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독도 교육 자료

글 : 장순순 (전북대학교)

1. 독도의 위치

우리나라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섬, 독도는 가장 가까운 섬인 울릉도에서는 동남쪽으로 87.4㎞(47.2해리) 떨어져 있으며, 가장 가까운 육지인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항에서는 동쪽으로 216.8㎞(117.1해리) 떨어져 있다.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영토는 시마네현[島根縣 ] 오키섬[隱岐島]인데, 독도에서 남동쪽으로 157.5㎞(85.0해리) 떨어져 있다. 맑은 날에는 울릉도에서 육안으로 독도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울릉도와 독도의 거리는 가깝다. 그러나 일본령인 오키섬에서는 독도가 보이지 않는다.

독도의 중앙 경위선은 동도가 동경 131°52′10.4″, 북위 37°14′26.8″, 서도가 동경 131°51′54.6″, 북위 37°14′30.6″이며, 동도 동단의 경도는 동경 131°52′22″이다.

2. 동해 표기 문제

역사적으로 볼 때 동해는 한국인이 2,000년 이상 사용해 온 명칭이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 와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414년), 『신증 동국여지승람』(1531년)에 수록된 「팔도총도」, 『여지도』(18세기말)에 수록된 「아국총도」 등 다수의 고문헌과 고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말까지 일본은 지도에 동해 해역을 조선해, 일본해 등으로 표기했고, 서양에서는 중국해, 만주해, 동양해, 동해, 한국해, 일본해, 타타르해 등으로 표기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걸친 일본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로 국제 사회에서는 ‘동해(EastSea)’대신 ‘일본해(Sea of Japan)’지명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유엔 가입 후 1992년 유엔지명표준화회의(UNCSGN) 에서 동해 해역의 지명을 일본해로 단독 표기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국제 사회는 두 국가 사이에 지명 분쟁이 발생할 경우, 해결이 이루어지기 이전까지는 지명을 병기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에 한국은 East Sea/Sea of Japan으로 병기할 것을 주장하고 있으나, 일본은 동해 해역의 지명으로 일본해 단독 표기 이외에 어떠한 지명도 수용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3. 독도 명칭의 유래

512년(신라 지증왕 13)에 신라의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을 복속시키면서 울릉도와 독도는 삼국시대부터 우리 땅이었다. 독도는 우산도, 삼봉도, 자산도, 가지도 등 다양하게 불렸으나 독도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 이다.

1883년 조선정부가 울릉도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게 되면서 전라도•경상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울릉도로 건너왔다. 그들은 돌로 이루어진 독도를 사투리로 ‘독섬’이라고 불렀다. ‘석(石)’과 ‘독(獨)’은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할 때 사용했던 글자이다. ‘석(石)’은 ‘돌’, ‘ 독’을 표기하는데 사용된 훈차자(訓借字: 한자의 뜻을 나타내는 훈을 이용해서 표기한 글자)이고, ‘독(獨)’은 ‘독’을 표기하는 데 이용된 음차자(音借字: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한 글자)이다. 1900년에 공포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는 ‘독도’를 훈차하여 ‘석도(石島)’로 표기하였고,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일본 해군 망루를 독도에 설치하기 위하여 예비 탐사를 실시한 일본 군함 니타카[新高]호의 1904년 9월 25일 항해 일지에 “한인(韓人)이 독도(獨島)라고 쓴다.”라고 한 기록은 음차한 표기이다. 이 항해 일지는 현존하는 문헌 가운데 ‘독도(獨島)’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이지만 ‘칙령 제41호’ 등의 기록과 관련시켜 보면 ‘독도’라고 부른 것은 이미 그 이전에 일반화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1905년 이전에는 일본도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울릉도에 주민들이 거주하지 못하게 하는 쇄환정책(刷還政策)을 실시하였다. 그 이유는 섬이나 해안 지역을 노략질하는 왜구의 침입을 막고, 각종 군역이나 부역을 피해 울릉도로 도망간 주민들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조선은 쇄환정책을 실시하면서 정기적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순찰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등 통치권을 행사했는데, 쇄환정책은 그 자체가 곧 영유권 실현 행위이며, 실효적 지배의 한 형태였다. 실제로 17세기 후반 일본인들의 울릉도 출어와 벌목이 문제가 되자 조선정부는 일본측에 울릉도 도해금지를 요구하여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울릉도 수토제도(搜討制度)를 실시하여 정기적으로 울릉도에 수토관을 파견하여 일본인들의 침범 여부를 감시함으로써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해 왔다.

