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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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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산산성; 옥골성; 오골성(鳳凰山山城; 屋骨城; 烏骨城)

 
  • 구분유적
  • 시대고구려
  • 문서번호S000699
  • 위치(출토지)遼寧省 鳳城市 鳳城鎭 古城里
  • 지역단동(丹東市)
  • 유형성곽>산성
  • 형태사항전체 둘레 15,955m. 약 16㎞ 6점 
 

출토지

 

요녕성 봉성시 봉성진 고성리(遼寧省 鳳城市 鳳城鎭 古城里)

 

연대

 

4세기 말~5세기 초

 

조사내용

 

 
:1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85 1985년 봉황성산성에 대한 1차 전면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그 후 몇 년 사이에 또 보충 조사를 실시하였음. 최옥관(崔玉寬)이 1994년 「鳳凰山山城調査簡報」『遼海文物學刊』1994-2에 발표함.
2006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요녕성고구려유적보호공정항목(遼寧省高句麗遺跡保護工程項目)의 하나로 처음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함. 산성 북벽에 연결되어 있는 망대, 1호 문지, 2호 문지, 치, 초소, 돌구멍(石洞) 등을 조사함.
이용빈(李龍彬)이 2007년 「遼寧丹東鳳凰山山城首次發掘取得重大收穫」『中國文物報』2007-3에 발표함.
2007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봉성시문물관리소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鳳城市文物管理所)
발굴면적은 약 500㎡. 2007년에는 산성 주변의 고구려 고분 183기 및 성내의 2호 요망대 및 대형 건물지 등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음.
2010요녕성문물고고연구소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제3호 문지, 제4호 문지에 대한 발굴조사 실시. 아직 보고서가 발표되지 않았음. 발굴 조사 내용은 요녕성 문물고고연구소 홈페이지(http://www.lnwwkg.com/index.asp)에서 참조할 수 있음.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구조특징

 

