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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위고와 토번의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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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조(南詔)
토번의 대신들은 그 해의 간지(干支)가 경진(庚辰)으로 진(辰)이 들었으므로 군대를 내기에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남조를 습격할 것을 도모하여, 무리를 통솔하여 길을 닦았다. 장차 10월에 수주(雟州)를 포위할 목적으로 곤명에 약 8만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모두 1년 분의 군량을 준비하도록 명하였다. 찬보는 외숙 양약라(攘鄀羅)를 도통(都統)으로 삼고, 상걸력(尙乞力)기서남삭(欺徐濫鑠)을 보내 서공천(西貢川) 주 001
각주 001)
西貢川: 뒤에 나오는 曩貢川과 함께 모두 西貢節度와 曩貢節度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南詔과의 경계지역에 설치한 吐蕃의 군사진지임에 분명하지만, 그 구체적인 지역은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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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모심위고는 서로 알리고, 위고는 부장 무면(武免)에게 명하여 노사(弩士) 3,000을 이끌고 달려가게 하고, 항영조(亢榮朝)는 10,000명을 거느리고 여주(黎州)에, 그리고 위량금(韋良金)은 25,000명을 이끌고 수주에 주둔하게 하였다. 남조와 약속하기를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모두 진군하는데 아준첨성(俄準添城) 주 002
각주 002)
俄準添城:『新唐書』卷42 「地理」6 巂州越巂郡조에 대한 본주에 따르면 陽蓬嶺을 지나 백여 리를 가면 俄準添館에 당도한다고 하였으니 바로 본문의 俄準添城을 두고 말한 것이다. 오늘날 四川 德昌縣 南永勝鄕 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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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날 경우에는 남조가 군량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토번은 무리 5만을 이끌고 낭공천(曩貢川)으로부터 군대를 둘로 나누어 운남을 공격하였는데, 일 군은 낙제성(諾濟城)으로부터 수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모심은 동만(東蠻)과 마사(磨些)의 거취를 추측하기 어려워 두려워하였다. [그들이] 토번의 향도가 될까 염려하여 먼저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위고가 다음과 같이 통지하였다. “수주는 실로 교통의 요지여서 여러 주를 방어하니, 적이 백방으로 넘봅니다. 그런 까닭에 강력한 부대로 지키게 하고 주둔지와 방벽을 촘촘히 설치하였으며 군량과 무기를 도처에 마련해 놓았으니, 동만이 어찌 감히 두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이모심은 이에 동만과 마사의 여러 만에게 격문을 보내어, 식량을 성안으로 들이고, 들이지 못한 것은 모두 태우게 하였다. 토번의 옹성장(顒城將) 양만파(楊萬波)가 항복할 것을 기약하였으나, 일이 지연되는 바람에 토번이 병사 5천으로 성을 지키게 하였으나, 위고의 장수들이 격파하였다. 양만파가 농관(籠官)주 003
각주 003)
籠官: 唐代 吐蕃의 將帥職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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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함께 옹성을 함락시킨 이래로 옹성의 인민 2000을 숙천(宿川) 주 004
각주 004)
宿川: 蠻宿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四川 滎經縣의 西境 혹은 瀘定縣 내를 가리키는데, 唐代 吐蕃을 맞이하는 장소였다(『方輿紀要』卷72 「榮經縣」 ‘蠻宿川’, “在縣西境, 亦唐時招納吐蕃之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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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옮겼다. 위고의 장수 부충의(扶忠義)가 또 말공성(末恭城) 주 005
각주 005)
末恭城: 지금의 四川 汶川縣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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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취하였는데, 노획한 소와 양이 천을 헤아렸다. 찬보의 대장 기전양율(旣煎讓律)이 군대를 십공천(十貢川)에서 일사(一舍)주 006
각주 006)
一舍: 30里의 行程으로서, 군대에서 하루의 행군 거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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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거리에 군대를 주둔하였으며, 국사(國師)주 007
각주 007)
