백성은 탄원서를 올려 중국 백성이 되기를 원하면서 토지를 내주어 정착시킴으로 써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招墾局 委員 賈元桂가 직접 보고하면서 지시를 요청하였습니다. 本 幇辦은 속국의 백성이라도 우리 백성과 같으니, 조선을 등지고 중국에 몸을 던지는 것은 도리상 옳지 못하니 잘 타일러 돌려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탄원서가 본 아문에 도착했는데, 이 백성의 요청은 아주 간절하게 호소하기를 조선은 외국과 통상을 하게 되었지만, 관리와 백성의 마음이 달라 세금의 징수가 더욱 늘어나면서 백성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백성은 중국을 부모처럼 우러러보고 있고 기꺼이 歸附하려고 하며, 올 길은 있지만 돌아갈 길은 없다고 합니다. 조사해보니 근래 (중국 쪽으로 넘어) 오는 사람이 더욱 늘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천여 명의 빈민이 강변에 모여 돌아가도록 지시해도 떠나지 않고 있으며, 시간이 오래 경과해도 이들을 정착시키지 못한다면, 죽거나 아니면 변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정말로 가련하기도 하고 염려되기도 합니다. 이에 마땅히 탄원서 원문을 베껴 이 공문의 말미에 첨부하여 자문을 보내니 지시를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과 같은 (혼춘부도통의) 급보를 받았습니다. 조선 빈민 백여 명이 가족을 이끌고 이곳에 와 집 한 채 받기를 원하고 있는데, 그 상황과 말이 아주 간절하며, 당연히 조선에 흉년 때문에 기근이 발생하여 백성이 삶을 꾸리기 쉽지 않은 때문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가족을 이끌고 와 기꺼이 귀부하려는 것입니다. 무릇 조선 백성은 중국 백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미 몸을 기댈 곳이 없어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먼 곳에서 찾아와 귀부하려고 하는데 만약 그들을 안착시키지 못한다면 그들은 장차 죽음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니, 정말 가련한 처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비단 그들을 회유하는 방법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곤경에 빠져 돌아갈 수 없을 경우 혹시라도 러시아인에게 수용이 된다면 더욱 우려할 만한 상황이 될 것입니다. 응당 신속하게 방법을 마련하여 정착시켜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힘으로써 적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幇辦 依克唐阿에게 신속하게 비밀리에 자문으로 답장을 보내 그들을 적절하게 정착시키도록 함으로써 墾務를 확충하고 아울러 보살펴 주는 뜻을 보이게 하였으며, 그리고 조선 빈민이 올린 탄원서 두 장을 베껴 말미에 첨부하고, (하루) 5백 리 속도주 001
각주 001)
청조에서는 약 1,785개소의 역참(驛站)을 설치하고, 경사에는 황화역(皇華驛)을 두었는데, 이곳을 통해 신속하게 전국으로 공문을 전달할 수 있었다. 군기처의 공문에「신속한 전달(馬上飛遞)」이란 표시가 있으면 하루에 3백 리를 가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며, 긴급한 경우에는 400~600리를 갈 수도 있었고, 가장 급한 경우에는 8백 리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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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긴급히 자문을 보내 비밀리에 보고를 올립니다. 이 때문에 총리아문에 자문을 보내니 번거로우시더라도 참고하시고 조치를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별지: 중국에 귀의(歸依)를 요청하는 조선 빈민들의 탄원서
 

