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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장군(吉林將軍)과 조선 관원이 경계 지역을 조사하여 분쟁을 막아달라는 총리아문(總理衙門)의 상주(上奏)

길림장군에게 적절한 관원을 파견하여 조선 관원과 함께 경계 지역을 명확히 조사함으로써 분쟁을 면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해주시기를 상주하여 청하는 바입니다(具奏請飭令吉林將軍, 委派妥員會同朝鮮官員査明界址, 俾免爭執).

 
  • 발신자總理衙門
  • 수신자皇帝
  • 날짜1885년 7월 20일 (음) , 1885년 8월 29일
  • 문서번호1-3-1-19 (1050, 1930b-1932a)
상유에서 지시한 바에 따라 논의한 결과를 삼가 상주합니다.
광서 11년 7월 6일 예부에서 조선국왕이 토문강의 옛 경계를 조사할 것을 요청한다는 자문을 받아 주를 올렸는데, 이에 대해 군기대신은 다음과 같은 상유를 받았습니다.
해당 아문에서 논의하여 상주하라.
이 지시가 저희 아문에 전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부의 原奏를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조선국왕이 다음과 같은 자문을 보내왔습니다.

 
토문강의 옛 경계를 적절한 인원을 파견하여 상세하게 조사함으로써 변경의 분쟁을 막아주십시오.
 

아울러 이를 (예부에서) 대신 상주해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국경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응당 (황상께서) 길림장군에게 지시를 내려 속히 적당한 인원을 파견하여 상세하게 조사한 다음, 분명하게 상주하여 처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예부의 원주는 이와 같은 내용이었는데) 臣 衙門에서 예부에 공문을 보내 조선 사신이 올해 2월에 보내온 地圖와 界碑 [탁본] 각 1장, 조회 1건을 넘겨받아 검토를 하던 중, 마침 길림장군 希元이 보내온 다음과 같은 자문을 받았습니다.
광서 7·8년에 조선의 無業 유민들이 길림 변지를 차지해서 개간하였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종래 다음과 같은 유지를 받은 바 있습니다.

 
銘安과 吳大澂등이 조선과 상의하여 해당 지방관에게 미리 안치할 준비를 하도록 하고, 관대하게 1년의 기한을 주어 모두 거두어들이게 함으로써 보살펴 주는 뜻을 보여 주도록 하라.
 

이 유지를 받들어 그대로 처리하였는데, 조선에서는 기한이 되어도 유민들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오히려 멋대로 침범하여 차지하였고, 또한 두만과 토문이 서로 다른 강이라고 말을 꾸며 억지주장을 하면서, 界碑를 탁본하여 경계를 조사할 것을 요청해왔습니다. 당시 혼춘부도통에게 자문을 보내 인원을 파견하여 공동감계를 하도록 했지만, 조선 관원은 누차 핑계를 대며 미루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돈화현의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았습니다.

 
조선 유민들이 날로 늘어나고, 침범한 땅은 점점 넓어지는 데다가 또한 아무 거리낌 없이 방자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상점을 도둑질하여 주인이 쫓아가서 붙잡았으나 무리를 믿고 몰매를 때린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혼춘부도통을 통하여 군사를 파견하여 탄압하도록 하여, 새로 지은 초가집 몇 간을 태우고 아울러 越墾한 백성은 채찍으로 때려 징벌을 보인 다음, 부대를 철수하여 돌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에서는 이 유민들을 우리에게 귀속시켜 우리의 정교를 따르게 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조선국왕은 유지를 받든 다음에도 거두어들일 방법을 세우지 않으니, 越墾民이 더욱더 마음대로 침범하여 차지하고 말썽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응당 북양대신에게 자문을 보내 조선국왕에게 전달하여 신속하게 적당한 인원을 파견하여 기간을 정하고 공동감계를 시행하면 그 땅이 길림에 속하는지 조선에 속하는지 가지리 않아도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아울러 또한 북양대신 이홍장의 다음과 같은 자문을 받았습니다.
이미 조선국왕에게 인원을 파견하여 공동감계를 하자고 전하였습니다.
신 등이 이상 각 내용을 상세하게 검토해보니, 조선 유민이 월간을 하여 토지를 차지하고 개간한 문제에 대해 조선국왕은 시종일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여 엄격하게 통제하고 적절하게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오로지 변방 관리의 일방적인 말만을 믿고서 쉽사리 (이러한 감계) 요청을 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琿春의 문·무관들도 부대를 파견하여 질서를 유지하고자 할 때 조선의 변방관리에게 미리 공문을 보내 알림으로써 백성을 풀어놓아 월간한 것을 질책하지 않고, 갑작스레 집을 불태우는 행동으로 나선 것은 이미 성급한 처리 방법이자, 또한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는 방법도 아닙니다. 원래 조선은 대대로 藩服으로서의 분수를 지켜 삼가 직분을 다해왔으며, 조선과의 경계는 응당 신속하게 조사를 하고 확정하여 無業流民들이 모두 안정을 찾을 수 있게 함으로써, 중국에서 그동안 조선을 어여삐 여겨온 뜻에 부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조선에서 토문과 두만이 서로 다른 강이라고 하는 것은 실로 아무런 증거가 없으며, 그들이 그려서 보내온 지도 역시 그다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자료에 실려 있는 것을 검토해보면 그 증거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欽定皇朝通典』 [주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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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乾隆)년 황제의 지시에 의해 편찬된 책(100권)으로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을 이어서 편찬한 것인데, 그 가운데 하나인 『속통전(續通典)』은 당대 이후 명대까지의 일을 다루고 있으며, 『황조통전(皇朝通典)』(오늘날에는 『청조통전』이라고도 한다)은 건륭 이전의 청대를 다루고 있는데, 『통전』의 기준인 여덟 가지 분류(八門)에 따라 항목을 나눠서 역대의 전장제도(典章制度)를 설명하고 있다.

