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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강(圖們江) 수원(水源)을 감정하고 경계비를 세우고자 한다는 주접(奏摺)과 첨부 문서

감계위원 德玉 등이 石乙水를 도문강의 수원으로 감정하고, 아울러 경계 비석을 세우고자 한다는 주접 1건과 (조선의 감계관와) 함께 조사하고 직인을 찍은 지도 1장을 咨文으로 보내왔습니다(勘界委員德玉等勘定石乙水爲圖們江源, 竝咨送擬立界牌淸摺一件, 會勘鈐印地圖一張).

 
  • 발신자總理衙門
  • 수신자北洋大臣 李鴻章
  • 날짜1887년 10월 21일 (음) , 1887년 12월 5일
  • 문서번호1-3-2-07 (1296, 2387b-2392a)
10월 21일에 [총리아문에서]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보낸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광서 13년 9월 21일에 귀 북양대신의 다음과 같은 자문을 받았습니다.
9월 17일에 조선국왕의 다음과 같은 자문을 받았습니다.

 
德源府使 李重夏를 파견하여 도문강 경계지역을 재차 감계한 사안에 대하여 勘界를 하고 공동으로 도장을 찍은 지도 한 장과 『(도문강 경계 지역에 대한 재차 공동감계를 하였을 때의) 회담 기록 공문 요약본』한 책을 보냅니다.
 

이상의 내용이 본 북양대신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조선국왕은 이미 별도로 공문과 지도·책자를 갖추어 자문으로 禮部에 보낸 바 있으므로, 응당 이 상황에 따라서 조사하고 처리해주실 것을 (총리아문에) 자문으로 요청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안에 대해서 본 총리아문은 올해 7월 2일 吉林將軍의 다음과 같은 자문을 받았습니다.
광서 13년 6월 7일 德玉, 秦煐, 方郞의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았습니다.
저희들은 지시를 받들어 도문강 경계를 다시 감계하였습니다. 올해 3월 하순에 會寧으로 달려가 조선감계관 덕원부사 이중하와 만나 의논을 했는데, 무산 동쪽은 진실로 총리아문의 原奏와 마찬가지로 도문강이 천연의 경계를 이루고 있어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다만 무산 서쪽의 경계지역은 응당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당 부사와 함께 회녕에서 출발하여 무산성으로 향하면서 측량위원을 감독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양식을 휴대하고 전진하였습니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길을 열면서 가는 곳마다 측량을 하고 모든 물길을 두루 조사하여 삼가 총리아문의 奏議에 따라 해당 부사와 함께 분석·고증하면서 힘써 무산 서쪽 280여 리의 밝혀지지 않은 곳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전력을 다해 확인함으로써 강의 발원지를 확실히 찾아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비에 젖는 것도 모르고 노숙을 하면서 지형이 험하고 위험한 곳을 오르내린 기간이 두 달이 넘었으며, 5월 초순이 되어야 비로소 감계를 마치고 회녕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생각건대 이전의 감계는 때마침 엄동이라 쌓인 눈이 깊고 물이 말라 발원지를 찾는 일이 비교적 곤란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지정하여 가리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하나하나 측량한 거리에 따라 분명하게 조사하여 상세하게 지도를 그렸습니다. 무산 서쪽의 강물은 지난 감계에서는 단지 西豆水·紅丹水·紅土山水 세 강물만을 찾았는데, 이번에 찾아낸 石乙水까지 합하면 모두 네 줄기가 됩니다. 총리아문의 원주에 의하면,

 
『一統輿圖』에 나오는 서두수는 홍단수의 남쪽에 있고, 게다가 조선 길주의 학항령에서 발원하므로 그것이 대도문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홍단수는 무산 남쪽에 있으니, 그것이 무산에서 북쪽으로 뻗는 소도문강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물길을 따지면 서두수는 비교적 넓으며, 그 흘러가는 방향을 살펴보고, 또한 서쪽 연안에 거민이 많고 분묘가 오래 되었음을 보면 분명히 경계를 나누는 대도문강이 아닙니다. 홍단수의 경우 소도문강이라고는 할 수 없고, 오히려 대도문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압록강의 발원지와 서로 48리 반쯤 떨어져 있고, 총리아문에서도 또한
압록강 발원을 압록이라 하지 않고 建川溝라고 하는 것은 도문강 발원에 반드시 도문이라는 이름이 붙을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경우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건천구라는 세 글자는 조선에서는 艮莫千各里라 부르고, 三汲泡에서 서남쪽으로 가면서 산줄기와 비탈을 따라 흘러내려 가면 아래에 서남쪽으로 흘러가는 물줄기 하나가 있는데, 바로 이 물줄기입니다. 安邊府使가 보내온 李申耆가 그린 지도의 모사본과 중국 지도를 검토해보면, 그 안에 三池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三汲泡로 건천구와는 완연하게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의 감계보고에서 당시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웠다면 응당 삼급포의 분수령 위이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번에 재감계의 상황을 가지고 논한다면 홍단수의 발원지 역시 무산의 남쪽에 있어 총리아문의 원주와 서로 들어맞지만, 長坡 일대는 조선 거민이 백여 호가 있는 데다가, 모든 토지와 가옥·분묘는 그 자취도 역시 옛날식의 것입니다. 비밀리에 중국인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백 년이 넘었다”고 이야기하며, 또한 『茂山府志』가운데 해당 부분을 찾아보니, 장파의 社倉을 乙巳年에 설립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 해에 이미 72호가 있었으며, 戊申年에 또다시 53호가 늘어났는데, 시간으로 따져보면 道光 연간의 을사년(1845)이 아니므로, [주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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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가장 늦어도 건륭 50(1785)년이 된다.

백 년이라는 주장 역시 증거가 없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만약 홍단수의 발원을 대도문강 발원지라고 통틀어서 지목한다면, 전체적으로 보아 즉 長坡의 內曲·小紅丹廟 부근 지방이 응당 중국 경내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은 그다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강물의 모양으로 따진다면 이것으로 정할 수 있으나, 실제 상황이나 이치로 보면 이렇게 지정할 수 없는 셈입니다.
한편 紅土山水를 조사하여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른바 40리를 伏流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확실한 근거가 없으며, 물줄기가 끝나는 곳은 평평한 비탈로 격리되어 董棚 [주002]
번역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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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붕(董棚)은 감계 때 중국 측 위원이 지은 이름으로 동씨네 움막(董棚)라는 뜻이다.

의 남면에서 동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와는 분명히 서로 연결되지 않고 있으며, 비문이나 돌더미·흙무더기와도 서로 상관이 없습니다. 안변부사의 조회에서도 역시 그곳의 물줄기는 다시 연결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다시 한 번 조사를 해보니, 홍토산수는 단연코 대도문강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극등이 세운 비석이 왜 그곳에 서 있는지에 대해서는 응당 신속하게 총리아문의 원주에 따라 철저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재삼 이리저리 따지고 널리 물어보면서 두루 의견을 들어보니, 모두가 말하기를 “산이 깊고 땅이 외진 곳이라 인적이 거의 드문 곳이므로 도저히 알아볼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강희 50년 8월 4일 다음과 같은 康熙帝의 상유가 내려진 적이 있습니다.

 
전에 烏喇總管 穆克登을 파견하여 변계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이미 조사한 지역의 지도를 그려 바쳤으나, 길이 멀고 물길이 커서 지정한 곳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내년 봄에 다시 의주에서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서 육로로 토문강을 찾아가 조사하도록 하라. [주003]
번역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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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의 일부가 생략된 내용이다.


 

