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전쟁과 멸망

글 : 이정빈 (경희대학교)
6세기 후반 즉 평원왕대 재위 후반기부터는 4세기부터 지속되어 온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질서는 급격히 변화했다. 589년에 수(隋)나라가 중국 중원지역을 통일하고 북방의 돌궐을 제압하면서, 동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부상하였기 때문이다. 수나라는 자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질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에 동북아시아에 대한 고구려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요하 방면으로 동진해 왔다. 수의 동진에 거란(契丹)·말갈(靺鞨)과 같은 동북아시아 일부의 세력은 고구려로부터 수로 이탈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598년 고구려의 영양왕(嬰陽王, 재위 : 590∼618)주1은 수나라의 요서지역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수나라의 문제(文帝: 재위 581~604)주2는 즉각 반격에 나섰다. 30만 이상의 육군과 수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장마로 육군의 군수보급에 문제가 발생하였고, 태풍으로 수군(水軍)이 붕괴하였다. 598년 수의 반격은 시도조차 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수의 고구려 공격은 612년 재개되었다. 수의 양제(煬帝: 재위 604~618)주3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100만이 넘는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때까지의 세계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이 전쟁에서 수의 군대를 물리쳤다. 요동지역의 여러 성(城) 중 어느 하나도 함락되지 않을 만큼 방어가 굳건하였고, 영양왕과 을지문덕(乙支文德)주4을 비롯한 주요 귀족세력이 힘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薩水大捷)주5이 바로 이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였다.
수나라는 613년과 614년에도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미 수나라 내부에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불만이 높아졌다. 농민반란이 전국 곳곳에서 발생했고, 양현감(楊玄感)주6과 같은 주요 귀족의 반란도 나타났다. 이 때문에 수의 고구려 공격은 지속될 수 없었다.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수는 618년 마침내 멸망하였다.
수나라에 이어 중원지역을 장악한 것은 당(唐)나라였다. 당은 처음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고구려 역시 수와의 전쟁에서 국력이 크게 소모되었다. 그러므로 양국은 한동안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620년대 후반 당나라는 대내외적 혼란을 수습하고 동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그러자 곧 고구려에 외교적 압박을 가해 왔다. 수나라처럼 자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천리장성(千里長城)주7을 축조해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 귀족세력 내부에서는 대당(對唐) 강경파와 온건파가 나뉘어져 분리되는 조짐이 보였다.

개소문(蓋蘇文)이라는 자가 있는데, 혹은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姓)은 천시(泉氏)이며, 자신이 물 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사람을 현혹시켰다. 성질이 잔인하고 난폭하다. 아버지는 동부대인(東部大人) 대대로(大對盧)이다. [그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지위를 받고자 했지만, 국인(國人)이 미워하여서 이어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머리를 조아려 뭇사람에게 사죄하고, 섭직(攝職)을 청하면서 [시켜보아] 합당하지 않으면 그 때는 폐하여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뭇사람이 불쌍히 여겨서 드디어 지위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너무 난폭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여러 대인(大臣)이 건무(建武: 영류왕)와 상의하여 죽이기로 하였다. 개소문이 [이를] 알아차리고 제부(諸部)의 [군사를] 불러 모아 거짓으로 크게 열병(閱兵)을 한다고 말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신(大臣)의 임석(臨席)을 청하였다. 손님이 이르자, 다 죽여버리니 무려 백여 명이나 되었다. 또 왕궁(王宮)으로 달려 들어가 건무를 죽여서 시체를 찢어 도랑에 던져 버렸다. 이어 건무 아우의 아들인 장(藏)을 세워 왕으로 삼고, 자신은 막리지(莫離支)가 되어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막리지란] 당(唐)의 병부상서(兵部尙書) 중서령(中書令)에 해당하는 지위라고 한다.(『신당서』 권220 열전 145 고구려)관련 사이트 열기

위의 『신당서』 기록에서처럼 연개소문(淵蓋蘇文)주8은 여러 대신(大臣) 즉 주요 귀족세력과 대립하였고, 그로부터 제거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642년 연개소문은 마침내 정변(政變)을 일으켰다. 이를 통해 그를 반대한 주요 귀족세력과 영류왕주9을 제거하였고, 장(藏) 즉 보장왕(寶藏王)주10을 왕으로 세웠다. 이로써 고구려의 정치권력은 연개소문이 장악하였는데, 그는 대당 강경파였다.
연개소문이 일으킨 정변의 여파는 고구려의 전역(全域)에까지 미쳤다. 안시성(安市城)의 경우 연개소문에 반대해 무력충돌까지 벌였다고 한다. 내분의 조짐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의 입장에서 연개소문의 정변은 고구려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였다.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했다는 점에서 표면적이나마 내세울 명분도 있었다. 그래서 645년 당 태종(太宗 : 재위 626~649)주11은 고구려에 공격에 나섰다.
수와의 전쟁과는 달리 645년 전쟁에서 전쟁에서, 고구려는 요동지역의 여러 성이 당의 공격에 의해 함락되었다. 당의 대군은 요동지역의 방어를 뚫고 국내성-평양 방면으로 진격해 왔다. 이와 같은 위기상황 속에서 안시성의 항전이 돋보였다. 안시성은 당나라 태종이 직접 이끄는 15만의 대군을 맞아 수개월 이상 그 공격을 막아냈다. 당 태종 결국 철군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여러 차례 군대를 보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고구려가 서방의 수·당과 전쟁하는 동안, 백제와 신라의 움직임도 활발했다. 양국은 수·당을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하는 한편, 서로 간에도 끊임없이 전쟁하였다. 이처럼 삼국의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가장 열세에 놓인 것은 신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648년 신라의 김춘추(金春秋)주12는 당과의 군사동맹을 성사시켰다. 신라-당 동맹이 결성된 것이다. 신라-당 연합군은 먼저 660년 백제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공세를 이어 고구려를 공격했다.
처음 고구려는 신라-당 연합군의 공격을 막는 데 성공했다. 더욱이 백제의 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당은 더 이상 고구려를 공격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런데 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연개소문의 사후 최고의 권력자 지위에 오른 첫째 아들 남생(男生)주13과 둘째 남건(男建)주14·셋째 남산(男産)주15이 분열·대립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남생은 두 아우에게 정권을 빼앗겼는데, 정권을 되찾고자 당에 항복하였고, 당의 군대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렇듯 내분에 휩싸인 고구려는 더 이상 당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었다. 마침내 668년 국도 평양성이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보장왕과 주요 귀족은 당의 포로가 되었고, 당의 국도 장안(長安)으로 끌려갔다. 이후 고구려 유민은 검모잠(劍牟岑)주16, 안승(安勝)주17, 고연무(高延武)주18등을 중심으로 치열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왕조를 재건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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