國師: 馬定德에 관한『新舊唐書』다른 기록에서는 籠官으로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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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정덕(馬定德)이 종족 부락을 이끌고 나와 항복하였다. 서공절도감군(西貢節度監軍) 야다수전(野多輸煎)은 찬보 걸립찬(乞立贊)의 양자여서, 마땅히 전 찬보를 따라 죽어야 했는데, 그 또한 부충의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적의 기세가 꺾여 군대가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기서남삭(欺徐濫鑠)철교(鐵橋)에 이르자, 남조(南詔)가 그 물에 독을 풀어 사람이 많이 죽었다. 이에 [남조는] 납천(納川)으로 옮겨 방벽을 쌓고 대기하였다. 이 해에 토번은 때 이른 서리와 눈 때문에 아무런 전공(戰功) 없이 철군하였으며, 다음해를 기약하였다. 토번남조가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는 것 때문에 고전하였고, 또한 감히 남조를 도모하지 못하였다. 위고는 부장 무면에게 수주에 주둔케 하여 각급의 요해지를 지키게 하였는데, 비록 남조와의 경계지역이라도 요해지가 있는 곳이면 주둔하여 지키게 하였다. 토번은 들판에서 여러 차례 패한 것을 교훈으로 삼아, 노수(瀘水) 주 008
각주 008)
瀘水: 지금의 四川의 雅礱江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좁게는 四川 西昌市 서남의 安寧河를 가리킨다.『新唐書』卷158 「韋皋傳」에 “東蠻斷瀘水橋攻吐蕃, 請(韋)皋濟師”이라고 되어 있는데, 瀘水위에 다리를 건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다리는 지금 西昌市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安寧河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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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 세 개의 지점에 둔(屯)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논망열(論妄熱)을 보내 노수 주변의 여러 만을 유치하여 실섭(悉攝)에 다시 성을 쌓았다. 실섭토번의 주요 요새지이다. [노수 주변] 만의 추장들이 은밀히 남조위고의 부장 두비라(杜毗羅)를 인도하여 [실섭을] 기습하였다. [정원(貞元)] 17년(801) 봄, 밤에 노수를 건너 적의 주둔지를 격파하고 500급을 베었다. 적들은 녹위산(鹿危山) 주 009
각주 009)
鹿危山: 현재 四川 理縣 東北에 있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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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달아나 [그곳을] 지켰다. 두비라가 매복하여 기다렸다가 또 싸우니, 적이 크게 패주하였다. 이때에 강(康)주 010
각주 010)
康:『新唐書』卷221下 「西域傳」에서 康은 薩末鞬, 颯秣建이라고도 하는데 북위때의 이른바 悉萬斤이라고 하였고, 당대에는 이것이 安, 曹, 石, 米, 何, 火尋, 戊地, 史의 여덟 氏로 분리되어 저마다 왕 노릇을 했다고 한다. 즉 康國에서 여덟 나라가 떨어져 나와 새로 생겼다는 것이다. 康은 이들 諸國가운데 가장 강했다고 한다. 그 위치는 오늘날 러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Samarkand)일대였는데 唐 高宗 永徽연간(650~655)에 安西都護府의 소속이 되었다. 즉 본문에서 말한 ‘康’은『신당서』에 따르면 ‘康國’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이처럼 사마르칸트에 위치한 강국의 군대가 파미르 고원과 靑海를 건너 사천의 남부까지 원정을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舊唐書』卷198 「大食國傳」에 따르면 이미 睿宗 景雲 2년(711)이래로 康國, 石國등이 大食에 신속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토번과는 관련이 없다. 토번이 강국의 병력을 불러들일 만큼 두 나라 사이에는 어떠한 접촉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강국의 군대가 토번군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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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흑의대식(黑衣大食)주 011
각주 011)
黑衣大食: 압바스왕조를 가리킨다. 압바스왕조는 750년에서 1258년까지 주로 중동지역을 근거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吐蕃과 더불어 당과 전투를 치렀을 가능성은 없다. 다만 압바스왕조의 깃발이 항상 흑색이었기 때문에 唐代 黑衣大食이라고 하였다고 사실을 고려해 보면, 당시 吐蕃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 세력 중에 검은 깃발을 사용한 집단이 있어 唐朝에서 이를 압바스왕조와 혼동하여 黑衣大食으로 표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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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군대 및 토번의 대추(大酋)가 모두 항복하니, 사로잡힌 병사가 2만이었다. 또 귀주(鬼主)를 모아 노수의 서쪽에서 적을 파하였다.