이 비석은 강희 51년에 세워졌지만, 이에 관한 상유가 없고, 또한 이해에 올려진 상주문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 전해의 상유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비석을 세운 곳이 바로 경계를 나눈 곳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문에 특별하게 “審視”는 두 글자를 앞에 덧붙였지 “分界”라는 글자를 써넣지 않았던 것은 원래 깊은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날로 와전되었으므로 조선에서 계속 잘못된 생각을 고집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설사 당시 비석이 과연 이곳에 있었다고 해도 역시 경계를 나눈 비석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돌더미·흙무더기 부분에 관해서 토착인에게 상세하게 물어보니, 옛적에 사냥꾼들이 산에 들어갈 때 길 안내 삼아 쌓은 것이라고 하므로 더 이상 깊이 따져 물을 것이 못됩니다. 이러한 주장을 가지고 안변부사와 거듭하여 논쟁을 하여 그가 결국 마음으로 굴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번에는 눈이 깊이 쌓이고 물이 말랐기 때문에 석을수를 조사하지 못했는데, 조선에는 島浪水라고 부르며, 소홍단에서 휘어져 서쪽을 향해 흐르다, 장파를 감싸고 돌고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증산에 바짝 들러붙어서 흐르다가, 석을수와 홍토수의 합류지역을 경과하여 서남쪽으로 나가다가 다시 서쪽을 향해 흐르면서 물줄기 하나와 만납니다. 이 물줄기는 서남쪽을 향해 흐르며, 길이는 12리, 폭은 2~3丈이고, 깊이는 5~6尺입니다. 이 물줄기가 끝나는 곳에서 또한 黃花松甸의 물줄기에 접하는데, 물의 흔적이 깊고 진흙 때문에 지나가기 어렵습니다. 서쪽을 향해 5리를 흐르다 다시 한 물줄기와 만나는데 폭은 4~5장에서 2~3장이고, 깊이는 1~2장 등 조금씩 다릅니다. 서북쪽을 향해 흐르는데 길이는 22리이고 소백산 동쪽 기슭에 이릅니다. 석을·홍토 두 물줄기가 나뉘는 곳을 놓고 비교해보면 석을수는 약 3장 남짓한 폭이고 홍토수는 겨우 2장 정도로 폭이 한 배 반 차이가 납니다. 즉 물줄기의 길이를 따진다면 석을수의 발원지(까지의 거리) 역시 홍토수의 발원지보다 더 길고, 게다가 원류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작년 비록 석을수를 보았지만, 얼음과 눈이 깊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그 발원지를 찾아보지 못했으므로 깊은 논의를 하지 못했는데, 이제 석을수를 조사해보니 무산에서 소홍단까지 109리 180보이며, 또한 소홍단에서 발원지까지는 170리 325보로, 합계하면 280리 정도가 됩니다. (강희제의 상유에서 지적한) 잘 알지 못하는 땅의 길이와도 일치하고, 그리고 서쪽으로 뻗어 길주 경계로 들어가고 남쪽으로 뻗어 증산으로 꺾어 들어간다고 한 것과도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또한 『흠정회전도설』을 보면 대도문강은 장백산 동쪽 기슭에서 나와 두 강물과 합류한다고 분명하게 실려 있습니다. 소도문강은 그 북쪽의 작은 두 물줄기로, 모두 동남으로 흘러가 합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장백산의 형세를 살펴보면,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둥글게 우뚝 솟아있으며, 높이는 200리로 천 리에 걸쳐 뻗어 있습니다. 정상에는 큰 연못이 있는데, 모든 강물의 발원지이며, 『(欽定)盛京通志)』에 기록되어 있어 분명히 확인이 가능합니다. 저희들이 이번의 재감계에서 측량위원과 함께 두 차례 (天池의) 물가에 이르러 측량을 하려고 했으나 마침 예상치 못한 짙은 구름과 안개가 갑작스레 일어나고, 눈바람이 크게 일어나, 그 폭을 정확하게 측량하지 못했습니다. 산에 올랐을 때 바람은 온화하고 햇볕은 따뜻했으며, 날씨는 아주 맑아 여러 산봉우리들을 멀리서 바라봐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장백산의 남면을 보니 두 줄기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한 줄기는 서남쪽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盛京쪽으로 뻗는 줄기입니다. 다른 한줄기는 구불구불 浦潭山쪽으로 뻗는 동남쪽 줄기로 臙脂峰·小白山 등은 이 줄기에서 다만 조금 위로 솟아오른 작고 뾰족한 봉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줄기의 서쪽은 압록강의 발원이고, 서두수·홍단수·석을 수 등은 모두 그 동쪽 기슭에서 흘러나오니 실로 하나의 큰 분수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백산과 소백산은 서로 떨어진 거리가 멀지 않고, 천 리나 뻗어 있는 산맥이라는 점에 서 보면 소백산 동쪽 기슭이 곧 장백산 동쪽 기슭이니, 하필 이름을 달리 바꾸어 부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소백이라고 칭하는 까닭은 조선인들이 그렇게 불러온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으로, 갑자기 그 이름을 바꾸면 서술하기 곤란한 점이 있기 때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산세와 강물의 형태를 분명하게 참고하여 살펴보고, 欽定으로 만들어진 여러 책으로 증명해보면, 석을수의 수원이 분명하게 장백산 동쪽 기슭 아래서 나와 홍토산수와 합류하니 대도문강 발원지로서의 형세와 딱 들어맞습니다. 紅旗河는 그 북쪽에서 흘러나오며, 발원은 外馬鹿溝이고, 또한 작은 물줄기 둘과 합류하는데, 모두 동남쪽으로 흘러가 합류하면서 소도문강을 이룹니다. 생각건대 조선에서 소백산이라고 부르는 곳은 실은 분수령입니다. 만약 이 분수령 아래의 석을수 발원지를 대도문강 발원지로 본다면, 조금도 억지가 없을 것으로 보이며, 또한 발원지 부근 물줄기 양쪽 언덕은 모두 沙石으로 이루어져, 그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를 분명하게 지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소백산에 서 압록강 발원지를 측량해보면, 서로 42리가 떨어져 있으므로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는 비문의 여덟 글자와도 모두 하나하나 들어맞습니다.
저희들이 안변부사와 함께 재감계를 실행한 상황은 이와 같습니다. 원래 총리아문의 원주에 나온 취지에 따라 세밀하게 공동감계를 실행하여 적절하게 경계지역을 설정하고자 하였는데, 안변부사는 마음속으로는 동의하면서도, 조선정부가 반드시 홍토산수를 대도문강의 강원으로 지적해야만 비로소 경계를 확정 지을 수 있다고 명령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시종일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안변부사는 홍토산수가 비석이나 돌더미와 이어지지도,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을, 그리고 동붕 남면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바로 송화강의 발원지로) 역시 비석이나 돌더미와 서로 관련이 없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안변부사가 사실에 의거하여 답장으로 보낸 조회는 과거 정한 옛 경계가 아님을 알지만, 다만 정부의 명령 때문에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하면서, 저희들에게 간청하기를 이번에 조사한 석을수를 포함한 지도를 그려서 돌아가 대인께 보고하고 총리아문에 자문으로 전달하여 (총리아문에서 대신 상주를 하여) 황상의 재가를 받기를 기다리자고 하였습니다.
이전에 鐘城府使가 海蘭河를 分界江으로 잘못 지목하였는데, 조선 정부에서 그 허실을 살피지 못하고 그 일방적인 이야기만을 믿고 여러 가지로 주장을 내세웠습니다. 다행히도 총리아문의 상주로 확실한 반박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더 이상 그런 주장을 늘어놓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정부는 전에는 해란하를 경계로 잘못 지목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다시 홍토산수가 伏流한다고 오해하여 이것을 대도문강의 옛 경계라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元山坐探委員 姚文藻의 보고에도 “해당 부사가 일찍이 언급하기를 송화강·해란하를 경계로 지목한 것은 오류였지만, 조선 정부의 지시 때문에 감히 받들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 내용이 있으므로, 조선 정부에서 누차 지시를 내렸다는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한 번, 두 번 계속 잘못을 저지르면 도대체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대인께서 자세히 검토해보시고 총리아문에 확실하게 자문을 보내 요청해주심으로써 지도에 따라 경계를 지정하여 일을 조속하게 마무리하고, 그들이 또다시 억지를 부리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우러러 간청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때문에 저희들이 공동으로 논의하여, 조사한 여러 물줄기에 대해 측량한 거리에 따라 상세하게 그린 똑같은 지도 두 장을 겹쳐놓고 한꺼번에 직인을 찍은 다음 각기 한 장씩 가지고 돌아가 보고하기로 하였으며, 따로 측량한 거리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여 함께 사실에 의거하여 보고합니다. 대인께서 검토해보시고 총리아문에 자문을 보내 대신 상주하여 황상의 재가를 받아 경계를 확정할 수 있도록 요청하여 주십시오.
또한 (추가로 말씀드립니다.) 경계를 정한 이후에는 응당 지시에 따라 따로 界碑를 세워 옛 경계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반면 穆克登이 세운 비석은 이미 경계와 관련이 없고, 나아가 돌더미·흙무더기 또한 松花江 상류로 연결되는 것이므로 지금 이 비석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장래에도 의혹으로 남아 또 다른 말썽이 발생할 수도 있으며, 또한 송화강에도 방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를테면 석을수의 발원지로 경계를 정한다면, 즉 소백산 동쪽 기슭에서 시작하여 무산성에 이르기까지 응당 요지를 골라 비석을 세움으로써, 경계의 구분을 명확히 하고 또한 영원히 흔적이 남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비석을 세워야 할 곳을 미리 공동으로 결정한 다음 다른 주접 뒤에 첨부함으로써 나중에 다시 우여곡절을 겪는 것을 피하고자 하오니, 대인께서 참작하여 결정하신 다음 아울러 자문을 보내 밝혀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삼가 도문강 경계를 재감계한 실제 상황과 직인을 찍은 지도·목록을 함께 첨부하여 보고를 올리니 검토하시고 처리해 주십시오.
지금 해당 위원 등은 홍기하가 소도문강이고, 석을수가 홍토산수와 합류하여 흘러가는 곳이 대도문강이며, 소백산에서부터 압록강 발원지까지 측량해보면 서로 떨어진 거리가 42리로,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다”는 비문의 내용과도 모두 하나하나 들어맞는다고 하면서, 이곳을 경계로 삼고자 한다고 합니다. 이 주장은 또한 이전 자문에서 그 당시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웠다면 마땅히 삼급포 일단의 분수령 위이어야 한다고 했던 지적과도 서로 들어맞습니다. 그렇지만 변경 지역의 출입과 관련된 문제라서 조선의 안변부사가 비록 마음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말로는 여전히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였기 때문에, 단기간 내에 경계를 확정하기는 힘들었으므로, 응당 재감계 상황 및 직인을 찍은 지도와 목록을 아울러 자문으로 보내니, 귀 아문에서 검토해보시고 상주하여 황상의 재가를 받은 다음 시행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세운 비석은 갑작스레 철거하기 곤란하므로, 이번에 경계를 확정할 때 조선의 위원과 함께 ‘華’字[로 시작되는 열 개의] 비석을 세우는 곳에 옮김으로써 나중에 참고할 수 있게 했으면 한다는 점을 아울러 밝히는 바입니다. 이상입니다.
이에 대해 곧바로 본 아문은 7월 22일 길림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 자문을 보냈습니다.
길림과 조선에서 공동으로 도문강 경계지역을 조사한 사안은 전에 본 아문에서 두 차례에 걸쳐 귀 장군에게 지시하여 적당한 위원을 파견하여 상세하게 공동감계를 실행함으로써 경계를 정하고, 앞서 언급된 조선 유민들을 각기 안치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주청한 바 있고, 이를 재가하는 황상의 유지가 내려와 이를 옮겨 적어 귀 장군에게 통보한 바 있습니다. 생각건대 조선은 대대로 藩封의 지위에 있으면서, 역대 황상께서도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뜻을 베풀어 적게 오더라도 후하게 보답하는 등 본래 이른바 경계를 나눈다고 할 것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강희 연간에 烏喇總管 穆克登이 유지를 받들어 변계를 조사했을 때 그가 세운 비문에는 단지 도문·압록 두 강의 발원지만 기록하고 있을 뿐, 결코 分界라는 글자는 없었던 것인데, 무슨 이유로 (조선의) 변경 관리가 이것을 와전시켜 느닷없이 경계를 나누었다는 증거로 삼는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崇德 2년과 4년에 대규모 전쟁이 있었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外藩 (몽골의) 科爾沁部를 지휘하여 조선의 함경도를 출입하면서 瓦爾客를 정벌했었는데, 회녕·무산 일대는 모두 정벌군이 왕래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었으므로 당시 함경·평안도의 북부 지방은 땅은 넓고 인적은 드물지만 조선 백성이 장백산 경내로 들어와 토지를 차지하고 개간하면서 거주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태평한 세월이 오래 되자 조선 백성의 수가 날로 늘어나나 점차 함경도 북방을 개간하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유민들이 결국 寧古塔·琿春 등지에 뛰어들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백여 년 동안 생활이 안정되어 백성이 원기를 회복한 덕택이라는 점은 너무도 분명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조선 관리는 백성을 거두어들여 안치할 수 있는 땅이 없기 때문에 越墾한 지역을 차지하고자 꾀하게 되어 마침내 번거롭게도 공동감계라는 조치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 해당 위원 등이 지목한 석을수의 발원지에서 무산성까지는 약 280리로 『欽定會典圖(說)』에 대도문강은 장백산 동쪽 기슭의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 방향에서 나온다고 기록한 것과 대략 맞추어보면 상당히 들어맞습니다. 따라서 小白山·黃花松甸子·石乙水·長坡浮橋 등지에 계비를 열 군데 세우고, 번호를 붙이는 일 또한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감계에서 귀 장군이 각 부분에 대해 조사하여 밝힌 방법은 아주 공정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해당 지역은 吉林·寧古塔에서 관할하는 지역으로 해당 위원 등이 공동감계를 할 때 이미 단서가 마련되었으므로, 응당 어떻게 조선의 부사와 함께 계비를 고쳐 세울지, 그리고 앞서 언급된 월간 유민을 각기 (조선으로) 쇄환시키거나 아니면 (중국의 호적에) 편입시켜 안치시킬지 하는 점은 모두 귀 장군이 명확하게 검토한 다음, 조선의 감계관에게 조회하여 함께 조사하고 비를 세운 다음 독자 안건으로 상주하여 판단해서 처리하십시오.
그런데 이렇게 답장 자문을 보낸 다음 앞서와 같은 귀 북양대신의 자문을 받았으므로, 응당 앞서의 문건을 베껴 쓴 것과 아울러 길림에서 보내온 계비를 세우려고 하는 장소의 목록한 건과 지도 한 장을 지금 귀 대신께서 참고하시도록 자문으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길림장군이 상주한 다음 유지를 받들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그에 따라서 시행하면 될 것입니다.
 
