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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고력묘자 고분군(高力墓子 古墳群)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038
  • 위치(출토지)
    連江鄕 高力墓子村 남쪽의 낮고 완만한 산마루에 위치했으나 현재 수몰.
  • 지역
    본계(本溪市)
  • 유형
    고분>적석총
  • 형태사항
    11점  , 기타 
출토지
원래 연강향 고력묘자촌 남쪽의 낮고 완만한 산마루에 위치했으나 현재 수몰(原來 連江鄉 高力墓子村 南側 低㟶 位置, 現在 水沒).
연대
1950년대 발굴
-상한 연대 : 기원 전후 시기, 고력묘자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토와 제작 기술은 서한 말- 동한 초기 토기 특징을 지님: 대부분 모래가 섞인 홍갈색 혹은 황갈색, 소성도는 높지 않고 기형도 불규칙적. 기형의 특징은 方脣, 折沿, 束頸, 平底임. 이는 서한 말기로부터 동한 초기의 토기 특징임.
-하한 연대 : 고구려 만기, 고구려 고분 형식이 편년에 의하면 봉토분은 비교적 늦은 시기임. 따라서 고력묘자고분군은 고구려 전 기간에 걸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음.
1994년 발굴
-환인 경내는 고구려 초기 활동의 중심지구로 현성 서북의 오녀산산성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고구려 제1도성인 흘승골성으로 보고 있음. 고려묘자 적석총은 오녀산 산성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로 양자는 일정한 관계가 있을 것이며, 적석묘의 내외 구조를 보면 고구려 조기 고분의 특징을 갖추고 있음. 토기가 모두 물레를 사용하지 않은 手製이며, 태토가 거칠고, 火候가 높지 않으므로 고구려 전기 토기보다 조금 이른 단계임. 또한 출토된 陶壺와 陶罐의 형식 특징은 각각 동일한 집안 동대파 M356에서 출토된 單耳陶杯, 고력묘자 고분군 19호 및 201호의 陶罐과 서로 유사함. 이 세 고분의 연대는 기원 1~3세기 또는 3세기로 추정됨. 고려묘자 적석총이 자리한 지리적 위치, 무덤 구조상의 원시성, 도편 중 일부는 漢式 鐵钁가 출토된 바 있는 환인 龍家溝와 小荒溝 유적지 도편과 유사하므로, 고려묘자 적석총의 연대는 고구려 건국 초기, 즉 약 기원 1세기 또는 조금 이를 것으로 판단됨.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56동북박물관문물공작대
(東北博物館文物工作隊)
고려묘자촌에서 총 240여기 확인. 고분군 남단의 언덕에 대형 적석묘 70~80여기 집중 분포하는데 그 중 7기 고분 발굴
1958동북박물관문물공작대
(東北博物館文物工作隊)
고분 총 37기 발굴(連江村 6기 포함)
1964조중연합고고대
(朝中聯合考古隊)
박시형(김일성대) 등 북한측 9인과 이전복(길림성고고연구소) 등 중국측 합동 조사
1994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본계시박물관, 환인현문물관리소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物管理所)
혼강댐의 동남부 주위, 수몰된 고분군 주위에 수몰되지 않고 남아 있었던 곳으로 고분은 댐의 수면보다 5m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을 조사함
고분은 산돌로 축조한 연접묘 4기, 무덤 평면은 근방형 또는 장방형의 커다란 돌로 축조.
연접묘된 무덤을 ‘方壇’이라 칭하고, 발굴 순서에 따라 壇1~壇4로 편호.
구조특징
고분군 묘역의 지세는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음.
고분군 묘역은 남북 길이 1,000m.

고분 분포는 규율성이 명확히 보임.
-고분이 남쪽 언덕의 꼭대기에서부터 산비탈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지면서 마을 가운데까지 배열.
-고분의 개체수는 남쪽 언덕이 적다가 북쪽 마을로 내려오며 점차 많아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음.
-남단 지역은 큰 규모의 고분이 분포하는 대형 積石塚區, 약 70기 확인.
-남단의 높은 자리에 1기, 그 북쪽에 이웃한 곳에 2기, 다시 북쪽으로 차례대로 4줄로 배열되는데, 연접된 길이는 70m에 달함.
-봉토분은 소수이며, 대부분 고분군 최북단에 위치

