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쟁점으로 본 독도

글 : 장순순 (전북대학교)

우리나라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섬, 우리 땅 독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 간의 쟁점은 다양하지만, 크게 세 가지로 요약․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일본 정부는 한국이 예로부터 독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없다고 주장한다. 도리어 일본은 17세기 울릉도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독도를 발견하여 선박의 기항지(寄港地)로 이용하였으며, 적어도 17세기 중반에는 돗토리번[鳥取藩]의 오야[大谷]․무라카와[村川] 가문이 막부에게서 ‘다케시마(울릉도) 도해 면허’를 받아 독도를 고기잡이 장소로 이용하는 등 실효적인 경영을 했으며, 1696년 막부가 울릉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했을 때도 독도는 예외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독도는 삼국시대부터 우산국에 속해 있었으며,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 『동국문헌비고』(1770년), 『만기요람』(1808년), 『증보문헌비고』(1908년) 등 한국의 많은 관찬사료에서 ‘우산도’라는 명칭으로 나온다. 그리고 맑은 날이면 울릉도에서 육안으로도 볼 수 있다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역사적으로 울릉도의 일부로 인식돼 왔다.
일본이 “울릉도를 실효적으로 경영했다”는 것은 조선정부가 왜구의 약탈로부터 변방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쇄환정책을 실시하여 백성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운 것을 영토포기와 실효적 지배의 단절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쇄환정책은 그 자체가 곧 영유권 실현 행위이며, 실효적 지배의 한 형태였다. 때문에 조선은 쇄환정책 하에서도 정기적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순찰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등 통치권을 행사해 왔다. 실제로 17세기 후반 일본인들의 울릉도 출어와 벌목이 문제가 되자 일본측에 울릉도 도해금지를 요구하여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울릉도 수토제도(搜討制度)를 실시하여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정기적으로 울릉도에 수토관을 파견하여 일본인들의 침범 여부를 감시했다.
또한 ‘다케시마(울릉도) 도해면허’는 자국섬으로 도해하는 데는 필요가 없는 문서이므로, 이는 오히려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식하고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일본의 문헌인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紀)』(1667년)에서는 일본의 서북쪽 경계를 오키섬이라고 하여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님을 밝혔다. 그리고 안용복 사건으로 조선과 일본 양국 간에 영토문제가 대두되자 에도 막부는 돗토리 번에 “다케시마[竹島: 울릉도] 외에 돗토리번에 소속된 섬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돗토리번은 “다케시마[竹島: 울릉도], 마쓰시마[松島: 독도]는 물론 그 밖에 소속된 섬은 없다”고 회답함으로써, 울릉도와 독도가 돗토리번 소속이 아님을 명백히 밝혔다. 이를 근거로 에도막부는 1696년 1월 28일 일본인들의 울릉도 방면 도해를 금지하는 ‘다케시마(울릉도) 도해금지령’을 내렸다. 즉 일본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17세기 말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했던 것이다.
또한 1870년 일본 메이지 정부의 외무성 관리가 조선 사정을 조사한 후 제출한 보고서인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는 ‘다케시마[竹島: 울릉도]와 마쓰시마[松島: 독도]가 조선의 부속이 된 경위’라는 제목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876년 일본 육군 참모국이 발행한 「조선전도(朝鮮全圖)」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에 포함되어 있으며, 1877년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島根縣]의 지적(地籍)에 포함시킬지 여부를 질의한 내무성에 대해 17세기 말 에도막부가 내린 울릉도 도해 금지 조치 등을 근거로 ‘다케시마[竹島:울릉도] 외 일도(一島: 독도)가 일본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이 지령에 나오는 ‘일도’는 독도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시마네현이 내무성에 제출한 『기죽도약도(磯竹島略圖)』를 보면 이 ‘일도’가 마쓰시마[松島], 즉 독도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이렇듯 일본정부의 공식 문서에도 1905년 일본이 독도를 불법으로 편입하기 전까지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수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은 예로부터 독도를 일본 영토가 아닌 조선의 영토로 인식해왔음을 보여준다.