별지 : 1) 「길림에서 파견한 관원 진영, 조선감계사 이중하의 회녕부에서의 설첩(說帖) 조회」
 
 
별지 : 중한(中韓) 경계는 목극등(穆克登)의 비문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이중하(李重夏)의 회담 요약 문서
 
 

(1) 이중하의 주장

 

감계 문제에서 조선의 본의가 어찌 영토를 확장하려는데 있겠습니까? 단지 백성의 사정이 어렵고 안타까워서, 일단 비석의 경계를 검증하여 숨김이 없는 마음을 밝히고, 그 다음에 경계를 표시하여 백성을 안정시키려는 것이니, 오로지 귀국이 너그럽게 은혜를 베풀기를 바랄 뿐입니다. 乙酉年(1885) 총리아문의 상주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欽定皇朝通典』「邊防門」과 『欽定(皇朝文獻通告)』「四裔門」에 모두 길림과 조선은 도문을 경계로 한다고 실려 있습니다. 또한 말하기를 『一統輿圖』와 『[大淸]會典圖』에 실려 있기를 중국의 영토는 도문·압록 두 강을 동서의 양 경계로 하며, 표시가 분명합니다. 백두산은 중국과 조선의 경계에 있는데, 백두산은 장백산의 다른 이름으로, 두만은 도문에서 발음이 바뀐 것으로, 방언이 서로 다르지만 실은 하나의 강입니다.
 

지난해 봄 경계를 조사하여 지도를 그린 다음 총리아문이 보낸 자문에서는 또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길림·조선의 경계 지역에서 조선 경내 무산부 동쪽 회녕·종성·경원·흥경과 동쪽으로는 鹿屯島의 해구에 이르는 곳은 당연히 도문강이 천연의 경계로 이것을 구분하고 있어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무산의 서쪽에서 위로 분수령의 穆克登總管이 비석을 세운 곳까지는 응당 명확하게 확인하고 고증해야 하니, 길림에 곧바로 공동감계를 지시해야 할 것입니다.
 

조선에서는 처음에는 백성의 안위 문제 때문에 논쟁한 바가 있었는데, 앞뒤로 전달받은 총리아문의 상주문은 이렇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도문·두만이 하나의 강이고 도문강이 천연의 경계라는 것은 예전 기록에 실려 있으므로, 조선에서는 오로지 비석·무더기와 도문강의 위치가 서로 들어맞는가 하는 점을 고증하여 밝히고자 하니, 이것은 귀국의 의견을 존중하여 따르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貴 督理(즉 秦煐) [주001]
번역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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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독리길림조선상무 겸 도문강감계사의 보용지현(督理吉林朝鮮商務, 兼理圖門江勘界事宜, 補用知縣)인 진영(秦煐)을 가리킨다.

께서는 여전히 홍단수로 경계를 정하자고 말씀하시니 정말로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일입니다. 홍단수는 소백산 이남에 있고 원래 조선 내지에 속하는 것으로 경계 문제를 논의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물며 무산의 長坡 등지는 바로 그밖에 존재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총리아문의 이전 자문 역시 분수령에 비석을 세운 곳을 확인하고 고증하는 것을 주로 하였기에 지금 다시 감계를 하였던 것이고, 도문강 옛 경계와 목극등 비석의 지역을 다시 조사함에 있어 힘써 『일통여도』에 비추어 보아 들어맞는 것을 찾으면 감계가 완료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귀 독리는 홍단수·서두수를 막연히 지칭하는 것이 무슨 이유인지 알기 어려운데, 사실 기록이 존재하게 된 이래로 모두 장백산을 도문강의 발원지로 보아 왔으며, 지난해 귀국의 논의도 역시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장백산에서 발원한 도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다가, 지금 갑자기 소백산 이하의 발원지를 가리키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바입니다. 하나하나 답변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4월 7일)
 
별지 : 공동 감계(勘界)는 수원(水源)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진영(秦煐)의 회담 요약 문서
 
 

(2) 진영의 답변

 

