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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만발발자유적(萬發拔子遺蹟)

  • 구분
    유적
  • 시대
    신석기시대~고구려 중기
  • 위치
  • 유물번호
    S000134
  • 위치(출토지)
    通化市 金廠鎭 躍進村
  • 지역
    통화(通化市)
  • 유형
    취락
  • 형태사항
    52점 
출토지
통화시 금창진 약진촌 (通化市 金廠鎮 躍進村)
연대
신석기 말기-청동기 시대, 고구려 초기와 중기
역사적 의미
우선 신석기-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음. 이 유적의 출토 유물은 渾江 중류 양안의 集安 荒崴子·長崗·東村·梨水·南臺子·二道崴子, 通化 下龍頭·江沿村南山·江口村 등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성격이 같음. 석기는 석제 괭이(打製 石鎬), 석제 호미(石鋤) 등이 있고, 마제석촉(磨製石鏃), 석제 창(石矛), 침상기(枕狀器) 등이 있음. 토기는 배(杯), 고배(豆), 호(罐), 발(鉢), 방추차(紡輪), 어망추(罔墜) 등이 있음. 三足器의 器足도 발견되었음. 이로 보아 유적지의 상한이 신석기시대, 하한은 청동기시대로 추정됨. 또한 출토 유물로 보아 채집 수렵 단계에서 농업, 어렵을 위주로 하는 定住단계로 진입했다고 추정되기 때문임.[通化市文物志].
초기 貊族의 씨족취락설도 있음. 이 유적지의 3, 4기 문화층은 춘추-전국에서 서한 시기에 해당하는데, 二江(압록강, 혼강)과 二河(태자하, 혼하) 상류를 중심으로 동북 맥 계통의 貊족이 집중 분포한 시기임.
만발발자 유적은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주요 부분인데, 주거지, 고분, 출토유물 등에서 二江유역 토착 문화의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음. 그 중 3기 문화층은 전체 유적지에 넓으며 출토유물도 가장 풍부함. 이 시기의 문화층은 石棺(盖)墓와 靑銅短劍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고구려 선대 동북 貊族의 청동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됨. 따라서 만발발자 3-4기 문화층은 고구려 건국 직전에 二江 유역에 분포한 초기 貊族의 씨족취락으로 추정됨. 계곡의 높은 대지 위에 건축한 “環山圍溝(壕)”와 “石垣聚落”으로서 고구려 건국 이후에 출현하는 “성읍취락(주로 산성)”의 전신 내지는 기원으로 추정됨[王綿厚].
비류국(연노부, 소수맥) 소재지로 보기도 함. 송양의 비류국은 졸본천 상류에 있다고 함. 지금까지 통화지역에서는 만발발자 유적을 포함하여 灣灣川 유적, 黎明 유적, 자안산성, 夾心屯 유적, 平崗山 유적, 樺樹河口 유적, 砬砬屯 유적, 耐火廠北山 유적, 西熱村 유적, 東熱村 유적, 向陽 유적, 鴨園隧洞山頂 유적 등이 발견됨. 이들 유적은 졸본천의 상류에 위치한 비류국의 문화유적으로 추정됨. 졸본천과 비류국은 모두 고구려 건국기의 涓奴部에 속함. 고구려 초기 정권은 졸본천의 涓奴部에 위치했고 그 중 비류국의 지역을 포함함. 대체로 지금의 통화지역이 연노부로 추정되며, 만발발자 유적지는 대표적인 고대 취락지로 고구려를 흥기시킨 “연노부”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됨[東北史地 2006-2].
