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

글 : 이정빈 (경희대학교)
고구려의 산업은 다양했지만 중시되는 것은 농업이었다. 그런데 압록강 중류 유역은 농업생산력이 높지 않았다. 힘써 농사지어도 먹을 것이 부족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농업만 아니라 수렵과 목축을 함께 하였다. 또한 전쟁을 통해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였다. 그런데 전쟁 등 무력을 통한 물자확보는 성공할 수도 있지만, 실패할 수도 있었다. 약탈을 위한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었고, 전쟁에서 이겼다고 하여도 빼앗을 물자가 없을 수도 있었다. 무력을 통한 물자의 확보는 불안정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1세기 중반 태조대왕주1대부터는 주변 지역을 무작정 약탈하기보다 복속시켜서 정기적으로 물자를 공급받았다. 이른바 조공의 형태인 것이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를 중심으로 복속집단을 넓혀갔다. 3세기까지 동해안의 옥저주2와 동예주3, 서방의 양맥(梁貊)주4, 북방의 숙신(肅愼)주5을 복속시켰다. 고구려는 이들에게 스스로 다스리도록 자치(自治)를 허용하고, 대신 정기적으로 물자를 바치도록 하였다. 농업생산물은 물론이고, 각종 특산물을 수취하였다. 옥저의 경우 물고기·소금·각종 해산물을 바쳤다. 이처럼 주변의 복속집단이 증대되면서 막대한 물자가 고구려의 국도 국내성주6으로 모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지배층, 즉 ‘제가’는 더욱 넓은 지역을 복속시켜 경제적 부를 증대시키고자 하였다. 정복전쟁의 욕구가 커진 것이다.
정복전쟁을 수행을 위해서는 국가의 체제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국왕을 중심으로 정치체제를 정비하였다.

그 나라에는 왕이 있고, 관(官)으로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고추가(古雛加)·주부(主簿)·우태(優台)·승(丞)·사자(使者)·조의(皁衣)·선인(先人)이 있는데, 높고 낮음에 등급이 있다.(『삼국지』 권30, 동이30 고구려)관련 사이트 열기

바로 위의 자료에서처럼 국왕 아래에는 여러 등급의 관등이 있었다. 또한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처럼 대보(大輔), 좌우보(左右輔), 국상(國相), 중외대부(中畏大夫)와 같은 관직을 두었다.주7관등은 신료의 등급이고, 관직은 신료의 직책을 말한다. 국왕은 제가를 비롯한 지배층에게 관등과 관직을 주고, 왕권 아래의 신료집단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세금을 거두고 보다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안정적 통치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하여 5부를 개편하였다.
고구려의 5부는 고유의 명칭을 갖고 있었는데, 2세기 후반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 179∼197)주8대부터 동부·서부·남부·북부처럼 방위명칭이 붙은 부(部, 방위명부)가 새롭게 등장했다. 방위명부는 국내성(國內城)과 그 주변 지역에 설치된 것으로, 중앙의 행정구역이었다. 5부의 ‘제가’는 3세기를 지나면서 중앙의 방위명부로 이주해 왔다. 비로소 5부의 지배층은 중앙의 귀족으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국가권력은 중앙으로 집중되었다.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중앙에 행정구역이 정비되었다면, 지방에서도 성(城)·곡(谷)·촌(村)과 같은 행정단위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각 행정단위마다 재(宰)·태수(太守)와 같은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이제 고구려의 지방은 국왕이 임명한 지방관이 직접 통치하였던 것이다. 일단은 국내성으로 통하는 주요 교통로를 중심으로 한 주요 거점에 지방관을 보냈다. 그러다 차츰 옥저와 동예와 같은 복속지역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4세기 이후 고구려는 지방관을 통해 지방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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