고분 형식이 매우 다양하여 다수 적석총과 소수 봉토분으로 구분가능함.
적석총 : 무기단적석총-대다수 대형, 적석분구는 圓丘狀, 고분 대다수가 두 개 고분을 연접하여 축조했으나 일부는 단독분임, 묘실은 기초를 만든 후 그 위를 평탄하게 한 후 그 위에 강돌을 깔고 부장품을 놓은 후에 큰 돌로 뚜껑돌을 덮음, 뚜겅돌이 함몰된 흔적이 있는 것도 있음, 고분이 산비탈에 위치하여 아래 부분에 둘레담(階墻)과 護墳石을 덧 돌리도 함.
기단적석총-고분은 무기단 적석총의 아래에 분포, 대다수가 남북으로 연접된 연접분으로 적석분구는 方丘狀, 분구 기단은 방형이나 방형에 가까움, 매장부는 네 벽을 판석으로 수적하거나 평적했고 벽을 조금씩 안으로 들여쌓아 판석으로 뚜껑을 덮은 후 그 위에 다시 산돌이나 자갈을 덮음, 묘실 내부 바닥에는 자갈을 깔음, 묘도는 좁고 길으며, 문 가까이에서 커다란 돌로 폐쇄, 고분은 2개 형식으로 분류되는데 1형식은 3단 축조 기단적석총이고 2형식은 기단적석석실묘로 구조가 간단하고 할석으로 묘실의 벽을 쌓은 후 뚜껑돌을 덮었고, 묘실 입구에 간단한 묘도가 마련됨
계단적석총-대부분 대형 장대석으로 여러 층의 단을 축조했고 3층이 다수를 차지하며 계단은 층층이 들여쌓기함, 2개 형식으로 구분가능한데 1형식은 단독분이고 2형식은 연접분(십 수기 연접)으로 묘실 간에 묘벽을 공유하고 있어서 고분 간 밀접한 관계와 형성과정의 정황을 추측 할 수 있음
봉토묘 : 封土洞室墓-규모가 비교적 작고 구조도 비교적 단순하고 2개의 형식으로 구분가능한데 판석으로 묘벽을 축조하고 판석으로 덮어 棺모양을 띤 형식과 돌을 평평히 쌓아 올려 벽을 축조하고, 판석을 덮고 묘실 바닥에는 자갈을 깔은 형식임, 고분의 천정 위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적석으로 봉한 것과 적석을 하지 않은 것이 있음.
봉토묘-방형의 기단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음, 묘실은 단실, 쌍실, 삼실 등 여러 종류로 나누어지고 네 벽은 모두 할석으로 평평하게 쌓았음, 내부는 평평하고 가지런하게 되어 있고 벽은 올라가면서 조금씩 들여쌓은 후 커다란 판석을 천정 막음돌로 이용, 말각조정 방식으로 천정을 가구함, 묘실 바닥은 잔 자갈을 1-2겹 깔았으며, 자갈 위에 석판을 올려 1~3개의 尸床을 만들기도 함. 극히 일부 고분의 내부는 석회로 벽 틈새를 메웠고 묘실 방향은 규칙성이 없음, 墓門 밖에 좁고 긴 墓道가 있고 묘도 중간을 돌로 막음, 봉석묘와 묘실 구조는 유사하지만, 천정부에 1층을 봉토한 점이 차이이고 묘실 밖 네 둘레를 돌로 쌓고, 틈새를 작은 석괴 또는 자갈로 메워 묘실을 견고하게 하였으며, 마지막에 흙을 완전히 덮음.
기타 : 소형석관묘-외부를 돌로 봉하지 않았음.

1994년 발굴 구역의 분포상황은 산마루에 연접해 높은 곳에서 점차 낮은 곳으로 종렬 배열함, 연접묘(串墓) 4기, 연접묘 각각을 단 1-4로 정리했는데 단1~단3은 서로 연접, 전체 길이 34m, 너비 9~13m이고, 단4는 고립된 方壇이며, 단1의 동남단으로부터 40m 지점에 위치함, 단4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서, 가장 낮은 단3과 6m 정도 높이 차이가 남, 단4의 주변에는 석괴가 많이 훼손되어 무질서하며, 일부에서는 階墻이 보임.
계장 구축방법에 의한 분류로 살펴보면 壇의 側壁에 의지해 담을 그다지 규칙적이지 않게 축조했는데, 상부의 모양은 계장이나, 울타리의 기초부가 확인되지 않는 유형임.
기단 위에 석광 축조한 것은 각 기단마다 주 매장부는 1-4기로 규칙적이지 않고 매장부는 총 9개 발견됨, 석광의 네 벽은 고르지 않으며, 내부에서 모두 화장흔적.
역사적 의미
매장방식
44기의 고분 가운데 24기 고분-봉토분 10기, 기단적석총 8기, 봉토석실묘 1기, 대형의 무기단 적석총과 계단적석총 5기-에서 유골 발견, 무기단적석총과 계단적석총에서 발견된 頭骨과 四肢骨이 보존 상태가 양호, 두개골은 모두 묘실 後壁을 향하고, 다리는 묘문을 향함. 대다수 仰身直肢葬, 4기의 봉토분에서 屈肢葬과 俯身葬 등도 발견됨.