봉성 봉황산산성은 포곡식으로 연대는 고구려가 요동으로 진출한 4세기 말~5세기 초로 비정됨.
성곽의 규모는 전체 둘레 15,955m 약 16㎞로 요녕성에서 최대 규모임. 남, 북, 동 3곳에 성문이 있고 점장대, 초소(哨臺), 기간좌(旗杆座), 우물과 채석장, 적석묘, 요지(窯址) 유적 등이 발견되었음. 산성에는 옹문, 성가퀴(女墻)가 있음. 성내에서 고구려 시기의 토기 잔편, 연화문 와당 등 기와편이 출토됨.
성벽 중 완전한 성벽구간.
석축 성벽의 전체 길이는 7,525m. 보존 상태가 비교적 완전한 성벽은 2,355m로 총 31구간인데, 그 중 5개 구간이 가장 완전하고 특징이 명료하여 오골성의 성벽 규모와 구조를 가장 잘 보여줌.
흑구(黑溝) 구간. 북문을 지나 산능선을 따라서 무너진 성벽 동쪽으로 100m쯤 가면 완전한 성벽을 볼 수 있는데, 산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굽어서 흑구의 입구까지 일직선으로 총 길이는 1,000m임. 그 중에 150m 와 310m 길이의 양 구간은 특별히 완전한 원래 성벽인데 그 높이는 5-7m 이고, 윗 너비는 3-4m, 아랫 너비 4-5m, 성벽 꼭대기에 성가퀴(垛口)가 설치되지 않아 윗면 전체가 평평함. 성벽 외벽은 아주 가지런하게 쌓았는데 전부 쐐기형 돌(楔形石)을 사용하여 층층이 열을 지어 쌓았음. 쌓은 층은 25-30층 이며, 쐐기형 돌(楔形石)의 머리부분을 바깥으로 향하게하여 아주 가지런하게 하였고 매우 견고하게 만들었음. 성벽의 내벽은 일반적으로 가지런하지 않은데, 산비탈에 기대어 쌓은 경우 안측 성벽은 항상 가지런하지 않고 계곡을 횡단하여 쌓은 경우 내벽을 개 이빨이 교차하는 것처럼 쌓았는데, 다만 소수의 내벽만 가지런함. 성벽외벽이 무너진 곳과 성벽 단면상에서 성벽의 축조 방식을 간취할 수 있음. 다듬은 쐐기형 돌(楔形石)의 큰 머리쪽이 바깥으로 향하게 하고, 대체로 가공을 하지 않은 작은 머리 부분이 안쪽으로 향하도록 했는데, 성돌 길이는 50-70㎝이며, 두께는 균일하지 않음. 석면의 길이 30-40㎝, 너비 20-25㎝임. 벽심은 전부 불규칙한 석조나 할석을 층층이 쌓아 올렸는데 전부 “간체법(干砌法)”을 채용하였으며, 백회를 사용하지 않았고 층층이 맞물려 쌓아 성벽은 매우 견고함. 천년이 지나도록 비와 바람에도 의연히 버틸 정도로 견고함.
묘구(廟溝) 구간. 성의 중부 서측, 찬운봉(攢雲峰) 남측 860m 되는 곳의 큰 능선상에 위치함. 성벽내측은 홍석립구(紅石砬溝), 외측은 묘구(廟溝)임. 이 구간 성벽의 총 길이는 400m, 가장 완전한 부분은 100m. 이 100m 성벽은 산능선에서 떨어진 곳에 치우쳐 있는데 절벽아래의 가파른 비탈에 기대여 축조하였음. 그 높이는 6m, 아랫 너비 3-4m, 성벽의 윗 면이 절벽 아래의 산비탈과 수평을 이루는 모양으로 절벽 아래에 한 변의 너비가 15-20m에 달하는 평탄한 성벽 정상부를 형성하였음. 이 곳의 해발은 약 600m로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볼 수 있으므로 묘구(廟溝) 입구(山口)를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급한 상황에 병력을 집결할 수도 있음. 산성 서남부의가장 주요한 입구(山口)와 방어지대를 이룸.
봉황산 입구(山口) 구간. 찬운봉(攢雲峰)내 절벽 동북측 산비탈 구간으로, 봉황산 입구를 횡단하는 곳임. 이 산구를 중심으로 하여 성벽 서쪽은 찬운봉과 접하고, 동쪽은 동쪽 산봉우리와 이어지는데, 계곡을 가로질러 산봉우리로 이어지는 400m 길이의 성벽을 축조하였음. 대부분의 성벽은 보존상태가 완전 함. 특히 봉황산의 동쪽산의 성벽은 산등성이가 아니라 산등성이 바깥쪽의 평균 너비 100m인 산비탈에 축조하였음. 봉황산 동쪽 산의 한쪽에 골짜기 입구가 비교적 많고, 산비탈이 비교적 완만하여 인마(人馬)가 대량으로 집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임. 그리하여 산비탈상에 성벽을 축조하여 성내에 충분한 공제지대를 남겨두어 병영을 안치시키고 요새를 구축할 수 있고, 병력을 집결할 수 있어서, 방어와 출격에 유리하기 때문임.
필마구(匹馬溝) 구간. 산성 서북모서리 전환점의 필마구(匹馬溝) 입구(山口)에 위치. 산성 서북부의 방어 중점지구임. 이 입구(山口)의 현존 완전한 성벽은 60m.
동묘(東廟)구간. 산성의 동남모서리의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하고 북쪽으로 흑로석(黑老石) 입구(山口)와 이어져 있음. 이 산봉우리 꼭대기는 봉황산산성 동쪽 끝에 위치하고 시야가 특별히 아득하고 광활함. 산봉우리 등성이가 돌아가는 지점에는 아직도 40m의 성벽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20m는 비교적 완전한데 높이는 2m, 너비는 3m임. 그 축조 특징은 뚜렷한데 사용한 석괴는 비교적 크고 길이는 평균 90㎝ 정도. 석면은 길이 46, 너비 36㎝. 이러한 장대석으로 축조한 비교적 큰 성벽은 봉황산산성에서 많이 보이지 않지만 이 곳과 남문 서측 산등성이에 한 구간이 짧게 남아있음.
