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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해양국제사법판결선집

G.1. 1867년 해상에서 바레인 통치자의 전쟁행위와 영국의 개입

G. 전체 카타르 반도의 영토 및 그 인접 섬들에 대한 역사적 응고와 Al-Thani 통치자들의 시원적 권원에 대한 승인(1868-1915)
1. 1867년 해상에서 바레인 통치자의 전쟁행위와 영국의 개입
121. 1867년 카타르의 Mohamed bin Thani와 다른 수장들(headmen) 그리고 바레인 부족장 Mohamed bin Khalifah al Khalifah 사이의 늘어가는 긴장이, 바레인 섬으로의 국외 추방과 와크라(Wakrah)의 바레인 추장과 그의 아들 Ahmed이 카타르의 베두인(Bedouin)을 장악하게 되는 결과로 전개되었다. Bida와 와크라의 추장은 베두인의 반환을 요구했고, 그들의 요구가 들어지지 않으면, 와크라의 바레인 부족장 대표를 추방하는 과정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1868년 4월 23일 걸프의 영국 정치상주대표, 중령 Cotton Way의 서신에서 이 초기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4. Gutter의 베두인 Ali bin Shamir al Naimi가 바레인 부족장 Ahmed bin Mahomed bin Sultan에 의해 체포되었고, Gutter 해안의 바레인 부족장 대표가 그의 부족인 와크라의 나임으로 가는데 나임과 Biddah, 도하와 Dougha의 사람들이 뭉쳐서 그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는 거절당했고, 그들은 부족장 Ahmed를 와크라 외부로 추방하기로 결정하였다.” (카타르의 답변서, Vol. 3, Ann. Ⅲ.3, p. 13.)
122. 카타르의 결정을 감안하여, 부족장 Ahmed는 카타르에서 탈출하여 바레인 추장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보고하였고, 바레인 추장은 카타르 Mohamed bin Thani의 아들인 부족장 Jassim을 면담을 위해 바레인으로 초청했으나 그가 도착하자 그를 투옥해버렸다. 그 후에, 바레인 통치자는 아부 다비(Abu Dhabi)의 통치자와 함께, 바다를 건너 와크라, 비다, 도하 그리고 Dougha의 마을들에 대한 공격에 착수했다. 도하는 완전히 초토화됐고 마을은 약탈당했다. 희생자들은 와하비 군주-카타르에 대한 권한을 가진다고 주장하던- 에게 보상을 요구했으나, 보상 요구는 바레인 통치자에 의해 거절당했다. 카타르의 애원에 의해, 그와 거의 동시에 나임이 바레인 통치자의 아들 Ahmed를 물리친 Al-Hamroor에서의 만남이 이뤄졌다. 1867년 12월 7일, 걸프지역의 영국 정치상주대표 Pelly 중령은 봄베이 정부에 보내는 편지에서, 카타르에 대한 바레인의 공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바레인 제도의 추장이 아라비아의 본토와 인접한 Gattar 지역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며, 그 지역의 거주자들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공격을 하는 데 Abuthaby 추장의 도움을 보장받았다 ...... 연합한 추장들은 al-Wakrah와 Al Biddah의 마을을 약탈하였다......”(카타르의 답변서, Vol. 3, Ann.Ⅲ.1, p. 1.;수석 정치주재관이 정치상주대표에게 보낸 1867년 11월 27일자 서신 참조, 카타르의 준비서면, Vol. 5, Ann.Ⅱ,5, p. 71.)
123. 그 이듬해인 1868년, 카타르 부족들은 역시 바다를 건너 보복성 공격을 계획했고, 바레인 섬을 놀라게 해주는데 거의 성공했다. 이 사건은 걸프 지역에 전쟁 상황-“전쟁”이라는 표현이 몇몇 영국 신문에서 실제로 사용되었다(예를 들어, 카타르의 준비서면, Vol. 5, Ann. Ⅱ.25, p. 73 참조)-을 만들어 모든 다른 당사국들을 놀라게 하였다. 1868년 4월 4일, 걸프지역의 영국 정치상주대표 Pelly 중령은 봄베이 정부에 Muscat과 와하비의 Sultan이 바레인 통치자의 행동을 “해양 평화의 명백한 파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렸다(카타르의 답변서, Vol. 3, Ann. Ⅲ.2, p. 9). 제출된 서류들을 감안했을 때, 바레인 통치자가 상황의 선동자이고 해양 평화의 파괴자임은 자명했다. 위와 같은 통신에서, Pelly 중령은 바레인 통치자를 “가장 문제가 많고 신뢰할 수 없는 해상 휴전협정 서명자(subscriber)”(ibid.)중 한 사람이라고 기술하였고, 1868년 6월 22일 봄베이 정부와의 또 다른 통신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현 소란들의 시초이자 촉진자는 지난 25년간 재임한 영국 거주자들의 반복되는 항의를 받아온 바레인의 우두머리 통치자 또는 추장인 Mohammed bin Khalifah이다”(카타르의 답변서, Vol. 3, Ann. Ⅲ.4, p. 25).
124. 이 상황은 영국의 판단과 해양 평화 유지에 대한 준비를 시험하는 상황이 되었고, 바레인 통치자의 1861년 영국과 맺은 협정에 대한 의무 위반과 관련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영국은 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인도 정부의 공무 비서관인 C. M. Aitchison이 총독과 의회 장관을 대신하여 봄베이 정부에 보낸 전문에 의하면:
“이것은 그리 놀랄 만한 문제는 아니다 ..... Gutter 부족은 일어나서 바레인에 보복을 해야 한다. 바레인과 Aboothabee에 의해 자행되는 이러한 공격들을 막기 위한 우리의 개입은 단지 정치적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의무 표현이다. 영국 정부는 해상 공격 행위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곧 피해자들을 위한 보상의 제공에 필요한 절차를 밟을 것이다.” (Ibid, Vol. 3, Ann.Ⅲ.5, p. 35.)
125. 영국의 개입은, 관습적으로 Al-Khalifah의 권한을 바레인 제도에 제한시키고, 도하의 Mohamed bin Thani를 카타르의 추장으로 승인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1867년 바레인 통치자의 카타르 공격과 그 후의 1868년 협정은 인접 섬들을 포함한 카타르 반도 전체에 대한 Al-Thani 통치자의 권원을 인정하고 응고시키는 길을 열어주었다.
126. 1867년 바레인 통치자에 의한 전쟁 행위는 또 다른 법적 이유로 인해 본 사건에서 관련이 있다. 먼저, 영국 당국이 명백히 바레인이 오직 “바레인 제도”라는 가정 하에 행동하였다; 그러므로 카타르가 바레인의 속국이라는 이전의 언급들은 중단되었다. 두 번째로, 전쟁 행위를 포함한 바레인 통치자의 행동은, 존재했던 카타르 부족과의 충성 관계를 없앨 만한 법적 책임이 있다( Dubai/Sharjah 중재 참조). 세 번째로 실효적 지배에 관해, 1835년과 1851년 바레인 통치자의 카타르에 대한 실효적 권한 행사 시도는, 카타르 부족들, 이번엔 도하의 Al-Thani의 지도력에 의해 효과적으로 반대되었다. 그리고 네 번째로, 바레인 통치자의 카타르에 대한 무력행사는 영국이 바레인 국내에서의 합법적인 무력사용 역시 불가능하다고 간주하게 만들었다.

색인어
사건
Dubai/Sharjah 중재
법률용어
실효적 지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