둘째, 일본은 시마네현 오키섬[隱岐島] 주민인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의 독도편입 청원을 접수한 일본 정부가 1905년 1월 각의 결정으로 독도를 영유한다는 의사를 재확인했고, 같은 해 2월 시마네현 지사는 독도가 오키도사[隱岐島司]의 소관이 되었음을 고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05년 1월 당시 일본은 독도가 주인이 없는 땅이라며 ‘무주지(無主地) 선점론’을 내세워 독도를 침탈했다. 그런데 이 주장이 1950년대 이후 ‘영유의사 재확인’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주장과 ‘무주지 선점론’을 근거로 독도를 편입했다는 주장이 서로 모순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유의사 재확인’이라는 주장 또한 17세기 후반 에도막부의 ‘다케시마(울릉도) 도해금지령’을 비롯하여 1877년 태정관 지령 등 메지지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와도 배치되는 것이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독도의 전략적 가치가 부각되자 군사적 목적을 위해 독도침탈을 하였다. 독도에서 다량으로 서식하고 있던 강치를 독점적으로 잡을 궁리를 하고 있던 나카이 요자부로가 독도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한 일본의 해군성과 외무성 관리의 사주를 받아 1904년 9월 일본 정부에 영토편입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에 내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무성은 전쟁 수행의 전략적 이점을 들어 독도편입을 추진했다. 일본은 ‘무주지 선점론’과 ‘영유의사 재확인론’을 내세워 독도 편입을 주장하지만, 한국은 삼국시대 이래 오랜 기간에 걸쳐 독도 영유권을 확립해왔고,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통해 이를 근대법적으로 재확인 했다.
일본의 세 번째 주장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작성 과정에서 미국이 독도가 일본의 관할 하에 있다는 의견을 냈고, 조약문 최종본에서 한국에 반환해야할 영토 가운데 독도가 빠졌다는 것이다. 즉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작성 과정에서 한국은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에 독도를 포함시키도록 요구했지만, 미국은 ‘러스크 서한’을 보내 이 요구를 거부했으며, 1951년 9월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이 포기해야 할 지역에 독도를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주장이다.
연합국 총사령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시까지 독도를 일본에서 분리하여 취급했다. 연합국 총사령부는 일본 점령 기간 내내 독도를 울릉도와 함께 일본의 통치대상에서 제외되는 지역으로 규정한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SCAPIN) 제 677호(1946.1.29)를 적용했다. 연합국 총사령부가 독도를 일본의 영역에서 분리하여 취급한 것은 일본이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탈한’ 영토를 포기할 것을 명시한 카이로 선언(1943년) 및 포츠담 선언(1945년) 등에 의해 확립된 연합국의 전후 처리정책에 따른 것이다. 즉 독도는 일본이 러일전쟁 중에 폭력과 탐욕에 의해 빼앗은 곳으로 일본이 포기해야 할 한국의 영토였던 것이다.
1951년 9월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도 이러한 연합국의 조치를 계승했다. 따라서 강화조약에 독도가 직접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분리되는 한국의 영토에 독도는 당연히 포함돼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조약문에 독도보다 더 큰 무수한 한국의 섬들도 하나하나 적시되지는 않았던 것도 한국의 모든 섬들을 조약에서 거명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이 독도영유권의 근거로 내세우는 ‘러스크 서한’은 연합국 전체의 의견이 아닌 미국만의 의견으로, 독도영유권을 결정하는 데에 어떠한 효력도 갖지 못한다.
1945년 8월 연합국의 승리, 1948년 8월 15일 UN 결의에 근거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따라 독도는 한반도의 부속도서로 회복됐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이를 확인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독도는 단순히 조그마한 섬에 관한 영유권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역사의 청산과 완전한 주권확립을 상징하는 역사인식의 문제”인 것이다(한일관계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 특별담화, 2006. 4. 25). 따라서 이러한 사안은 오로지 일본 스스로가 침탈의 역사를 반성하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가질 때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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