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대내외적 정세의 변동

글 : 이정빈 (경희대학교)
고구려의 전성시기는 6세기 전반 문자명왕(文咨明王, 재위 : 492∼519)주1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안장왕(安藏王, 재위 : 519∼531)주2대부터 정치적 불안의 조짐이 보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안장왕은 피살되었다고 한다. 뒤를 이은 안원왕(安原王, 재위 : 531∼545)주3역시 피살된 것으로 나온다.

이 해에 고려(高麗)가 크게 어지러워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 『百濟本記』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고려(高麗)가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 8살이었다. 박왕(狛王)에게는 세 부인(夫人)이 있었는데 정부인(正夫人)은 아들이 없었다. 중부인(中夫人)이 세자(世子)를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가 추군(麤群)이었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박왕의 질병이 심해지자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이 각각 중부인(中夫人)과 소부인(小夫人)의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세군(細群)의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일본서기』 권19, 흠명천왕(欽明天皇) 7년)관련 사이트 열기

위의 『일본서기』 기록 중에는 박왕(狛王) 즉 안원왕의 사망에 즈음한 사실의 일을 전하고 있는데, 다음 왕위의 계승문제를 두고 왕실의 외척 간에 대규모 분쟁이 있었다고 한다. 주요 귀족세력이 분열·대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고구려 귀족세력의 대립은 비교적 오랫동안 그 여파가 이어졌다. 그러므로 대외적인 위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양원왕(陽原王, 재위 : 545∼559)주47년(551)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한강유역을 공격하였지만, 고구려는 이를 막지 못하였다. 5세기 이후 백여 년 가까이 차지해 온 한강유역을 상실한 것이다. 이와 함께 서쪽으로부터는 북제(北齊)가 외교적으로 압박해 왔고, 초원지대의 신흥강국 돌궐(突厥)이 군사적인 공세를 취해 왔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위기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구려는 신라와 밀약(密約)을 맺고, 한강유역과 동해안을 포기하였다. 대신 남쪽의 군사적 위협을 타개하면서 안정을 추구하고, 서쪽으로는 돌궐의 공세를 막고자 하였다. 귀족세력은 그간의 내분을 종식하고 타협을 통해 정치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귀족연립(貴族聯立)의 정치체제가 수립되었다.

그 나라의 관(官)에서 가장 높은 것이 대대로(大對盧)였다. [당나라의] 1품(品)과 비슷한데, 국사(國事)의 전반을 총괄한다. 3년에 한번 씩 바꾸는데, 적격한 자라면 연한(年限)에 구애받지 않는다. 교체하는 날에 더러는 서로 공경하여 복종하지 않고, 모두 병사를 이끌고 서로 공격하여 이긴 자가 대대로(大對盧)가 된다. 왕은 다만 궁문(宮門)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 제어(制禦)하지 않는다.(『구당서』권199上 열전 149上 동이전 고려)관련 사이트 열기

중국 사료인 『구당서』에 나오는 위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후기의 최고 관직은 대대로(對大盧)였는데, 이는 3년에 1번씩 선임했고 적격자의 경우 연임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원(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주5가 참고되는데, 이를 보면 최상위의 5관등 이상을 보유한 귀족관료가 국정의 중요 문제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귀족세력의 합의를 통해 정치가 운영되었던 것이다. 이로 보아 대대로 역시 귀족세력의 합의를 통해 선임하였고, 연임을 결정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위의 『구당서』 기록처럼 대대로의 교체에 불만세력이 있으면, 무력충돌이 벌어졌고 무력으로 대대로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국왕도 이러한 무력충돌을 제어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왕권이 귀족세력을 압도하지 못하였고, 귀족세력의 합의가 도출되지 않을 경우 언제든 내분에 휩싸일 수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6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의 정치는 국왕보다 귀족을 중심으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원왕(平原王, 재위 : 559∼590)대주6에 이르면 어느 정도의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였고,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는 계속 유지되었다.

60개의 주현(州縣)이 있으며, 대성(大城)에는 욕살(褥薩) 한 명을 두는데, [당나라의] 도독(都督)과 비슷하다. 나머지의 성(城)에는 처려근지(處閭近支)를 두는데, [당나라의] 도사(道使)라고도 하며, [당나라의] 자사(刺史)와 비슷하다. 그리고 보좌하는 속료(屬僚)를 두어 일을 분담시킨다.(『신당서』 권220 열전 145 동이전 고려)관련 사이트 열기

위의 『신당서』 기록은 6~7세기 고구려의 지방제도를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주현(州縣)이란 지방행정단위가 있었고, 그러한 행정단위는 성(城)을 중심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 행정단위마다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은 지방관은 휘하에 속료(屬僚) 즉 하위 행정조직을 갖추고, 지방을 통치하였는데, 이러한 지방행정조직은 이전 시기보다 한층 정비된 모습이었다. 비록 중앙의 왕권은 약화되었지만, 지방사회까지 미쳤던 중앙의 국가권력은 오히려 강화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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