지난해 공동감계에서 조정의 지시는 강의 흐름을 따라 강의 발원지를 찾는 것이었지, 우선 강의 발원지를 찾은 다음 강의 흐름을 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무산에서 三江口에 이르렀을 때 세 길로 나누어 우선 강의 발원지를 찾기로 하였는데, 뒤이어 李重夏 府使가 비석과 무더기에 관한 주장을 고집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한번 가서 조사함으로써 그 의심을 풀고자 하였습니다. 부사는 처음에는 물의 흐름이 서로 이어지며 紅土山에서 董維窩棚에 이르러서는 모두 비스듬한 언덕으로 아무런 물의 흐름이 없다고 하였고, 따라서 지도를 그려 직인을 찍기까지 아무런 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도를 그린 먹물의 흔적이 마르기도 전에 또 다시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홍토산수가) 40리를 복류한다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흠정대청)회전』등의 여러 기록을 두루 찾아보아도 도문강의 근원을 논한 것에는 이러한 해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귀 정부에서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입니까? 지금 李重夏 부사는 강의 경계를 조사하러 와서는 처음에는 비석과 무더기를 이야기하더니, 다음에는 복류를 가지고 강변을 하고, 그 다음에는 홍토산을 발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등 말을 자주 바꾸고 있습니다. 또한 강의 흐름에 따라 강의 발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선 강의 발원을 찾아놓고 그 다음에 강의 흐름을 정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이른바 비석의 경계를 검증 하겠다는 것은 변경을 조사한 비석(査邊之碑)을 경계를 가른 비석(分界碑)으로 보겠다는 뜻입니다. 조선정부에서 베껴서 중국의 예부에 보내온 『承文院故實』은 “강희 50년 8월 4일 목극등을 장백산으로 파견하여 우리 쪽의 변경과 조선은 관계가 없음을 밝히라는 황제의 유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조선은 관계가 없다”는 구절이 있으니 穆克登이 세운 비석은 바로 변경을 조사한 비석이지 경계를 가른 비석이 아니라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물며 총리아문의 상주에서도 穆克登의 비문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단지 “유지를 받들어 변경 조사를 위해 여기에 이르렀다. 자세히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 동쪽은 토문이다”는 내용뿐입니다. 그래서 분수령에 비석을 세워 기록한 것일 뿐이지, 결코 경계를 나누었다는 글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비석을 세운 곳이 반드시 당시 경계를 나눈 곳이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결국 松花江 (상류) 위쪽의 비석[즉 이른바 백두산정계비]을 근거로 삼는다면 총리아문의 상주와 들어맞지 않을뿐더러, 귀국의 『承文院故實』과도 부합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른바 홍단수의 상류 위에 경계를 정한다는 것은 바로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던 말이라고 하는데, 총리아문의 상주에서도 분명히 “압록강의 발원은 압록이 아니라 건천구라고 부르고 있으니, 도문강의 발원도 반드시 도문이라는 이름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盛京通志』를 보면 “장백산은 많은 강의 발원지로, 작은 것은 河가 되고 큰 것은 江이 된다. 크고 작음을 구별하는 것은 또한 역시 확실하게 강의 발원지를 찾는 방법이기도 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서두수라는 것은 지도 속에 魚潤河로 기록되어 있고, 홍단수는 紅丹河로 기록되어 있으며, 三池는 다루지도 않고 있어 명칭이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제시한 지도라는 것도 저자거리의 복사본으로 출처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찌 중국과 조선의 인원이 조사하여 함께 작성한 지도를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도리어 복사본을 근거로 삼는 것입니까? 이번에 총리아문에서 도문강 경계를 다시 조사할 것을 상주하여 요청한 것은 전번 감계가 분명한 분석과 검증을 거치지 않고 계산한 거리 수가 단지 토착민의 이야기에만 의거하여 충분히 믿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제대로 된 거리를 측량하여 증거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경계를 나누는 주장은 산세에 따르든 강의 모양을 따르든 결국 강의 발원지를 확실하게 찾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합니다. 이번의 재감계는 李重夏 부사와 만나 함께 무산 서쪽 지역으로 가서 산세를 따르든 강의 모양의 따르든, 강의 흐름을 따라 발원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곳곳마다 측량하여 거리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연도 지역도 하나하나 분명하게 확인하면서 다시 논의하여 경계를 정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경계를 가르는 요령이고, 총리아문이 재조사를 상주하여 요청한 본뜻이기도 합니다.
조사에 의하면 강의 흐름은 세 갈래가 있는데, 측량위원을 파견하여 먼저 출발하게 하고 本 局處 [주002]
번역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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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춘부도통아문(琿春副都統衙門)의 변무승판처(邊務承辦處) 또는 거기에 근무하는 관원을 가리킨다,

는 부사와 함께 만나 출발을 결정하려고 합니다. 부사께서도 인원을 먼저 파견하여 동행하게 함으로써 기일을 정해 진행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11일)
 
별지 : 중한(中韓) 경계는 목극등(穆克登)의 비문이 근거가 된다는 이중하(李重夏)의 회담 요약 문서
 
 

(3) 이중하의 주장

 

을유년 겨울 감계의 사명을 받고 와서 총리아문의 상주문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도문을 경계로 하며, 두만은 도문에서 바뀐 이름이다. 기존의 기록과 지도를 살펴보고 그것을 근거로 삼았다.
 

또한 귀 국처와 더불어 친히 가서 자세히 조사한 다음 누차 토론을 거치고 이것을 우리 조정에 보고하였습니다. 이 이후로 조선에서 어리석게 편견을 고집하지 않고 오로지 도문의 옛 경계 만을 준수하려고 한다는 점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보내주신 글 가운데 여러 가지는 분명히 논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홍토수가 비의 경계에 접하지 않은데 다시 억지로 말을 꾸며냈다”고 하는데, 복류하는 이야기는 원래 穆克登總管이 咨文에서 한 말의 일부분이지, 저희 정부가 처음 만들어 내놓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경계비를 조사·확인하겠다는 것은 변경을 조사한 비문을 경계를 나눈 비문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백두산의 이 석비는 오래전부터 중국과 조선의 300년 경계가 되어왔으며, 국가의 역사기록이나 야사 모두 이를 싣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종래 귀 국처에서는 이것을 나중 사람들의 위작이라고 주장하였고, 또한 간사한 백성이 비석을 옮겼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런 주장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총리아문의 상주문도 따라서

 
당시 비석을 세운 곳이 반드시 당시 경계를 나눈 곳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변경지역을 조사하고 비석을 세우는 것이 경계를 정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조선의 承文院에 있는 국경 관계 기록 가운데 당연히 穆克登總管이 올린 상주문과 조선에 보내온 자문이 모두 존재하고 있으니, 당시에 경계를 구분했는지의 여부를 판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과거의 일을 따지지 않고 막연하게 이야기하면서, 이 비석이 압록강과 송화강 사이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실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통지』에 말하기를

 
장백 이남은 조선의 경계이다.
 

고 했으며, 『(皇朝)通志)』에도

 
조선은 도문강을 경계로 한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지도와 기록에 실려 있는 것이 이와 같으니, 목 총관이 변경을 조사하여 비석을 세우는 날 어찌 장백산을 버리고 소백산에 세웠겠으며, 도문강을 버리고 홍단수에 세웠겠습니까? 도문강 발원지가 비석과 약간 멀리 떨어져 있기에 흙무더기를 쌓아 이것과 연결되도록 하였던 것이라는 점은 지금 압록강에 흙무더기가 없는데 동쪽에는 흙무더기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바입니다. 또한 무더기의 끝 부분이 남쪽으로 뻗쳐 있는 것을 자세히 보면 분명히 알 수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총리아문의 상주에서

 
압록강의 발원은 압록이라 하지 않고 建川溝라고 하고 있으니, 도문강의 발원도 반드시 도문이라는 이름을 가질 필요는 없다.
 

라고 한 부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귀 국처에서 이전에 홍단수로 보고하여 변계의 사정을 위쪽으로 제대로 알리지 않은 데서 비롯된 일입니다. 『일통여도』가운데 압록강·도문강의 경계 부분을 살펴보면, 점과 선으로 표시한 부분은 아주 분명합니다. 홍토수가 대도문강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주석이 붙어 있습니다. 그 남쪽에는 또한 小白山, 三池, 紅丹河 등의 지명에 주석을 단 글자가 있으니, 이것 또한 아주 정확한 근거가 아니겠습니까? 이전에 감계를 할 때 귀 국처는 매번 기존의 기록과 지도를 근거로 하면서도 누차 그것을 보여달라고 이쪽에 서 요청하였으나 결국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귀경한 다음 지도 한 장을 구해 왔는데, 또다시 이것이 복사본이므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하니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일통여도』와 이전의 조사 결과는 원래 큰 차이가 없으니, 청컨대 『일통여도』의 어느 부분이 믿을 수 없는 것인지 하나하나 맞추어 가면서 분명하게 지적해주십시오. 요컨대, 이번 감계에서 조선은 오로지 삼가 도문의 옛 경계를 지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귀국처가 받은 총리아문의 지시와 가져오신 지도 역시 공개하여 공정하게 고증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위원을 파견하여 우선 측량하게 하는 것은 감히 요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원래 지난해 총리아문의 재감계 지시에서

 
무산 서쪽으로 穆克登이 비석을 세운 분수령까지의 지역은 응당 고증해야 할 것이 있고 명백하게 확인해야 한다.
 

고 하였지만, 고증할 것이 어찌 여기에만 한정되겠습니까? 현재 귀 국처는 조선 내지의 홍단수와 서두수의 경계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경계 지역이 아니므로 실로 다시 논의할 만한 재조사의 필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다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13일)
 
별지 : 무산(茂山)에서 분수령(分水嶺)까지 수원(水源)을 기준으로 경계를 밝히자는 진영(秦煐)의 회담 요약 문서
 
 

(4) 진영의 답변

 

비석과 무더기에 관한 것은 귀국 『承文院故實』이 설명하는 것처럼

 
황상의 유지를 받들어 변경을 조사하는 것으로 귀국과는 관련이 없는 일
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경계 구분의 문제를 자세히 생각하면 어찌 조선과 관련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총리아문에서도 또한
 

 
비문의 내용에 경계를 구분한다는 글귀가 결코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비석과 무더기는 송화강의 상류 위쪽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며, 李重夏 부사 역시

 
이 비석은 압록·송화 두 강의 발원지 사이에 있어, 실로 들어맞지 않는다.
 