  • 각주 001)
    西貢川: 뒤에 나오는 曩貢川과 함께 모두 西貢節度와 曩貢節度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南詔과의 경계지역에 설치한 吐蕃의 군사진지임에 분명하지만, 그 구체적인 지역은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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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俄準添城:『新唐書』卷42 「地理」6 巂州越巂郡조에 대한 본주에 따르면 陽蓬嶺을 지나 백여 리를 가면 俄準添館에 당도한다고 하였으니 바로 본문의 俄準添城을 두고 말한 것이다. 오늘날 四川 德昌縣 南永勝鄕 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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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籠官: 唐代 吐蕃의 將帥職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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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宿川: 蠻宿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四川 滎經縣의 西境 혹은 瀘定縣 내를 가리키는데, 唐代 吐蕃을 맞이하는 장소였다(『方輿紀要』卷72 「榮經縣」 ‘蠻宿川’, “在縣西境, 亦唐時招納吐蕃之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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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末恭城: 지금의 四川 汶川縣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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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一舍: 30里의 行程으로서, 군대에서 하루의 행군 거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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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國師: 馬定德에 관한『新舊唐書』다른 기록에서는 籠官으로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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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瀘水: 지금의 四川의 雅礱江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좁게는 四川 西昌市 서남의 安寧河를 가리킨다.『新唐書』卷158 「韋皋傳」에 “東蠻斷瀘水橋攻吐蕃, 請(韋)皋濟師”이라고 되어 있는데, 瀘水위에 다리를 건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다리는 지금 西昌市 서쪽으로 10리에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安寧河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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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鹿危山: 현재 四川 理縣 東北에 있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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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康:『新唐書』卷221下 「西域傳」에서 康은 薩末鞬, 颯秣建이라고도 하는데 북위때의 이른바 悉萬斤이라고 하였고, 당대에는 이것이 安, 曹, 石, 米, 何, 火尋, 戊地, 史의 여덟 氏로 분리되어 저마다 왕 노릇을 했다고 한다. 즉 康國에서 여덟 나라가 떨어져 나와 새로 생겼다는 것이다. 康은 이들 諸國가운데 가장 강했다고 한다. 그 위치는 오늘날 러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Samarkand)일대였는데 唐 高宗 永徽연간(650~655)에 安西都護府의 소속이 되었다. 즉 본문에서 말한 ‘康’은『신당서』에 따르면 ‘康國’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이처럼 사마르칸트에 위치한 강국의 군대가 파미르 고원과 靑海를 건너 사천의 남부까지 원정을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舊唐書』卷198 「大食國傳」에 따르면 이미 睿宗 景雲 2년(711)이래로 康國, 石國등이 大食에 신속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토번과는 관련이 없다. 토번이 강국의 병력을 불러들일 만큼 두 나라 사이에는 어떠한 접촉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강국의 군대가 토번군에 참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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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黑衣大食: 압바스왕조를 가리킨다. 압바스왕조는 750년에서 1258년까지 주로 중동지역을 근거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吐蕃과 더불어 당과 전투를 치렀을 가능성은 없다. 다만 압바스왕조의 깃발이 항상 흑색이었기 때문에 唐代 黑衣大食이라고 하였다고 사실을 고려해 보면, 당시 吐蕃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 세력 중에 검은 깃발을 사용한 집단이 있어 唐朝에서 이를 압바스왕조와 혼동하여 黑衣大食으로 표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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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양약라(攘鄀羅), 상걸력(尙乞力), 기서남삭(欺徐濫鑠), 이모심, 위고, 위고, 무면(武免), 항영조(亢榮朝), 위량금(韋良金), 이모심, 위고, 이모심, 양만파(楊萬波), 위고, 양만파, 위고, 부충의(扶忠義), 기전양율(旣煎讓律), 마정덕(馬定德), 야다수전(野多輸煎), 걸립찬(乞立贊), 부충의, 기서남삭(欺徐濫鑠), 위고, 무면, 논망열(論妄熱), 위고, 두비라(杜毗羅), 실섭, 두비라
지명
토번, 남조, 수주(雟州), 곤명, 서공천(西貢川), 여주(黎州), 수주, 남조, 아준첨성(俄準添城), 남조, 토번, 낭공천(曩貢川), 운남, 낙제성(諾濟城), 수주, 마사(磨些), 토번, 수주, 마사, 토번, 토번, 숙천(宿川), 말공성(末恭城), 십공천(十貢川), 철교(鐵橋), 남조(南詔), 남조, 납천(納川), 토번, 토번, , 남조, 남조, 수주, 남조, 토번, 노수(瀘水), 노수, 실섭(悉攝), 실섭, 토번, 노수, 남조, 노수, 녹위산(鹿危山), 토번, 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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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위고와 토번의 공방 자료번호 : jo.k_0017_0222_0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