또한 만발발자 유적은 압록강 중상류의 청동시시대, 고구려시기의 고고환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함. 특히 청동기시대-초기 철기시대의 유물 분포 면적은 크고 풍부한 반면, 고구려 초기의 유물 분포 면적은 비교적 크지만 그 문화 퇴적층은 비교적 얇음. 이는 생업유형의 변화를 반영하는데, 西漢 이후 이 지역은 상대적으로 차고 건조한 기후로 변화되어 농경의 어려움이 확대되고 인구압이 증가해 생태환경압력이 크게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됨. 또한 고구려 초기 단계[西漢 시기]에는 環壕를 구축했는데, 이는 유적지가 이미 엄밀하게 조직된 대형 촌락에 속하게 되었으며, 획득한 식물자원과 생활공간에 대한 보호와 관리가 강화되었음을 반영함[邊疆考古硏究 2]. 한편 만발발자 유적은 통화지역의 선사-고대문화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표준유적의 성격을 띄고 있음. 만발발자에서 주목되는 발형토기류나 적석류의 무덤은 혼강유역 고구려 토착문화이자 기저문화로서의 측면을 반영하며, 고구려 건국 후 기원후 5세기대에 이르기까지도 이러한 측면이 고구려 지역에 강하게 지속되었음을 반영함. 이 유적을 통해 통화의 지역문화가 기원전 3세기를 기점으로 느슨한 청동기사회에서 완전한 청동기사회로, 그리고 기원전 2-1세기를 기점으로 괴석조 석관묘, 대석개묘, 종횡세장형 토광묘, 직장, 앙신굴지장의 문화에서 적석묘, 세골장, 화장의 문화로 변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또한 적석묘 문화의 형성과 함께 취락이 대형화하고 방어적 성격이 강한 환호와 구상유구가 등장하였음도 알 수 있음. 이렇게 볼 때 통화지역은 기원전 3세기에는 토착집단이 주변과의 교섭을 통해 내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판단되고, 기원전 2-1세기에는 혼강 중류역, 즉 환인 방면으로부터 밀려들어온 적석묘집단에 의해 지역집단이 통합된 것으로 생각되며, 이 때부터는 환인지역보다 위상이 내려가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짐. 아무튼 통화지역에 ‘원고구려문화=적석묘문화’가 출현하는 시점은 요동 동부의 다른 지역보다 한 세기 가량 늦은 기원전 2-1세기이고, 그러한 변모는 갈등적인 측면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음[오강원].
자연환경
남안의 언덕산에 위치함. 通化市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3㎞ 거리이며, 통화-집안 도로가 유적지 아래로 지나감. 萬發拔子의 原名은 萬寶鈸子로 ‘王八脖子’는 속명임. 유적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의 끝단에 위치해 있는데, 산능선과 언덕산으로 이루어진 지형이 마치 자라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王八脖子’라 칭했음. 종래 通化-集安 도로(303국도)가 자라의 목에 해당하는 동북쪽 산능선과 서남쪽 언덕산 사이의 ‘凹’자 부분을 지나갔는데, 최근 도로를 확장하면서 언덕산 서편 아래로 도로의 경로가 바뀌게 되었음. 유적지 남쪽에서 金廠河(원명 大廟溝河)가 서북쪽으로 흘러 구릉 서면의 평원을 지나 서북 500m 지점에서 혼강으로 유입됨. 유적지의 북, 서, 남 3면에는 1-2단으로 이루어진 충적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 특히 서북 방면으로는 渾江 남안의 충적평지로 이어짐.
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通化縣文物志』, 1987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吉林省志』 43(文物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通化市文物管理協公室, 「通化市王八脖子遺址及附近幾處地點的調査與發掘」『博物館研究』 1997-2, 1997
· 金旭東·安文榮·楊立新, 「探索高句麗早期遺存及通起源」『中國文物報』 2000年 3月 19日版, 2000
· 國家文物局 主編, 「吉林通化萬發撥子遺址」『1999中國重要考古發現』, 文物出版社, 2001
· 王綿厚, 「關於通化萬發撥子遺址的考古與民族學考察」『北方文物』 2001-3, 2001
· 金旭東, 『東北地區三至十世紀古文化學術討論會』,
· 金旭樂·趙殿坤·董峰, 「吉林通化市萬發撥子遺址二十一號墓的發掘」『考古』 2003-8, 2003
· 오강원, 「萬發撥子를 통하여 본 通化地域 先原史文化의 展開와 初期 高句麗文化의 形成過程」『북방사논총』 1, 동북아역사재단, 2004
· 湯卓煒·金旭東·楊立新, 「吉林通化萬發撥子遺址地學環境考古研究」『邊疆考古硏究』 1, 2003
· 王志敏, 「通化江沿遺跡群調査」『東北史地』 2006-6, 2006
· 王貴玉·王珺·王志敏, 「通化江沿遺跡群所在地當卽卒本夫餘初居地」『東北史地』 2006-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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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발발자유적(萬發拔子遺蹟) 자료번호 : ku.d_0001_0040_0010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