고 하였습니다. 들어맞지 않는 것을 알면 반드시 세밀하게 강의 발원지를 비교하고, 이 비석이 응당 어디에 세워져 있어야 하는지를 확인해야만 비로소 들어맞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총리아문의 재감계 지시에서

 
무산 서쪽으로 穆克登總管이 세운 비석까지의 지역은 응당 고증해야 할 것이고 있고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라고 한 구절을 들었습니다만, 총리아문에서 말한바 무산 서쪽으로 穆克登總管이 세운 비석까지의 지역이라는 것은 그 비석이 응당 도문강 발원지에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이며, 이런 까닭에 이후의 지시는 모두 도문강 발원지까지의 지역을 언급하고 있으니, 자세히 고증해보면 松花江 상류 위의 비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고증과 확인의 정확한 취지를 알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강의 발원을 고증하여 강의 경계를 확인한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전에 조사한 비석을 세운 곳은 분명히 松花江의 발원지인데, 무엇을 고증하고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선 인원을 파견하여 측량위원과 함께 먼저 출발하게 하든 지, 아니면 본 국처와 부사가 측량위원과 함께 출발하든지 하여, 도문강의 흐름을 따라 강의 발원지를 찾아 경계를 정함으로써 더 이상 지체되지 않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14일)
 
별지 : 목극등(穆克登)의 비문이 유지(諭旨)에 따른 것이므로 분계(分界)의 근거가 된다는 이중하(李重夏)의 주장 문서
 
 

(5) 이중하의 주장

 

귀국의 통보에서는 “조선과 관련이 없다”는 구절과 비문에 “分界”라는 구절이 없는 것을 가지고 결코 경계를 나눈 비석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증명할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조선 承文院의 국경 문제에 대한 기록 가운데 穆克登總管의 상주문과 조선에 보낸 공문 두 통을 지금 베껴서 보내니, 살펴보시면 이 비석이 경계를 정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보내주신 공문에서 말하기를 “총리아문의 지시는 강의 발원을 고증하라는 것이지 경계비를 고증하라는 것이 아니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비석은 聖祖 康熙帝 시절에 烏喇總管이 유지를 받들어 변경지역을 조사한 다음 세운 것으로, 조선에서는 수백년 동안 金石처럼 받들어 왔는데 귀국처는 이에 대해 고증할 뜻이 없으니 어찌 총리아문 지시의 본 취지가 이런 것이겠습니까? 또한 이것이 어찌 藩邦에서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이전의 답변 가운데 “대강 살펴보니 들어맞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는데, “대강 살펴본다”는 말 자체가 기실 들어맞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주며, 그 아래 또한 『성경통지』와 『[황조] 통전』에 실린 확실한 기록을 검토하였다고 하면서도 왜 자세히 살핀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아울러 비석이 응당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서 고증·확인하여 밝히고자 합니다. 이 비석은 강희 연간 壬申年(1712) 5월 15일 세운 것이고 비석에서 도문강 발원지까지의 사이에는 중간에 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때 흙을 쌓고 나무울타리를 두른 일은 穆克登總管이 보낸 자문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承文院의 옛 기록은 이미 복사하여 예부와 북양대신 아문에도 보낸 바 있는데, 이 비석이 경계를 가른 비석이라는 첫 번째 증거입니다. 지금 『일통여도』에 따르면 장백산 남쪽 압록강과 도문강 사이의 물이 없는 곳을 살펴보면, 점과 선으로 표시한 부분이 있어 그 경계가 아주 분명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증거입니다. 『성경통지』에는 오라에서 관할하는 곳에 대해서 “남으로는 장백산에 이르고, 그 남쪽은 조선의 경계”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한 寧古塔에서 관할하는 곳에 대해서도 “남으로는 장백산에 이르고, 그 남쪽은 조선의 경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비석이 장백산 남쪽 기슭에 있으니, 처음 비석을 세운 경계라는 세 번째 증거입니다. 도문강 상류에는 세 갈래 물줄기가 있습니다만, 반드시 홍토산수를 대도문강으로 보아야 하니, 여기에는 증거가 있습니다. 『일통여도』에 의하면 장백산 동쪽에 물줄기가 있고 대도문강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이른바 홍토산수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또 그 동북쪽에 물 한줄기가 있는데 소도문강이 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 紅旗河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장백산 남쪽에 산이 있는데 소백산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남쪽으로 세 개의 동그라미가 있는데 三池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아래에 한 줄기 강이 있는데, 紅丹河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 이른바 三泡·紅丹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남쪽의 한 줄기 강이 가장 긴데 魚潤河로 기록되어 있으니, 오늘날 西豆水라 불리는 것입니다. 소백산·삼지·홍단수의 북쪽에 강이 있는데 바로 대도문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제가 지적하는 홍토산수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이 북쪽에는 소도문강 한 줄기만 있고, 그밖에는 오로지 해란하 뿐으로 다른 강은 없습니다. 그러니 홍토수가 대도문강이라는 것이 어찌 정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외의 지도를 살펴보고 하나하나 조사하여 살펴보니 조금도 잘못된 점이 없습니다. 도문강의 문제는 이것으로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요컨대 강으로 말하자면 홍토수가 대도문강이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확실합니다. 기록과 지도에 실려 있으니 당연히 찾아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비석으로 말하자면 穆克登總管이 황제의 유지를 받들어 세운 것입니다. 사실은 분명하며, 康熙時代의 옛 흔적은 바뀔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비석에서 강에 이르기까지 흙무더기가 모두 다 연결되어 있지 않아 쉽사리 의혹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지금 응당 홍토산수 위에 비석을 하나 세워 穆克登碑石의 지위를 확정하고 변경의 경계를 명백히 밝혀 옛 경계를 준수한다면, 조선 백성은 한 걸음이라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성의를 가지고 간청하는 바이며, 그밖에 다른 말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살펴 주셨으면 합니다. 요청하신 江의 勘定에 대해서는 응당 따로 한 사람을 파견하여 기한을 정해 함께 가도록 할 것입니다. (15일)
 
별지 : 측량위원을 파견하여 수원(水源)을 측정할 것이라는 진영(秦煐)의 주장 문서
 
 

(6) 진영의 조회

 

길림파원 진영이 조회합니다. 귀 부사의 답장을 받았습니다. 번잡한 것은 모두 삭제하고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만, 말미에 따로 “따로 한 사람을 파견하여 기한을 정해 함께 가도록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지금 측량위원 劉虞卿을 파견하면서 弓兵, 繩手, 측량기구, 낙타와 말(駝馬)을 이끌고 17일에 출발하여 측량을 시작하였으면 합니다. 귀 부사께서 어떤 인원을 파견하든 빠른 시일 안에 결정하여 같이 출발할 수 있게 하십시오. 이상. (15일)
 
별지 : 이중하(李重夏)가 공동 측량에 동의하며 진영(秦煐)에게 보내는 답신(答信)
 
 

(7) 이중하의 답변

 

귀 국처에서 보낸 조회를 받았습니다. 제가 전에 보낸 답변 가운데 청조의 지도나 기록에 근거하여 홍토수가 확실하게 대도문강임을 입증하고, 아울러 穆總管의 경계구분에 관한 옛 기록을 베껴서 보내 드렸으니 확실한 근거가 있어 분명하게 살펴보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아직도 의심스러운 점이 남아 있다면, 응당 곧바로 반박하시는 내용을 보내셨을 터이고, 이래야만 바로 서로 고증하고 논의하자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점에 대해 가타부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시니 의아하기 짝이 없습니다. 옛 경계는 이미 의심할 나위가 없으므로, 다른 강에 대해서 실로 측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귀 국처에서 기한을 정하여 측량하고자 이렇게 일시를 정하니, 저희로서도 역시 당연히 인원을 파견해야 할 것입니다. 五衛將 吳元貞 등 2인이 17일에 출발하여 합류할 것입니다. 이상. (같은 날)
 
별지 : 목극등(穆克登)의 변경 조사는 분계(分界) 조사가 아니라는 진영(秦煐)의 주장 문서
 
 

(8) 진영의 답변

 

보내주신 글에서 “조선과 관계없다”고 한 상유 내용과 총리아문의 상주 가운데 “비문에는 경계를 나눈다는 글귀가 없다”고 한 것을 언급하였습니다만, 베껴서 보내주신 것이 穆克登이 받은 지시와 조선에 통보한 공문 두 건뿐인 것을 보면 이중하 부사도 결코 당일 穆克登으로 하여금 변경을 조사하게 한 상유를 자세하게 읽으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는 말이 모두 이치에 어긋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여기 삼가 다시 베껴서 보냅니다. 어찌 황제가 중외에 명백하게 공포한 聖諭가 穆克登의 공문보다 신뢰성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경계를 나누었다면, 응당 분명하게 경계를 나누는 상유를 내렸을 터인데, 어째서 경계를 나누도록 지시하는 상유에 “조선과 관계가 없다”는 글귀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조선과 관계가 없다고 했으면 중국 한 나라의 일이요, 분명히 두 나라 사이의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경계를 나눈다는 글자가 한 나라의 일입니까? 조선과 관계가 있는 일입니까? 아닙니까? “조선과 관계가 없다”는 글귀를 자세히 생각해보면 자연히 그 비석이 경계를 나눈 비석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측량 위원과 이 부사가 파견한 인원이 이미 출발하였으므로 우리 또한 출발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시일을 답변해주시면 같이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일)
 
별지 : 목극등(穆克登)의 석비(石碑)는 분계(分界)의 의미라는 이중하(李重夏)의 주장 문서
 
 

(9) 이중하의 답변

 

지금 穆克登碑石의 문제를 가지고 당시 황상의 상유 가운데 있는 “조선과 관계없다”는 뜻을 제시하셨습니다. 생각건대 조선의 변방 경계는 자고 이래로 원래 정해진 것이 있었고, 穆克登의 자문 가운데서도

 
원래 강북을 중국의 경계로 삼고, 강남을 조선의 경계로 삼기로 정해져 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논의하지 않는다.
 