의 「邊防門」 [주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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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조통전』권97의「변방(邊防) 일(一) 조선(朝鮮)」에서는 건륭 연간까지의 청- 조선 관계를 개괄하고 있으며, 국경문제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부분은 다음과 같은 강희(康熙) 45년 강희제의 발언뿐이다. “四十五年十月諭大學士等曰:觀朝鮮國王, 凡事極其敬, 其國人亦皆感戴. 聞其國有八道, 北道與瓦爾喀地方土門江接界, 東道接倭子國, 西道接我鳳凰城, 南接海猶有數小島. 太宗文皇帝定朝鮮之役, 我兵無處不到, 以已破之國, 我朝之重加營建, 安堵如故, 其國人於太宗文皇帝駐軍之地, 樹立石碑, 備書更生之德, 累世感戴, 以至於今. 且彼更有可取者, 明之末年彼始終未嘗叛之, 猶重禮義之邦也.”

이나 「欽定皇朝四裔考」 [주003]
번역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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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나온 『황조통전』과 마찬가지로 건륭 연간 황제의 명에 의해 편찬된 『황조문헌통고(皇朝文獻通考)』 300권(건륭52년, 1787년)에 있는 권 293의「사예고(四裔考)」를 가리키는 것 같다.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는 두우가 통전에 쓴 팔문(八門)이란 분류기준을 이십사로(二十四)로 확대하면서 그 명칭을 고(考)로 바꾸었은데,「사예고」도 그 24고 가운데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건륭 연간에 편찬된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는 송 ·요 ·금 ·원 ·명의 일을 다루고 있고, 『황조문헌통고』는 건륭 이전까지의 청대를 다루고 있다. 이 『황조문헌통고』의 권294「사예(四裔) 동(東) 조선(朝鮮) 이(二)」에도 앞서와 같은 강희 45년조의 기사가 실려 있다.

에는 분명하게 길림과 조선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실려 있고, 다른 두만강 지류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증거입니다. 『[欽定大淸]會典圖』 [주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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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에는 총 6차에 걸쳐 역대의 전장제도(典章制度)의 연혁을 집대성한 『흠정대청회전(欽定大淸會典)』이 연속적으로 간행되었는데(『崇德會典』, 『康熙會典』, 『雍正會典』, 『乾隆會典』, 『嘉慶會典』, 『光緖會典』) 6차본인 『흠정광서회전(欽定光緖會典)』에는 『흠정대청회전사례(欽定光緖會典事例)』1,220권과 『흠정대청회전도(欽定光緖會典圖)』270권이 부가되어 있다. 보통 『대청회전』이라 하면 이 판본을 가리킨다. 『회전도』는 5차본인 『가경회전』부터 새롭게 추가되었는데 그림을 통해 청대의 문물, 제도, 전례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및 『一統輿圖[皇朝一統輿地全圖)]』의 「판도(職方)」 [주005]
번역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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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방(職方)은 판도, 영토를 가리키는 뜻이다.

방면에는 토문강과 압록강이 동서 양쪽의 경계가 되고 표시된 그림이 아주 분명한 데다가, 따로 小土們江이 있는데, 본류의 북쪽에 있어 이 역시 두만강이란 이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두 번째 증거입니다. 또한 조선사람이 스스로 지은 『地理小識』에도 백두산은 중국과 조선의 경계에 있고, 큰 호수가 있는데, 주변이 10리이며, 서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이 고, 두만강의 남쪽은 조선이라고 실려 있습니다. 또한 함경도는 鐵嶺의 동북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며, 무산·회녕·종성·온성·경원·경흥 여섯 鎭營을 강변에 설치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백두산은 장백산의 다른 이름이고, 두만강은 토문강의 다른 발음이며, 방언이 다를 뿐 실제로는 하나의 강이라는 것이 세 번째 증거입니다.
조선의 자문에서 칭하길 강희 51년 烏喇總管 穆克登이 정계비를 세웠다는 부분의 경우, 조사해보면 강희 12년 처음 吉林 烏喇城을 두었고, 15년에는 寧古塔將軍을 이곳에 주둔하게 옮겼습니다. 雍正 5년에 永吉州를 두었다가, 乾隆 12년에 다시 폐지하였습니다. 총관이라고 하는 것은 順治 초기의 옛 명칭입니다. 당일 定界 상황은 바로 주둔지를 옮긴 다음으로 길림장군의 관청에 확인해볼 수 있는 공문기록이 있을 것이니, 해당장군에게 지시하여 경계를 조사해서 확인하고, 적절한 인원을 파견해서 조선에서 파견한 관원과 함께 명확한 증거를 찾아내어 회의나 분쟁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유민들을 거두어들여 안치시키고, 옮겨가기 힘든 사람들은 상주를 통해 확인을 받은 다음 적절하게 중국에 귀속시켜 각기 생업에 안주시키게 한다면, 藩部를 무마할 수 있고 邊民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신들이 논의한 모든 것에 대해서 奏摺을 갖추어 다시 아뢰므로, 엎드려 빌건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삼가 주를 올립니다.
광서 11년 7월 20일, 군기대신이 다음과 같은 상유를 받았다.

 
논의한 대로 하라.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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