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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해양국제사법판결선집

G.6. 오토만 제국 시기에 영국의 행위 v. 카타르의 Al-Thani 추장

6. 오토만 제국 시기에 영국의 행위 v. 카타르의 Al-Thani 추장
158. 오토만 시대에 카타르와 영국의 관계는, 카타르 항구에서 생겨나는 해적행위에 맞선 해양 평화의 수호와, 괴롭힘으로부터 지역의 인도 상인 보호를 지속하는 것에 대한 열망이었던 것이 특징이다. 동시에 영국은, 오토만이 반도의 사실상 통치를 하고 있으며, 이러한 통치를 인정받으려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1882년 인도 정부의 해명에 대한 답변으로 영국 정부가 지시한 내용이 이러한 정책의 좋은 예이다. 이 지시에 따르면, 비록 카타르 통치자가 오토만의 지위를 인정했지만, 그는 인도 정부의 관료들과 가깝고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그리고 해양 평화에 영향을 미칠 모든 문제들을 따르기 위한 힘(세력)을 얻어야 하였다(Lorimer, 카타르의 준비서면, Vol.3, Ann.Ⅱ.5, p. 217 참조).
159. 1889년 오토만이 카타르에 주둔하는 군대를 보강했을 때, 콘스탄티노플의 영국 대사는, 터키의 권한에 놓인 오만(오늘날의 UAE! Saldanha, 카타르의 준비서면, Vol.4, Ann.Ⅱ.8, pp. 221-222 참조)에 대한 오토만의 어떠한 간섭 또는 침략 시도도 영국 정부가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오토만 정부에 전할 것을 지시받았다. 하지만 카타르와 그의 통치자인 Al-Thani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1895년 3월의 Al-bin-Ali 부족과 관련한 사건들 또한 영국의 행동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Al-bin-Ali 부족은 바레인의 통치자와의 갈등을 겪고 카타르의 통치자 Jassim bin Thani의 도움으로 주바라 근방에 정착하기 위해 돌아왔다(주바라가 바레인 통치자 Al-Khalifah의 권한과 통제 하에 있지 않았다는 추가적 증거).
160. 바레인 통치자는 이러한 정착으로 인해 야기된 바레인에 대한 위협을 영국 정치상주대표에게 보고하였다. 영국 정치상주대표는 부족장 Jassim에게 영국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오토만은 그 지역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영국-바레인의 안전 보장과 관련된-은 군함을 파견하여, 바레인을 공격하기 위해 오토만과 통치자 부족장 Jassim이 모은 것으로 보이는 44척의 배를 파괴하였다. 그 후, 부족장 Jassim은 Al-bin-Ali의 퇴거를 포함한 영국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오토만은 이에 대해 항의했지만, 영국은 그들의 보호 하에 놓인 바레인의 방어에 필요한 수단이었다고 답변하였다.
161. 이와 같이, 오토만 시대에 영국의 행동은 1868년과 1871년과 같았다. 카타르는 Al-Thani 통치자의 영역이었지만, 그는 해양 평화를 바꾸거나 오토만을 도울 수 없었는데, 이는 영국의 정치적 보호 하에 놓여 있는 바레인 섬 서부와 오만 동부에 대한 위협으로 비춰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국은, 카타르 영토와 부족에 대한 실효적 통제로 발전되는 Al-Thani 통치자의 영토에 대한 권원의 응고에 대해서는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162. 마지막으로 현상유지법칙에 의거한 바레인의 주장에 대해, 오토만 시대(1871-1915)에 바레인이 1880년과 1892년 영국과 맺은, 그리고 1892년 걸프지역의 다른 지역 통치자들과 맺은 배타적인 합의를, 카타르는 전혀 체결하지 못했다는 점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사실 1891년, 카타르의 부족장 Jassim은 영국에 휴전 협정과 다름없는(바레인 통치자의 것과는 다른) 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했지만, Sultan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체결함으로써 얻는 것이 없을 것이라며 영국은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카타르의 준비서면, Vol. 5, Ann.Ⅱ.8, p.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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