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당시 유지를 받들어 변경을 조사한 것은 바로 원래 정해진 경계에 비석을 세움으로써 그것을 분명하기 밝히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조선에 대해 다른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아마 조선과 관계없다는 상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변경을 조사하여 비석을 세우는 것과 경계를 조사하여 비석을 세우는 일이 어찌 다를 수 있겠습니까? 비문에 경계를 나눈다는 구절이 없는 것은 당시 처음으로 경계를 나눈 것이 아니라, 이전의 관행대로 표시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경계를 나눈다는 구절이 있고 없는 것을 어찌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만 지금 조사하는 도문의 경계는 이미 의거할 수 있는 명백한 지도와 기록이 있으므로, 단지 홍토수 위에 비석을 하나 세움으로써 穆克登碑文에서 나오는 土門에 관한 논의를 분명하게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함께 공개적인 장소에서 논의한 다음 입산 일자를 결정함으로써 신속하게 출발하였으면 합니다. (같은 날)
 
별지 : 수원(水源)을 조사하겠다는 진영(秦煐)의 주장 문서
 
 

(10) 진영의 답변

 

보내주신 글은 “단지 홍토수의 위에 비석을 하나 세움으로써 穆克登碑文에서 이야기한 土門에 관한 논의를 분명하게 확인해야 할 것”이라고 하고, 아울러 공개적인 장소에서 논의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변론한 지 오래되었으나 지금까지 합의된 바가 없습니다. 이 부사는 홍토산에 비석을 첨가하자고 하고, 이미 비석이 세워질 곳을 아는데 어찌 다시 조사를 할 필요가 있습니까? 회의를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再勘界를 하는 이유는 그곳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발원지를 찾음으로써 경계를 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론이 공정하다고 할지라도 만약 각기 일 처리에 자기의견만 고집한다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그것보다는 날짜를 상의해서 정하고 신속하게 출발하여 지나가는 곳을 고증함으로써 원류가 서로 연결되고 경계를 분명히 나누게 하도록 힘쓰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본 국처는 이미 22일 출발하기로 논의하여 정하였는데 부사의 의견은 어떠신지? (같은 날)
 
별지 : 이중하(李重夏)와 공동 조사한다는 문서
 
 

(11) 이중하의 답변

 

이번 재감계는 오로지 옛것에 비추어 오늘의 것을 다시 확인하기 위한 일이니 힘써 공정하게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대·소도문강은 中外의 지도에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니 멀리 다른 강까지 측량할 필요는 없지만, 지금 귀 국처에서 단연코 강의 발원을 두루 조사하시겠다고 하니, 저희도 22일 가르침에 따라 출발할 것입니다. (같은 날)
 
별지 : 2) 茂山府 長坡에서의 조회
 
 
별지 : 홍단수(紅丹水)를 먼저 조사한 후 다른 수원(水源)을 조사하자며 이중하(李重夏)가 진영(秦煐)에게 보낸 조회(照會)
 
 

(1) 이중하의 조회

 

이번에 명령을 받아 토문강 경계를 재감계하게 되면서 조선 쪽에서는 우선 홍토산을 측량하고자 하였으나, 귀 국처는 우선 서두수를 측량하고 뒤이어 무산지방에 이르면 함께 먼저 홍단수로 가서 발원지를 살펴본 다음 長坡로 돌아와 공개적인 논의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서두수로 가든 홍토수로 가든 다시 순리에 따라 공정하게 확실한 조사를 함으로써 공무를 지체시키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상. (29일)
 
별지 : 홍단수(紅丹水) 조사에 동의하며 이중하(李重夏)에게 보낸 진영(秦煐)의 조회(照會)
 
 

(2) 진영의 답변

 

귀 조회를 받았습니다. 우리 쪽에서는 내일 귀 부사와 함께 홍단수로 가서 발원지를 조사·측량하고 만약 정확한 증거가 없다면 다시 장파로 돌아와 다른 곳으로 가서 조사하는 것을 논의한 다음 다시 조사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상. (같은 날)
 
별지 : 서두수(西豆水) 답사에 반대하며 이중하(李重夏)가 진영(秦煐)에게 보낸 조회(照會)
 
 

(3) 이중하의 조회

 

서두수가 국경 경계와 관계없다는 것은 왕년에 이미 누차 변론한 바입니다만, 뜻하지 않게 귀 국처는 다시 가서 이 강을 측량하려고 하니 실로 그 이유를 알기 곤란합니다. 도문강의 변계 형세를 살펴보면 모두 『一統輿地全圖』에 실려 있고, 지난해 총리아문의 상주에서도 “서두수가 대도문강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한 구절도 있는데, 이 구절을 가지고서는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저희는 단연코 귀 국처의 주장에만 따라 조사할 필요가 없는 강을 멀리 가서 조사하는 데에는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조회를 보내는 바입니다. 이상. (윤4월 초8일)
 
별지 : 서두수(西豆水)를 조사하자며 진영(秦煐)이 이중하(李重夏)에게 보낸 답장 조회(照會)
 
 

(4) 진영의 답변

 

귀 조회를 받았습니다. 총리아문의 상주를 보면 비록 “서두수는 대도문강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한 구절이 있지만, 그 아래에는 반드시 이것을 보충할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만 비로소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은 여전히 단정하지는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경계를 나누는 문제는 산이나 물의 형세를 따르되 확실하게 강의 발원지를 찾는 일을 주로 한다.
 

고 하였는데, 서두수가 도문강이 아니라는 것은 총리아문에서도 역시 단정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조사를 할 때 과연 보충할 확실한 자료를 찾아낸다면 다시 단정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결론은 확실히 강의 발원지를 찾는다는 구절에 무게의 중심이 두어져 있습니다. 강의 발원지를 찾는다면 이 산과 연결된 모든 강 역시 모두 조사해낼 수 있으며, 하물며 서두수는 폭이 큰 강이니 어찌 조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총리아문 상주문의 앞뒤 어조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고 음미한다면 자연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부사께서는 전에 조회에서

 
홍단수로 가서 발원지를 조사·측량하고 다시 장파로 돌아와 공동으로 논의한 다음 서두수로 가든 아니면 홍토산으로 가든 다시 순리에 따라 공정하게 분명하게 조사하자.
 

고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서두수로 가서 조사하는가의 여부를 논의하고 있는데 부사께서는 갑자기 주장을 바꾸니, 이전 조회의 내용과 서로 들어맞지 않는데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상. (같은 날)
 
별지 : 장백산(長白山)을 중심으로 답사하자며 이중하(李重夏)가 진영(秦煐)에게 보낸 조회(照會)
 
 

(5) 이중하의 답변

 

귀 조회를 받았습니다. 이번 강의 근원을 찾아 조사하는 일은 응당 순리대로 처리해야 하지 먼저 쓸데없이 앞뒤를 다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어제의 조회에서 과연

 
먼저 홍단수를 보고 나서 나중에 장파로 돌아와 공동으로 논의하여 순리대로 공정하게 확실한 조사를 하자.
 

고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귀 국처와 함께 논의한 후 홍단수에서 장파로 돌아온 지 이미 사흘입니다. 저희는 이전에 논의한 대로 누차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고자 하였으나, 그때마다 거절을 당하여 좀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방법이 없어 배회하다가 부득이하게 조회를 보내 글로써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대신하였지만, 거기서 말한 것은 총리아문의 지시를 따르는 것뿐이지 감히 그 밖의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요컨대 총리아문 상주문 끝 부분에

 
결국 도문강을 정확하게 검증한다면 경계는 자연히 분명해질 것이다.
 

고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바로 이번 재감계의 핵심이며, 이번 일은 오로지 도문강을 정확하게 검증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도문강은 장백산의 강이고, 지금 장백산의 입구에 이르렀으니 장백산에서 응당 조사해야 할 일을 제쳐 두고 도문강이 아닌 서두수로 가자고 하니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하겠습니까? 조선 측에서는 이치에 맞고 공정한 예전의 논의에 따르려고 서두수는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는데, 어찌 이전의 주장을 갑자기 바꾸었다고 하십니까? 이상. (같은 날)
 
별지 : 강물의 형세에 따라 서두수(西豆水)를 조사하자며 진영(秦煐)이 이중하(李重夏)에게 보낸 답장 조회(照會)
 
 

(6) 진영의 답변

 

보내주신 글을 받았습니다. 서두수를 다시 조사할 필요가 없으며 조사하면 이치에 맞지 않고 공정한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이전 조회에서는 왜 가서 조사한다면 이치에도 맞지 않고 공정하지도 않은 서두수를 언급하셨습니까? 하물며 서두수를 조사하는 일은 바로 도문강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장백산은 천여 리에 걸쳐 있어 강 흐름이 하나가 아니고, 도문강과 서두수가 같은 흐름이라면 어찌 도문강이 서두수의 발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까? 요컨대 강의 모양을 따라 강의 발원지를 찾으려면 응당 서두수를 조사하는 것이 바로 이치에 맞고 공정할 것입니다. 본 국처는 이미 11일에 같이 가서 조사하기로 결정하여 지체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이상. (초9일)
 
별지 : 서두수(西豆水) 답사가 부당하다며 이중하(李重夏)가 진영(秦煐)에게 보낸 조회(照會)
 
 

(7) 이중하의 답변

 