일본의 문헌인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紀)』(1667년)에서는 일본의 서북쪽 경계를 오키섬이라고 하여 독도를 일본 영토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리고 17세기 말 안용복 사건으로 조선과 일본 양국 간에 영토문제가 문제가 되었을 때, 에도막부는 “다케시마[竹島: 울릉도], 마쓰시마[松島: 독도]는 물론 그 밖에 소속된 섬은 없다”는 돗토리번[鳥取藩]의 답변을 근거로, 1696년 1월 28일 일본인들의 울릉도 방면 도해를 금지하는 ‘다케시마(울릉도) 도해금지령’을 내림으로써, 울릉도와 독도의 조선 영유권을 인정했다.
또한 1870년 일본 메이지 정부의 외무성 관리가 조선 사정을 조사한 후 제출한 보고서인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 1876년 일본 육군 참모국이 발행한 「조선전도(朝鮮全圖)」 등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에 포함되어 있으며, 1877년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태정관 또한 ‘다케시마[竹島:울릉도] 외 일도(一島: 독도)가 일본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렇듯 1905년 일본이 독도를 불법으로 편입하기 전까지 일본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해 왔다.

5.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독도 영유권을 근대법적으로 재확인

조선은 1897년 대한제국으로 나라의 이름을 바꾸었다. 1883년 조선 정부의 ‘울릉도 개척령’으로 울릉도 개척민이 점차 늘어나고 울릉도에 들어오는 일본인도 늘어나자 이들을 관리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일본이 1895년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로는 더 많은 일본인이 들어와 많은 폐단이 생겨났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요구하여 공동조사단을 구성하고, 울릉도의 현황을 조사했다(1900. 5. 31~6. 5). 대한제국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 우용정(禹用鼎)은 일본인의 조속한 철수와 선박 구입, 그리고 울릉도의 관제 개편을 상부에 제안하였다.

그 결과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은 ‘칙령 제41호’를 내어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했다(1900년 10월 27일자 「관보」(제1716호)). 또한 울도 군수가 관할하는 지역으로 ‘울릉전도, 죽도, 석도’를 규정했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가까이 있는 댓섬을 가리키고, ‘석도’는 독도를 말한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삼국시대 이래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되어 왔던 독도 영유권을 ‘칙령 제41호’를 통해 이를 근대법적으로 재확인 하였다.

6.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의 불법성

일본은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1904년 2월에 제1차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8~9월에 울릉도에 무선 전신 시설과 망루를 설치하였다. 시마네현의 어업가로 독도에서 다량으로 서식하고 있던 강치잡이의 독점권을 얻고자 하였던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는 독도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한 일본의 해군성과 외무성 관리의 사주를 받아 1904년 9월 일본 정부에 영토편입 청원서를 제출했다. 일본 정부는 이 청원서에 의거하여 1905년 1월 28일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으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이름 붙이고 시마네 현 소속 오키도사[隱岐島司]의 관할 지역으로 각의에서 편입을 결정한 뒤, 2월 22일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로 이 사실을 알렸다. 이러한 조치는 대한제국에 아무런 문의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독도 침탈 당시 일본의 논거였던 ‘무주지(無主地) 선점론’이 1950년대 이후 ‘영유의사 재확인’으로 바뀌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이후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주장과 ‘무주지 선점론’을 근거로 독도를 편입했다는 주장이 서로 모순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편 ‘영유의사 재확인’이라는 주장도 17세기 후반 에도막부의 ‘다케시마(울릉도) 도해금지령’을 비롯하여 1877년 태정관 지령 등 메이지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와도 배치되는 것이다.

7. 연합국 최고사령관 지령(SCAPIN) 제677호는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도쿄[東京]에는 연합국 총사령부가 설치되어 일본 통치를 담당하게 되었다. 연합국 총사령부는 1946년 1월 29일 총 8개 조항의 ‘연합국 최고사령관 지령(SCAPIN) 제677호’를 발표하여, 일본의 통치 범위를 4개의 큰 섬[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과 약 1천 개의 작은 인접 섬들로 규정하였다. 이어 제3항에서 일본 영토에서 제외된 섬들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열거하였다. 그리고 첨부된 지도에서도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정이 통치권을 우리에게 넘겨주기까지 연합국 총사령부는 ‘SCAPIN 제677호’를 수정한 적이 없었으며 그 내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연합국 사령부는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시까지 독도를 일본에서 분리하여 취급했는데, 이는 일본이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탈한’ 영토를 포기할 것을 명시한 카이로 선언(1943년) 및 포츠담 선언(1945년) 등에 의해 확립된 연합국의 전후 처리정책에 따른 것이다. 즉 독도는 일본이 러일전쟁 중에 폭력과 탐욕에 의해 빼앗은 섬으로 일본이 포기해야 할 한국의 영토였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8월 15일 UN 결의에 근거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미 군정에게 독도가 포함된 대한민국의 영토를 이어받게 되면서, 독도를 한반도의 부속도서로 회복했다. 따라서 연합국을 조치를 계승하여 1951년 9월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가 직접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분리되는 한국의 영토에 독도는 당연히 포함돼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독도영유권의 근거로 내세우는 ‘러스크 서한’은 연합국 전체의 의견이 아닌 미국만의 의견으로, 독도영유권을 결정하는 데에 어떠한 효력도 갖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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