「초록:탄원서 원문」

(1)
류운근 등이 은택을 베풀어 돌봐주시길 간청합니다. 저희들은 본래 조선의 빈민으로 평소 중국에서 백성을 사랑하여 은택을 베풀어 주신다는 소문을 실컷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마을 사이에서 걸식을 하면서 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찾아와서 土們江 西邊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즉 동쪽은 조선의 鍾城 땅이고 서쪽은 바로 중국 땅입니다. 농사를 지을 작정으로 초가집을 지으려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종성 사람들이 자신들이 농사짓는 곳이라고 땅을 다투는 바람에 저희들은 그 토지를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탄원서를 올려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머리를 깎고 중국의 백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엎드려 비오니 어진 하늘과 같은 대인께서 때마침 궁핍한 백성을 무휼하는 정치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즉 농사지을 땅을 허락해 주시어, 이것으로 농사를 지어 생명을 보전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부디 어진 하늘과 같은 대인의 처분을 바라고, 또 바라는 바입니다.
(2)
류운근 등이 은택을 베풀어 돌봐 주시길 간청합니다. 저희들은 본디 빈궁한 백성으로, 엎드려 듣건대 중국은 땅이 넓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고 하니, 중국의 백성이 되고자 하여, 조선 종성의 토문강 서쪽인 중국 땅으로 옮겨와 집을 짓고, 토지를 개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종성의 백성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칭하면서 집을 지을 터를 줄 수 없고, 개간할 수 있는 오래된 황무지도 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로 옮겨온 1백 여 호의 백성은 진퇴양난에 빠져 추위와 배고픔이 뼛속까지 찌르고 있으니 장차 죽음의 위협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토문강 동쪽이야말로 조선 종성의 땅으로 종성의 백성이 어찌 중국 땅에서 정착하여 생활한다는 말입니까? 하물며 또한 봄 농사가 시급한데, 파종할 수 있는 한 치의 땅도 없으니 어찌 굶어 죽는 것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머리를 모아 대인 앞에 엎드려 우러러 하소연하고자 하오니, 상황을 굽어살펴보시어 저희에게 비어 있는 땅을 지급해주십시오. 땅을 측량하고 떼어 주셔서 찢어지게 가난한 저희 백성이 농사짓고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뜻을 보호해주십시오. 부디 엎드려 바라건대 어진 하늘과 같은 대인께서 공평한 정상 법규를 잠시 제쳐 두시고, 특별히 저희들에게 곡식을 심을 토지를 허락해 주시어 농사를 짓고 안착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그 베풀어 주신 은덕에 크게 감읍할 것입니다.
탄원자 명단
류운근 류성무 방권석 임군언 임봉삼 이헌국 한지숙 유윤봉 현병회 차병용 오택헌 이치준 차덕준 오사범 이경노 이은광 이윤문 김응협 이천금 이희규 이헌돈 오종월 이명헌 이봉서 이만주 김억손 이영실 이두성 김윤겸 윤봉삼 김종훈 이성렬 한용운 김종준 김병철 이능구 임만흥 이한수 이정구 이공익 황치범 이군벽 이광천 박순겸 김인언 이명보 황치선 이헌주 김명덕 엄익덕 김순정 최병률 홍명언 김원건 김학유 문중각 강세영 박명굉 김창택 이병률 김사굉 김희주 김종신 김만근 박동준 이학률 엄익보 강학경 김병철 차형팔 조리남 이군일 김수찬 김병인 이명보 이규원 황화경 김용심 양수원 김형채 이성세 김사굉 김두학 홍범구 최봉엄 박재풍 한덕보 이석규 강필성 이병근 강학증 김형담 한종각 안정훈 김성률 장성유 이병길 이언식 엄광영 김은준 박석은 장기언 이인협 안광성 김종옥 이수원 김석성 정세영 김덕행 한리현 방봉만 정우순 한만묵 이학률 김병두 이신협 김만업 방인행 한종묵 김희언 이운신 황덕구 엄익렬 채명오 한치경 임성억 강천규 채용석 박화여 채동행 김순원 이창률 김기창 채용근 엄규영 박만해 한용운 김세악 노화서 채원국 장성언 이화용 박종현 강세호 채신학 김병순. 이상 모두 146명.

  • 각주 001)
    청조에서는 약 1,785개소의 역참(驛站)을 설치하고, 경사에는 황화역(皇華驛)을 두었는데, 이곳을 통해 신속하게 전국으로 공문을 전달할 수 있었다. 군기처의 공문에「신속한 전달(馬上飛遞)」이란 표시가 있으면 하루에 3백 리를 가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며, 긴급한 경우에는 400~600리를 갈 수도 있었고, 가장 급한 경우에는 8백 리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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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경(越境)한 조선인이 가족들과 귀의(歸依)를 청한 일에 대한 길림장군(吉林將軍)의 문서와 탄원서 자료번호 : cj.k_0001_0040_001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