귀 조회를 받았습니다. 앞서의 조회 가운데 “혹시 가서”운운한 것은 두 강 가운데 결정하지 못하므로 출발에 임하여 지정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부득불 이치에 따라 이야기를 한 것인데, 귀 국처도 역시 “혹시 가서”라는 말을 가지고 따지는 것 역시 지나친 일이 아닙니까? 서두수에 관한 구절은 왕년 귀 국처의 조사 결과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는데, 단지 대·소국 사이의 강역 문제를 염두에 둔다면 당연히 『회전도설』과 『일통여도』가 천하에 공개적으로 간행되어 있고, 지난해 총리아문의 상주문에서도 경계지의 발원을 근거로 삼을 때에도 역시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여기에 『일통여도』가운데 길림·조선의 경계에 관한 부분을 베껴서 한 부를 보냅니다. 이 지도는 원래 경도·위도의 숫자에 근거하고 있어 동·서, 원·근이 일목요연하게 나타납니다. 바라건대 먼저 이 지도를 가지고 도문강의 산과 강을 살펴보고, 아울러 눈으로 측량한 바를 참고로 하면서, 하나하나의 물길기를 따라 방향에 따라 조사해나간다면 대·소도문강은 자연스럽게 확실한 경계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일은 공정하게 처리될 수 있을 터입니다. 11일 서두수로 가는 문제는 마치 북쪽의 燕나라로 간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남쪽에 있는 越나라에 이르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나 거의 마찬가지이니,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상. (같은 날)
 
별지 : 3) 홍토산수를 조사한 다음의 대화 및 조회
 
 
별지 : 홍토산수(紅土山水)가 도문강(圖們江)의 수원(水源)인지에 대한 변론
 
진영:지금 이미 강줄기를 모두 조사하였으니, 공평하게 얘기해봅시다.
이중하:공평하게 말한다면, 즉 홍토수입니다.
진영:그것이 과연 공평한 말입니까?
이중하:우리나라의 수백 년 동안 옛 경계로 정하자는 것입니다.
진영:그렇다면, 이 일은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당연히 홍단수로 하겠습니다.
이중하:그곳은 조선의 내지인데 귀하께서 비록 스스로 정하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정할 수 없습니다.
진영:길림의 땅이지 어찌 조선의 땅입니까!
이중하:『일통여도』에 당연히 대도문강의 경계가 있으니, 청컨대 물줄기를 따라 공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진영:지도는 황제께서 내리신 것입니까? 총리아문에서 보낸 것입니까? 지도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이중하:총리아문의 상주에서는 항상 지도를 가지고 증거로 삼았는데, 이것이 증거가 되지 못한다면, 다른 무슨 증거가 있겠습니까?
진영:총리아문의 공문을 보시겠습니까?
이중하:홍토산수는 귀 국처에서 지난해 조사해서 보고할 때 처음에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총리아문에서는 이 강의 존재를 알지 못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진영:홍토수는 귀 정부에서 누차 북양대신과 총리아문에 요청하였지만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단하로 정하려는 것입니다.
이중하:총리아문의 상주에 강의 발원이나 형태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홍토수가 대도문강이라는 것도 역시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진영:총리아문 역시 자세하게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들이 어떻게 보고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부사께서 매번 총리아문의 상주문을 근거로 삼는 것은 실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중하:이번에 상세한 지도를 그려서 올리면 반드시 결정이 내려질 터인데, 우리가 하필 이렇게 이 문제를 놓고 다툴 필요가 있겠습니까? 옛 경계를 제대로 밝히면 대·소국이 삼백 년이래 지켜온 옛 경계가 저절로 분명해질 터인데, 왜 지금 따로 새로운 경계를 나누어야 합니까?
진영:부사는 이미 물의 흐름이 연결되지 않고, 무더기와도 연결되지 않음을 보았으면서도 여전히 줄곧 홍토수를 주장하는 것 아닙니까?
이중하:이것은 나라의 옛 기록에도 있는 바이며, 나라의 강토는 축소될 수 없습니다.
진영:홍토수 외에는 주장할 수 없다고 하시는데, 조선정부의 명령도 본래 이러한 것입니까?
이중하:우리 정부가 저를 보낼 때, 홍토수가 옛 경계인 것만을 알았으므로 홍단수나 서두수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진영:옛 경계란 것이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 것입니까?
이중하:우리나라 朝野의 기록과 지도 모두가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 쪽 지도와 기록을 귀하께서 반드시 믿을 수는 없다고 하니, 청조의 지도로 증거를 삼는 것입니다.
진영: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서로 조회를 하면 되겠습니다.
이중하:당연히 그렇게 하겠습니다. (16일)
 
별지 : 석을수(石乙水) 답사 정황
 
 

(1) 진영의 조회

 

본 국처는 윤4월 13일 귀 부사와 함께 장파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강을 浮橋에서부터 측량하기 시작하여, 長山嶺을 지나 홍토수와 석을수가 합류하는 곳에 이르렀는데 계산해보면 강의 길이는 80리 반이었습니다. 뒤이어 합류처 위쪽의 두 물줄기를 각기 자세히 측량하여, 홍토수에는 두 갈래의 상류가 있음을 조사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圓池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이것은 합류처에서 구부러지면서 서북으로 올라가는데, 圓池까지의 거리는 27리 230보였고, 다른 하나는 홍토수의 상류 수원이 합류하는 곳에서 서남으로 올라가는데 평평한 비탈에서 물길이 다하는 곳까지 11리 340보였습니다. 모두 董棚의 물줄기와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또한 홍토수의 두 수원은 모두 경계비나 돌더미와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고 서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또한 석을수를 보면 조선에서는 島浪水라고 부릅니다. 이 강은 백산에서 발원하는데, 본 국처와 귀 부사가 측량위원 등과 함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三汲 第一泡에서 18리쯤 떨어져 있는 석을수 상류의 물줄기 입구와 양쪽에서 석을수로 흘러드는 작은 물길을 조사하였습니다. 짧은 물줄기를 제외하면, 홍토수·석을수의 합류처에서 서남으로 올라가다 다시 서쪽으로 향해 석을수의 물 흐름이 마르는 곳에 이르는데, 계산하면 41리 215보였습니다. 또한 물이 마르는 곳에서 다른 물줄기 하나가 연결되는데, 서남쪽으로 올라가며, 길이가 12리, 넓이가 2~3장, 깊이가 5~6척 등이었습니다. 이 물줄기는 또한 黃花松甸과 연결됩니다. 이곳은 서쪽으로 약 5리 정도 뻗어 있는데, 다시 하나의 물줄기가 여기에 이어집니다. 서북쪽으로 22리 길이이며, 소백산 서면 제1봉의 동쪽 기슭 아래에서 시작됩니다. 이 물줄기의 넓이는 4~5장에서 2~3장 등이고, 깊이는 1~2장 등입니다. 물줄기의 양쪽은 모두 沙石으로 이루어진 절벽입니다. 장파에서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조사한 석을수 원류는 이와 같으며, 소백산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조사한 석을수의 상황도 이와 같습니다. 또한 소백산 서쪽에서도 물길이 압록강으로 흘러드는데, 이와 같은 상황을 아울러 함께 공문으로 통보하는 바입니다. (5월 1일)
 
별지 : 황화송전(黃花松甸)에 대해 질문하며 이중하(李重夏)가 진영(秦煐)에게 보낸 조회(照會)
 
 

(2) 이중하의 답변

 

귀 조회를 받았습니다. 석을수 상류의 물이 마르는 곳은 황화송전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에는 본래 이러한 지명이 없어 산등성이인지 물줄기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 측 수행원 池가 귀 측량위원 劉에게 질문하니 유는 산등성이를 통틀어서 부르는 이름이라 하였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날)
 
별지 : 황화송전(黃花松甸)에 대해 진영(秦煐)이 이중하(李重夏)에게 보낸 답신(答信)
 
 

(3) 진영의 조회

 

방금 귀 조회에서 황화송전의 의미에 대해 다시 질문하셨는데, 황화송전은 결코 언덕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곳에 있는 나무가 모두 黃花松樹인데, 언덕도 아니고 산도 아니며, 마치 평탄한 비탈 같은 곳으로, 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진흙이 물에 젖어 있어 지나가다 보면 불시에 진흙에 발이 빠지기도 해서, 이곳을 황화송전이라고 부릅니다. 조사에 따르면 석을수 상류의 물이 마르는 곳은 물줄기(도랑)를 따라 올라가 보면 보기에 경사가 낮은 언덕과 같으며, 소백산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지세를 살펴보면 또한 평평한 비탈 같기도 합니다. 그곳의 상황은 바로 비탈에 해당되고 또한 黃松이 있기에 황화송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이상. (같은 날)
 
별지 : 장백산(長白山) 일대가 황화송전(黃花松甸)과 비슷하다며 진영(秦煐)이 이중하(李重夏)에게 보낸 답신(答信)
 
 

(4) 이중하의 답변

 

귀측의 답변을 받았습니다. 장백산의 상황은 대부분 이와 같으므로 만약 통틀어 부르는 이름을 취한다면 깊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상. (같은 날)
* 길림파원 진영은 산과 강의 원근·거리를 가지고 조회를 보냈는데, 이중하는 따로 물길과 뭍길(육로) 노정의 실제 거리를 가지고 답변하였다. [주003]
번역주 003
닫기

이 부분은 양측이 담화나 공문을 주고받은 식으로 나열된 이 부건(附件)의 형식에서 벗어나 있는데, 내용으로 보아 뒷부분은 이중하의 조회라고 파악하여 처리하였다.