무너진 성벽 부분.
무너진 성벽 총 길이는 5,170m로 55구간으로 구성됨. 무너진 성벽은 곧 주요 벽체가 무너졌지만 벽 기초는 아직 남아 있고 많은 성돌 심지어 성돌 전부가 벽 기초 양측에 무너져 있는 상태를 가리킴. 이것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음. 먼저 다석형(多石型)임. 전부 혹은 대부분의 성돌이 남아있는 성벽. 이런 유형은 주로 성의 북, 동, 서쪽 지역에 남아있음. 이런 종류의 성벽은 대부분 완연히 긴 산등성이 상에 축조하였고 구간은 매우 많음. 주요 3개 구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음. 북문 구간은 북문을 기점으로 서쪽을 향해 뻗어 있는데, 610m 길이의 무너진 성벽이 있음. 구불구불하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없는 산등성이임. 성벽은 비록 무너졌으나 성벽의 기초는 아직 남아있어 성벽의 기초 위를 다닐 수 있고 성돌이 산성의 바깥 산비탈에 무너져 있음. 산성의 바깥 산비탈은 비교적 가팔라서 험준한 감이 있으며, 성벽 기초를 따라 구간 구간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벽체를 볼 수 있음. 높은 곳에서 멀리 바라보면 이 구간의 성벽 유적은 구불구불함. 대근채구(大芹菜溝) 구간은 북문에서 출발하여 성벽 기초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흑구(黑溝) 구간을 넘어 근채구(芹菜溝) 구간을 지나 곧장 동대정자초소(東大頂子哨所)로 일직선으로 가면 성벽이 끊어졌다 이어졌다하는 단속구간을 볼 수 있는데 성돌이 산등성이에 가득 쌓였음. 이 선은 산봉우리가 잇따라 이어지고 거대한 절벽이 끊어짐이 없으며, 크고 작은 입구(산구)가 끊임없이 나타나 밀림 중의 성벽이 갑자기 숨었다가 나타났다가 하는데, 이 구간의 잔존 성벽의 길이는 1,050m임. 봉황산 구간은 산성 서북모서리 입구(山口)에서 시작하여 입자구(砬子溝)와 봉황산 동산(東山) 구역에 들어가면 일직선으로 찬운봉에 도달하는데, 무너진 성벽은 끊임이 없이 연속해, 총 길이 1,000m임. 성돌은 성벽의 기초 양측에 퇴적되어 있음. 이 구간의 성벽은 대부분 완만한 산비탈에 축조하였지만 해발은 비교적 높아 모두 600m이상임.
다음으로 소석형(少石型)임. 대부분 성돌이 이미 남아있지 않은 성벽을 가리킴. 이런 유형은 주로 공로(公路)와 주거 구역에 가까운 산성의 남쪽 구역, 즉 남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뻗은 길이 2,000m 구간임. 이 구간의 성벽의 특징은 대부분 성돌이 사람들이 운반해 가고 다만 성벽 기초와 일부분의 성돌이 남아있음. 더욱이 남문의 양측 각각 500m 이내의 성벽은 일찌기 아주 심하게 파괴되었음.
천연성벽 부분.
봉황산산성은 인공적으로 수축한 높고 큰 성벽과 깎아지른 듯한 천연 절벽이 이어져서 구성되었음. 고구려인은 깎아지른듯 한 천연 절벽사이에 한 구간 한 구간씩 성벽을 축조하여 한 기의 완전한 산성을 구성하였음. 봉황산산성의 천연 성벽 부분은 대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음
먼저 대유형(大類型)임. 길이가 50m 이상의 천연성벽을 가리킴. 총 34개 구간. 그 중에서 200m를 초과하는 것이 12개 구간이고 400m를 초과하는 것이 9개 구간임. 가장 긴 천연성벽은 묘구(廟溝) 입구(山口)의 거대 천연성벽인데 전체 길이 800m. 가장 높은 천연성벽은 찬운봉의 깍아지른 듯한 절벽인데 전체 길이는 450m. 동대정자(東大頂子)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필마구(匹馬溝) 구간의 깎아지른 듯한 장벽은 해발 고도가 모두 700m이상임.
다음으로 소유형(小類型)임. 50m 이하의 거대 암반은 모두 53개 구간. 그 중 20m 이하는 44개 구간이 있고, 10m이하는 18개 구간이 있음. 이러한 종류의 천연 성벽은 모두 성벽 라인을 따라 이어진 크기가 같지않은 자연 암석임. 그것은 지면에서 모두 10m 이상의 높이이며 표면은 반질반질 윤이 나서 사람이 넘어가기 어려움. 그러므로 천연성벽이라 간주할 수 있음. 인공으로 축조한 성벽은 단지 이런 거대 암석에 연접하기만 하면 되며, 이러한 거대 암석은 모두 성벽보다 높아 사람이 그 위로 올라가면 시야가 탁 트임. 북문에서 동쪽으로 600m 가면 거대 암석을 만나는데 즉 성벽이 끝나는 지점으로, 내측의 거대 암석 위에 발 디딜 곳이 보이는데, 이것은 당시 축성할 때 남겨놓은 것임.
성곽시설로는 성문, 계곡입구 시설, 점장대, 요망대, 기간좌(旗杆座)등이 있음.