單人葬, 雙人葬, 三人葬
화장 : 제15호, 제20호, 23호 등의 3기 고분에서는 불탄 인골 잔편들이 발견됨

구조 특징 - 연접묘
열상 배치 : 고분군 남단의 積石塚 區域에서는 약 70기 고분이 정연하게 배열. 배열은 남단의 높은 자리에 1기, 바로 아래 북쪽에 2기, 다시 북쪽으로 4줄로 정연함. 북묘는 모두 남벽이 없이 남묘의 북쪽 벽에 이어 묘실 축조 이는 남묘가 먼저 축조되고 북묘가 이후에 축조되었음을 보여줌
분지 분포 : 4줄로 정연하게 배열되며, 북쪽으로 갈수록 동·서 두 방향으로 확장되어 나감. 이는 적석묘 구역 고분이 공동 조상을 갖고, 각 줄의 연접묘는 가까운 혈연 관계의 한 가족을 대표하며, 여러 줄의 연접묘는 공동 혈연 관계에 따라 동일한 묘지에 묻히는 씨족사회 생활 습속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됨.
이런 매장방식은 일명 연접묘(串墓)라 하며, 集安 七星山墓域의 木耳場 일대 및 禹山墓域의 남쪽 기슭에서도 발견됨.

주변 고구려 유적과의 관계
고력묘자 고분군은 환인지구 최대의 고분군으로 원래 혼강 서안에 위치, 서쪽으로 5㎞ 떨어진 혼강 맞은 편에는 고구려 조기 도성인 오녀산산성이 있고, 서북 약 2.5㎞ 원래 連江村 역시 비교적 커다란 고구려 고분군이 있음. 고력묘자 고분군은 오녀산산성 및 그 부근의 고구려유적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

1994년 발굴고분
구조 성격
연접묘 : 고려묘자 고분군 가운데 단1~단4 고분과 유사한 고분은 고력묘자 고분군 제15호 및 19호를 비롯하여 집안 東大坡 M356, 집안 轉山子 M191 및 162 등임.
계장식 축조: 고력묘자 고분군 제15호 및 19호의 계장은 동대파 356과 유사함. 모두 비교적 규칙적이며, 전체가 할석을 덮어 丘狀을 만들었음, 고려묘자 적석총은 계장 축조가 거칠고, 계단의 윤곽이 불명확하여, 전체를 봉하지 못하여 외관형태가 원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음.
지탱석 : 단3 및 단4의 계장 바깥의 분구 지탱석으로 커다란 돌을 1열 배치하는 방법은 다른 고분 중에서 일찍이 보였음. 다만 단1의 서북계장 바깥에 장대석을 비스듬히 기대는 법은 드문 예로, 후세의 고구려 태왕릉, 장군총 등 독립적 장대석을 호석으로 사용한 건축법과 무관하지 않을 것임.

석광과 장구
장구 : 석광 광벽에서 불태워진 흔적이 있으며, 석광 안에서 목곽에 사용된 꺽쇠나 관못은 보이지 않음. 고구려 조기 고분군 가운데 목곽이 간단히 끼워 맞추는 구조였거나, 곽이 없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함.
석광 : 곽이 없었다면, 석단을 쌓는 과정 중에 시신을 설치하는 곳에 미리 빈 구덩이를 남기거나, 석단을 모두 축조한 후에 묘의 위치에 따라 다시 적석을 헤치고 구덩이를 만드는 두 방법이 사용되었을 것. 전자가 비교적 시간과 노력을 절약한 방법임.