 
별지 : 홍토산수(紅土山水)가 도문강(圖們江)의 수원(水源)으로 입증되었다는 문서
 
 

(5) 이중하의 조회

 

홍단하는 무산부에서 백 리 떨어진 곳에서 홍단합류처와 만나며(뭍길로 가서 장파로 돌아오면 柳洞에 이르기까지 60리이고, 물길을 따라 곧바로 올라가면 유동까지 48리), 柳洞에서 姜刀水에 이르고(뭍길로 가면 45리, 물길을 따르면 50리), 강도수에서 발원지에 이릅니다(뭍길로 가면 10리, 물길을 따르면 10리). 따라서 무산부로부터 계산하면 뭍길로 215리, 물길로 213리입니다. 홍단하의 발원지는 위·아래 두 군데가 있고, 그 거리는 백 걸음 정도가 되지 않는데, 지금 이것을 남·북의 발원으로 구분하겠습니다. 남쪽 발원에 길이가 1리 반짜리 물길을 더하는 것은 본래의 모양과 들어맞지 않습니다. 이러한 예에 따라 기록하면 홍토산수의 발원지는 서너 군데가 되고, 加騭峰의 발원지는 열 군데가 됩니다. 홍토산수의 물이 다하는 곳은 劉委員이 기록할 때 함께 눈으로 본 것이 모두 溝道였지 平崗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평평한 비탈에서 물이 다한다고 묘사하는 것은 본래의 모양과 들어맞지 않습니다. 董棚의 하류를 가지고 논의하자면, 윤월 18일 중국 측의 方郞 총리와 조선 측의 池委員이 함께 가서 조사하고 돌아왔는데, 물이 다하는 곳에 비탈이 있었고, 귀측의 조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23일 조선부사와 귀측 승판처가 다시 가서 이곳을 조사하였을 때에는 비로 인해 물이 늘어나, 18일에 조사한 흐름은 몇 리를 더 가서야 물이 다하였으며, 사면이 평평하고 결코 비탈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이곳에 비탈이 없다는 것은 귀측 승판처와 역관에게 물어보면 역시 목격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석을수의 물이 다하는 곳은 유·지 두 위원이 동시에 조사할 때 평평한 비탈이 소백산 동남쪽의 기슭에 옆으로 끼어 있다는 점을 붓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같이 기록한 것인데, 그 후 귀측에서 보낸 조회에서 갑자기 황화송전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이 네 글자의 지명은 우리 측에서는 알지 못하는 바이므로, 지 위원으로 하여금 묻게 한 것입니다. 유 위원이 비탈을 통틀어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하였기에 그대로 답변을 한 것입니다. 오늘 귀측 조회에서 다시 곧바로 말하기를 물길과 비탈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니 확실히 분명해지는 바입니다. 석을수의 거리는 유·지 두 위원이 함께 기록한 것으로, 조사한 곳에서 물길이 시작되는 곳까지 55리 15보로, 장백산 정상에서 13리에 해당하는 곳이며, 비석에서 前峰을 지나 胭脂峰까지는 15리, 연지봉에서 小白山까지는 20리입니다. 압록강의 발원이 토문강 각 지류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만약 기재한다면 각 물줄기에 대해서 마땅히 같은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오로지 홍토산수에 대해서만은 빼놓고 이야기하지 않고 계십니다. 홍토산수는 바로 『회전』·『여도』에 실려 있는 대로 분명히 대도문강인데, 오히려 홍단수나 석을수와 같은 작은 강보다 못한 것입니까? (11일)
 
별지 : 홍토산수(紅土山水)가 대도문강(大圖們江)이라는 기록이 없다는 주장 문서
 
 

(6) 진영의 답변

 

보내주신 내용은 잘 받아서 읽었습니다만, 총리아문의 앞·뒤 상주문에 결코 홍토산수가 대도문강이라고 분명히 지적한 적은 없습니다. 『회전』이나 『여도』역시 홍토산수가 대도문강이라 고 기록한 적이 없는데, 지금 부사께서 무슨 근거를 가지고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끝 부분에서 홍단수와 석을수가 작은 강이라고 하시는데 그 뜻은 홍토산수가 큰 강이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강과 홍단수·석을수 가운데 어느 쪽이 과연 폭이 넓은 강인지 왜 생각해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일은 보기에 부사께서 조회를 근거로 삼지 않으시고 오로지 억지주장만을 되풀이하고 있으니, 아마 반드시 欽差大臣의 조사·처리 결과를 기다려야만 할 것 같습니다. 측량하고 있는 거리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서는 이 문제를 가지고 다투면서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13일)
 
별지 : 홍토산수(紅土山水)가 대도문강(大圖們江)의 水源이라는 주장
 
 

(7) 이중하의 답변

 

홍토산수는 조선에서 본래 豆滿江이라 불렀습니다. 지난번 경계를 조사할 때 귀 국처에서 처음으로 홍토산수라고 이름을 붙여 공문에 기록하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지도와 기록 가운데 어찌 홍토산수라는 이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지도와 기록에 실려 있지 않다는 것으로 반박하시니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물길의 폭을 따지는 부분에 관해서는 적어도 홍단합류처에서 좌우로 두 강을 살펴보면 홍토산수가 홍단수보다 넓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석을수 합류처에서 보더라도 큰 물줄기와 작은 갈래는 뭇사람이 함께 눈으로 보았는데 어찌 다시 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요컨대 귀 국처의 의견은 아주 확고해서 도문강의 옛 경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고, 간절하게 논의를 요청해도 결국 제대로 회답하시는 일이 적으니, 우리로서는 이대로 돌아가 조정에 보고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날)
 
별지 : 4) 회녕부로 돌아온 다음의 대화
 
 
별지 : 진영(秦煐)이 지도를 그려 도문강(圖們江) 수원(水源)에 대해 논의하자는 주장 문서
 
이중하:장백산의 강에 대해서 이번에 모두 두루 조사한 다음에 돌아왔고, 경계에 대해서 논의한 지 이미 석 달째 됩니다. 귀측에서는 대도문강이 어느 강이라고 지정하시겠습니까?
진영:대도문강은 자세히 알 도리가 없으며, 지도가 완성되기를 기다려 다시 상의해서 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중하:『皇朝輿圖』로 살펴보면, 대도문강은 지정하기 어렵지 않은데, 귀측에서는 왜 끝까지 지도를 근거로 삼지 않으십니까?
진영:『황조여도』는 믿을 수 없습니다.
이중하:작년에 토문강을 가지고 변론할 때, 귀국처가 전후로 보낸 조회의 필담 가운데 반드시 『황조여도』를 첫 번째 확실한 근거로 삼았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우리가 『여도』를 가지고 증명하려고 하면 매번 “『황조여도』는 믿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진영:전에 귀국과 海蘭河를 가지고 논쟁을 할 때 우리는 지도를 가지고 입증을 하였으나, 지금은 앞의 일과는 다르니, 증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중하:이렇다면 다시 더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측은 며칠 안에 돌아가겠습니다.
진영:지도가 완성된 다음 다시 논의합시다.
이중하:생각이 다르니 지도 역시 반드시 들어맞지 않을 것입니다. 하필 지도의 완성을 기다려야 합니까?
진영:지도가 만약 서로 들어맞지 않으면, 피차간에 조회한 다음 돌아가면 될 것입니다.
이중하:그렇다면 며칠 더 머무르겠습니다. (15일)
 
별지 : 5) 경계를 논의해서 정한 다음의 조회
 
 
별지 : 홍토산수(紅土山水)와 석을수(石乙水)의 지도를 그려 유지(諭旨)를 청하자고 하는 이중하(李重夏)의 조회(照會)
 
 

(1) 이중하의 조회

 

이번 도문강 경계 재감계는 발원지를 두루 살펴보고 한 달을 넘겨 자세하게 협상하였습니다. 무산부의 서쪽으로부터 흐름을 따라 장백산 속 장산령 서쪽의 홍토수·석을수 합류처까지 곳곳마다 자세히 고증하여 이미 측량을 완료하였습니다. 다만 결코 확정하지 못한 것이 바로 합류처 위쪽의 두 발원지입니다. 우리는 장백산에서 홍토산수에 이르는 지역으로 경계를 나누자고 하고, 귀 국처는 소백산에서 석을수에 이르는 지역에 경계를 세우고자 하여 누차 협의하였지만 결론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요컨대 경계는 이미 모두 측량을 끝냈고, 단지 이 두 줄기 작은 물줄기를 분별하는 일만 남았는데, 비록 깊은 산 속 몇 리의 거리에 관계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소국 사이의 국경문제이니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귀측에서 측량한 거리에 따라 지도를 그린 다음 총리아문에 올려, 황상께서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려 주시도록 상주하시기를 요청함으로써 경계를 정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일을 공정하게 처리해야 하므로 이에 따라 공문을 갖추어 조회를 보내는 바입니다. (18일)
 
별지 : 석을수(石乙水)가 경계에 부답하니 지도를 그려 보고해야 한다는 진영(秦煐)의 조회(照會)
 
 

(2) 진영의 답변

 

귀 조회를 받았습니다. 홍토산수는 본 국처가 누차 귀 부사와 함께 자세하게 하나하나 물길이 시작되는 곳까지 조사해서, 董棚 전면의 동북으로 향하는 물길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비석·무더기와는 서로 연관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하였습니다. 뒤이어 소백산 동쪽 기슭의 석을수라는 물줄기를 찾아냈는데, 그 물줄기의 각 부분은 옛 경계와 서로 잘 들어맞는 것입니다. 원래는 총리아문의 상주문에 따라 자세히 공동으로 조사한 다음에 경계지역을 정하고자 하였으나, 지금 부사께서 측량한 거리에 따라 지도를 그리고 총리아문에 올려 황제께서 최종 결론을 내려달라고 상주함으로써 경계를 나누기를 원하니, 본 국처는 응당 측량한 거리에 따라 상세한 지도를 작성하여 공동으로 함께 직인을 찍은 다음 그대로 보고하고자 합니다. 이에 공문을 갖추어 답변하는 바입니다.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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