 

역사적 의미

 

산성의 성격은 크게 네 가지 정도 말할 수 있음.
첫째, 요동반도의 병사 양성 및 전력 축적 근거지. 봉황산에 쌓은 오골성은 요동반도 동남부의 교통 중심지에 자리함. 오골성은 서쪽으로 낭낭산성을 비롯한 수암 지역의 여러 산성을 거쳐 안시성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백암성을 지나 요동성과 이어지며, 동쪽으로 압록강 의 물길을 따라 “박작성”을 지나 중상류에 있는 고구려의 내지로 직통할 수 있음. 명나라 때의 『遼東志』에 오골성은 “성은 산을 따라 쌓았으며, 10만의 무리를 수용할 수 있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이러한 설명은 실제 사실과 부합. 오골성의 전체 성곽이 높고 험하며 둘레가 16㎞에 이름. 오골성은 고구려 산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산성이며 현재 남아있는 보존 상태도 가장 좋음. 오골성이 위치한 곳은 전쟁이 빈번한 요하 일선에서 비교적 멂. 그러나 고구려 역사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음이 뚜렷하며, 특히 고구려 말기에 그러한 역할은 두드러짐. 612년 수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원정할 때, 우문술, 설세웅, 우중문 등의 대장군이 병사들을 이끌고 이 산성을 지나갔던 적이 있으며, 645년 이세적(李世勣)이 이끄는 군대가 백암성을 공격하자 “백암성의 청병 요청에 의해 오골성에서 군사를 보내 도왔음(『자치통감』권179 648년 당나라 설만철(薛萬徹)이” 병사들이 쳐들어가 박작성을 포위하자.......(중략).... 고구려는 장군 고문(高文)을 보내 오골성과 안시성 같은 여러 성의 군사 3만 여 명을 이끌고 와서 도왔다 “(『구당서』薛萬徹傳)”. 이처럼 오골성이 그 당시에 주위의 크고 작은 성들의 구원에 응하여 지원했던 것을 보면 이곳이 군사를 양성하고 전력을 축적하는 근거지 역할을 하였음.
둘째, 요동에서 평양으로 가는 관문. 오골성은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였을 때도 중요한 공격 대상으로 등장함. 당 태종이 안시성을 수없이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자 당 태종에게 항복한 고연수, 고혜진이 “오골성 욕살은 늙어서 성을 굳게 지키지 못할 것이니 그 성의 군수 물자와 양곡을 빼앗아 평양으로 전진하자”고 건의함. 그러나 건안성과 신성에 있는 10만 병력과 안시성의 병력이 퇴로를 막고 뒤를 칠까 두려워 오골성을 치지 못하고 결국 안시성에서 패하고 돌아감. 여기서 오골성은 요동반도에서 평양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임을 쉽게 알 수 있음.
셋째, 봉황성은 안시성이 아님. 채희국, 전준현 같은 북한학자들은 봉황산성은 곧 환도산성이라고 주장함. 삼국사기의 산상왕 13년(209)에 “왕은 도읍을 환도로 옮겼다”고 하였는데, 이 환도가 바로 봉황산성이라는 것임. 후에 수도를 현재의 평양으로 옮긴 뒤에도 봉황성을 부수도로 삼고 전쟁이 나면 국왕이 직접 이 성으로 나아가 지휘했으며, 관구검이나 모용황이 쳐들어왔던 환도성도 바로 이 봉황성이라는 주장임.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에 “안시성은 옛날 안시홀, 혹은 환도성이라고 불렀다”고 되어 있고, 『삼국유사』 왕력에 “임인 8월에 안시성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곧 환도성이다”라고 한 기록을 바탕으로 환도, 즉 안시성이 한 때 고구려의 수도였으며, 환도, 안시는 곧 지금의 봉황성이라는 논리도 추가됨. 봉황성이 안시성이라는 주장은 홍대용의 『담헌서』와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나오지만 230여 년 전 이곳을 지나던 연암은 해박한 역사지식을 이용하여 봉황성은 안시성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음.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 이라고 함. 『당서』에 안시성은 평양에서 500리요, 봉황성은 또한 왐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는데, 「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 하니 무엇을 이름하는 것인지 모르겠음. 또 「地志」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懸) 동북 70리에 있다고 했으니, 대체로 개평현에서 동쪽으로 수암하(水巖河)까지가 300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쪽으로 2백리 가면 봉황성임. 만일 봉황성을 옛 평양이라고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00리란 말과 서로 부합됨. 『당서』의 기록 때문에 잘 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같은 『당서』에서도 지리를 전문으로 다룬 「地志」에서 안시성이 개평현 부근에 있다고 봉황성에서 서쪽으로 500리를 가면 안시성이 있으니 봉황성이 안시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음.
넷째, 요동의 중심성으로 최고 지방관인 욕살(褥薩)이 파견된 대성(大城)의 하나임.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한 뒤인 5세기 경에 처음 축성된 것으로 추정됨. 서쪽으로 낭낭산성을 거쳐 안시성에 이르고, 서북으로 백암성을 지나 요동성과 통하며, 동남쪽으로는 압록강가의 박작성을 지나 평양이나 국내성과 이어지는 요동반도 동남부의 교통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임. 이 산성은 서쪽으로 봉황산의 줄기와 동쪽으로 고려성자산(高麗城子山)이라는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이 이어지는 험준한 산세를 자연 성벽으로 삼고, 산봉우리 사이의 낮은 지대에는 성벽을 쌓음. 성의 규모는 둘레 15,955m로 현존하는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큶. 86구간의 석축 성벽과 87구간의 천연성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돌로 쌓은 성벽의 총 길이만 7,525m에 이름. 성 내부는 평탄한 지대가 펼쳐져 있는데, 명나라 때 편찬된 『요동지』에는 “오골성에 10만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함.

