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역확장과 전성

글 : 이정빈 (경희대학교)
고구려의 영역확장은 4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4세기 전반부터 흉노(匈奴)주1·갈(羯)주2·선비(鮮卑)주3·저(氐)주4·강(羌)주5등 동아시아 북방 초원지대의 유목민이 남하하였는데, 이들은 중원지역의 북부를 장악하고 여러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른바 5호16국(五胡十六國)이었다. 5호16국은 서로 대립하며 경쟁하였다. 이에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시시각각 변화하였는데, 한편으로 고구려에게 이러한 국제정세는 자국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313년 고구려의 미천왕(美川王, 재위 : 300〜331)주6은 남쪽으로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병합하였다. 지금의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차지한 것이다. 또한 서쪽으로 선비족 계통의 국가인 전연(前燕주7: 慕容燕주8)과 각축하면서 요동지역 방면으로 세력범위를 확장해 갔다.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부여주9를 압박하면서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진출했다. 미천왕의 영역확장 노력은 고국원왕대(故國原王, 재위 : 331∼371)주10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고국원왕대 고구려는 전연과 백제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342년(고국원왕 12)에 고구려는 전연의 공격을 받고 국도가 함락될 만큼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주11또한 371년 고국원왕은 평양성(平壤城)에서 백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주12영역확장이 어려움을 겪은 것은 물론이고 국가적인 위기상황에 봉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 371~384)주13이 즉위하였다. 소수림왕은 당시 고구려가 당면한 국내외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먼저 국가체제 정비를 단행하였다.

소수림왕 2년(372) 여름 6월에 진(秦)나라의 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경문(經文)을 주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 사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태학(太學)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소수림왕 3년(373)에 처음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2년 6월, 전진에서 불교가 전래되다)관련 사이트 열기(『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2년 6월, 대학을 세우다)관련 사이트 열기(『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2년 6월, 율령을 반포하다)관련 사이트 열기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서 보는 것처럼 소수림왕은 372년 불교를 공인하였고, 태학(太學)주14을 건립하였다. 또한 곧이어 373년(소수림왕 3)에는 율령(律令)주15을 반포하였다.
고구려는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였는데, 당시 전진을 비롯한 북조(北朝)의 불교는 국가불교 내지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성격이 강하였다. 국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바탕으로, 국왕을 중심으로 불교를 신앙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렵 불교의 수용은 고구려의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에 도움이 되었다.
태학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하던 교육기관이었다. 유교의 중요 덕목은 충효(忠孝)였다. 부모에 대한 효와 국왕에 대한 충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는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관료를 의미한다. 고구려는 태학을 설립함으로써 국왕에 충성적인 관료를 양성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정비된 국가체제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행정관료도 양성하였다.
현재 고구려의 율령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다만 율령은 중국 왕조에서 성립·발전한 성문법(成文法)으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운영원리를 담고 있었다. 그러므로 율령의 반포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정비를 일단락 지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소수림왕대 고구려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5세기 이후 고구려는 이를 바탕으로 비약적인 영역확장을 이루었다. 특히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 391∼413)대주16의 영역확장이 두드러졌다. 광개토왕은 서쪽의 후연(後燕)주17과 전쟁하여 승리함으로써 요동지역을 온전히 차지하였다. 나아가 요하 너머 거란(契丹)주18의 일부까지 세력범위에 두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백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고, 예성강-임진강 유역에서부터 한강 유역까지 세력범위를 넓혔다.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부여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5세기 고구려 귀족의 묘지명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주19을 보면, 부여 지역에는 수사(守事)란 지방관이 파견되었다고 한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 하였다. [왕의] 은택(恩澤)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광개토왕비」)관련 사이트 열기

위의 자료는 「광개토왕비」주20의 일부로, 광개토왕의 업적을 요약한 대목이다. 위 자료의 내용을 살펴보면, 광개토왕은 사해(四海) 즉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세계에 위엄을 떨쳤고, 백성을 평안히 하였다고 찬양되고 있다. 이렇듯 광개토왕대에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을 설정하고 영토를 확장해 나아가는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광개토왕에 이어 장수왕(長壽王, 재위 : 413~491)대에도 고구려의 전성은 계속되었다. 장수왕은 427년에 국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한층 적극적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했다.

개로왕(蓋鹵王) 21년(475) 가을 9월에 고구려왕 거련(巨璉)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한성(漢城)을 포위했다.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하여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죽였다.(『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 9월)관련 사이트 열기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서처럼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처형하였다. 그리고 한강 일대를 중심으로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북부, 남한강 유역까지 세력범위를 넓혔다. 장수왕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주21는 고구려 남진정책의 산물이었다.
한편 이 무렵 중국의 북부에서는 5호16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고(북조), 남부에는 한족(漢族)의 왕조 송(宋)·제(齊)·양(梁)·진(陳)이 차례로 세워졌다(남조). 이른바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였다. 남북조시대에는 북조와 남조만 아니라 북방의 유목국가 유연(柔然)주22이 강성하였고, 서방의 토욕혼(吐谷渾)주23또한 강력하였다. 이에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어느 한 나라가 주도하지 못했고, 주요 강국의 세력균형이 유지되었다. 고구려도 이러한 강국의 하나였다. 고구려는 동아시아 주요 강국의 세력균형 속에서 동북아시아의 패자(覇者)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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