장례풍속에 관한 특이점
가족장 : 연접묘는 일종의 가족 고분으로, 가족을 모아 장례한 결과로 추정. 동일 단 위에의 여러 묘광은 아마도 일가족 중의 동년배일지도 모름. 고구려 후기 봉토분 가운데 “同墓異穴”이 바로 이런 “同壇異穴” 장속의 계승을 시사함.
화장 : 고려묘자 적석총은 보편적으로 화장을 채용, 다만, 불태워진 정도는 다름. 단3 위의 M5 및 M6는 심하게 불탔는데, 돌을 불에 타서 벌어졌고, 유리질화된 용석이 많으며 그 위에 커다란 땔나무 흔적이 명확히 보이므로, 불의 온도는 1000도보다 높았을 것임. 가장 위쪽의 단4에서 순차적으로 그 뒤의 단1~단3으로 더욱 불태워지는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묘광 바닥 : 다수의 묘실 바닥 위에 깬돌이 많이 보이며, 자갈은 극히 드물게 산재함. 이것은 후에 주로 자갈을 고분 바닥에 깔았던 방법과는 차별이 있음.
장속과 관련한 기록 : 北史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습속은 죽은 자를 매장한 후 “사자가 생시에 服玩하던 車馬를 취해 고분 옆에 두면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투어 취해서 간다”고 하였음. 이번 발굴 중 석광 바깥쪽 돌 틈 사이에서 토기편 등이 발견된 것은 이런 장속의 조기 반영인지 주목할 가치가 있음.
자연환경
산마루 양쪽 아래 계곡으로 작은 내가 서쪽으로 흘러 혼강으로 들어감. 산마루의 서북 1㎞ 거리에 고려묘자촌이 있고, 혼강 동안은 마을의 서쪽으로 1.2㎞ 떨어짐. 동쪽 산등성이를 건너 2.5㎞ 떨어진 곳인 연강촌에서도 남쪽 강안 부근에 고구려 시기 대형분이 있음.
서북쪽 5㎞ 떨어진 강 건너편에 오녀산성이 위치.
서쪽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환인현성이 위치.
혼강댐 건설로 고분군은 수몰(연강촌과 고력묘자촌 수몰)
현재 환인현 혼강댐 동남부 가장자리에 일부 고분이 확인. 國有庫區 林場高句麗墓子工區에 속함. 현재 고분군은 댐의 수면보다 5m 높음.
유물정보
(1) 1950년대 발굴 고분
부장품은 토기(陶罐), 철제 칼(鐵刀), 철제 띠고리(鐵帶卡), 철제 재갈(鐵馬銜), 철제 화살촉(鐵鏃), 철제 창(鐵矛), 철제 패옥형 노리개(璜形鐵佩), 은제 팔찌(銀鐲), 동제 팔지(銅鐲), 반지(錫指環), 금동(鎏金), 금은·금동제 장식편(鎏銀銅飾件殘片) 등의 총 47건. 이들 유물은 봉토묘 가운데 제4호묘에서 출토된 2건의 반지(錫脂環)을 제외하고 모두 대형의 적석총 제15호, 제19호, 201호에서 출토.
(2) 1994년 발굴 고분
부장품이 매우 소략하며, 토기와 철기 2종류만 확인. 토기는 壺 1건, 罐 2건, 저부(器底) 1건, 이외 대상파수(板耳) 잔편 등이 보이며, 철기는 고리(環) 1건, 낚시바늘(魚鉤) 1건 등의 출토.
참고문헌
· 陳大爲, 「桓仁縣考古調査發掘簡報」『考古』 1960-1, 1960
· 정찬영, 「기원4세기까지의 고구려 묘제에 관한 연구」『고고민속론문집』 5, 1973
· 李殿福, 「集安高句麗墓硏究」『考古學報』 1980-2, 1980
· 陳大爲, 「試論桓仁高句麗積石墓的類型, 年代及其演變」『遼寧省考古·博物館學會成立大會會刊』, 1981
· 陳大爲, 「桓仁高句麗積石墓的外形和內部結構」『遼寧文物』 1981-2, 1981
· 方起東, 「高句麗石墓的演進」『博物館研究』 1985-2, 1985
· 魏存成, 「高句麗積石墓的類型和演變」『考古學報』 1987-3, 中國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 1987
·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 1990
· 萬欣·梁志龍, 「遼寧桓仁縣高麗墓子高句麗積石墓」『考古』 1998-3, 1998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李新全, 「五女山山城及其周圍的高句麗早期遺跡」『고구려 문화의 역사적 의의』, 고구려연구재단,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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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력묘자 고분군(高力墓子 古墳群) 자료번호 : ku.d_0001_0080_0050_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