 

자연환경

 

요녕성 봉성시의 동남쪽 5㎞ 지점, 봉황산(鳳凰山)에 위치. 요녕성 봉성진 고성리에 있는 봉황산(鳳凰山)에 위치.
애하(靉河) 좌안(左岸). 봉황산의 최고봉인 찬운봉(攢雲峰)은 해발 836.4m. 봉황산산성 성곽의 사면은 높고 험준한데, 내부는 거대한 분지 모양을 띰. 봉황산의 최고봉인 찬운봉(攢雲峰)(해발 836.4m)과 맞은편에 있는 동대정자(東大頂子; 해발 약 800m)는 오골성의 동, 서 최고점을 이루며, 산성을 따라서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거대 절벽들이 이어져 있어 험준한 지형을 이룸. 산성이 위치한 자연 환경은 바로 천연적인 험산준령(險山峻嶺)으로 이어진 환형 대분지(環形 大盆地)임.

 

유물정보

 

철제 화살촉(鐵箭镞) 1점, 철조(鐵條) 1점, 동전(銅錢) 1점, 석제절구(石臼) 3점, 토기편(土器片) 1점, 기와편(瓦片) 1점,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 1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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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官晓峰, 「現存最大的高句麗山城-鳳凰山山城」『蘭台世界』 2004-2, 遼寧省檔案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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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龍彬·司偉偉, 「鳳城市高句麗鳳凰山山城」『中國考古學年鑒』, 文物出版社, 2008
· 王禹浪·王文軼, 『遼東半島地區的高句麗山城』, 哈爾濱出版社, 2008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 王禹浪·王文軼·王宏北, 「遼東半島高句麗山城槪述」『黑龍江民族叢刊』 2010-2, 2010
· 王禹浪·王文軼, 「丹東地區的高句麗山城」『哈爾濱學院學報』 2012-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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