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역사 속의 독도

글 : 장순순 (전북대학교)

1) 대한민국 고유 영토, 독도

독도는 역사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였고, 지금도 동해와 함께 변함없이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우리나라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한 섬이다. 독도는 큰 섬인 동도와 서도, 그리고 주변의 89개 바위섬들로 구성되어 있고, 면적은 모두 합쳐 18만 7,554㎡이다. 울릉도는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섬으로, 그 거리는 87.4km(47.2해리)이다. 독도는 지리적으로 울릉도와 가까이 있어 맑은 날이면 울릉도에서 육안으로 바라볼 수 있다.

맑은 날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사실은 이 두 섬이 역사적으로 한국 주권 하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해준다.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와 『울릉도사적』(1694년) 등 다수의 역사 문헌에는 맑은 날이면 울릉도에서 독도가 육안으로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사실은 독도 가시일수 조사라는 상시 관측을 통해서도 실증된 바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오키섬[隱岐島]과 독도의 거리는 울릉도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보다 1.8배나 더 먼 157.5km(85.0 해리)이며, 오키섬에서는 독도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역사 지리적인 이유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독도를 자연스럽게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인식해 왔다. 그 결과 울릉도와 독도는 『고려사』(1451) 「지리지」, 『세종실록』(1454) 「지리지」, 『만기요람』(1808), 『증보문헌비고』(1908) 등 관찬사료를 비롯하여 다수의 고지도에서도 울릉도와 독도가 무릉도와 우산도, 울릉도와 우산도 그리고 죽도와 송도로 지칭되면서 모섬(母島)과 자섬(子島)으로 짝을 이루는 섬으로 다루어져 왔다.
1947년 울릉도 재개척민 홍재현의 증언에 의하면,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라는 것은 19세기 말 조선이 울릉도를 재개척 할 당시나 1905년 일본의 소위 ‘독도 영토편입 조치’ 당시에도 울릉도 주민이면 누구나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2) 역사적으로 본 독도의 명칭 변화

독도를 부르는 명칭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였다. 대체로 우산도라고 불렀으나, 조선시대 성종 때에는 독도를 삼봉도라고 부르기도 했고, 숙종 때의 안용복은 자산도라고도 불렀으며, 정조 때에는 섬에 가지어(강치)가 많이 산다고 하여 가지도로 부르기도 하였다. 19세기 말에 울릉도 개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육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울릉도에 건너와서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거의 돌로 이루어진 독도를 사투리로 독섬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우리말인 ‘돌’, ‘독’을 한자로 표기할 때, 의미를 살릴 경우에는 석(石)으로, 소리 나는 대로 쓸 경우에는 독(獨)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돌섬인 이 섬을 한자로 석도(石島) 또는 독도(獨島)라고 표기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경우 1667년 일본 관리 사이토 도요노부[斎藤豊宣]가 오키 섬을 시찰한 후 제출한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紀)』에서는 조선의 영토인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본은 1905년 내각회의 결정 이후부터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고 불렀으며, 울릉도는 ‘마쓰시마[松島]’ 라고 불렀다. 서양에서는 독도를 리앙쿠르 락스(Liancourt Rocks), 올리부차•메넬라이, 호넷 섬(Hornet Is.)으로 불렀다.

3)우산국, 신라와 고려에 조공을 바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512년(지증왕 13) 신라의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울릉도와 독도로 구성된 우산국을 토벌하여 신라에 복속시켰다. 이로써 우산국은 이사부의 정벌 이후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고려에 조공을 바쳐왔다.

『고려사』에는 930년(태조 13)에 우산국이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 토산물을 바쳤으며, 1018년(현종 9)에는 우산국이 동북 여진족의 침략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자 중앙에서 농기구를 보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의종 11년(1157년)에는 울릉도에 육지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명주도 감창(監倉)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김유립(金柔立)을 파견하여 울릉도를 상세히 조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울릉도는 주민들이 살기 어려운 환경을 지니고 있는데다 고려 말에는 울릉도에 왜구의 침입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중앙정부는 울릉도에 안무사(按撫使)를 파견하여 섬을 관리했다.

4) 조선시대의 울릉도와 독도, 쇄환정책의 실시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울릉도에 주민들이 거주하지 못하게 하는 쇄환정책(刷還政策)을 실시하였다. 섬이나 해안 지역을 노략질하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고, 각종 군역이나 부역을 피해 울릉도로 도망간 주민들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이로 인해 울릉도가 일시적으로 무인도가 되었지만, 1432년(세종 14)에 독도와 울릉도를 강원도 울진현 소속으로 삼고, 관리 감독을 위해 지방 관리를 파견한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쇄환정책은 정부가 울릉도와 주변 섬을 관리하기 위한 정책으로 섬 주민의 안전을 위한 것일 뿐 영토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 왕조의 관찬사서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우산, 무릉 두 섬은 (울진)현의 동쪽 바다에 있다.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 우산국이라고 칭했다”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우산도와 무릉도는 현재의 독도와 울릉도이며, 우산국은 울릉도와 독도로 이루어져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1481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에서도 우산도(독도)와 울릉도를 강원도 울진현조에 수록한 것은 우산도(독도)와 울릉도가 모두 강원도 울진현에 속해 있는 조선왕조의 영토임을 천명한 것이다.
특히 『동국문헌비고』(1770)에서는 “울릉․우산은 모두 우산국의 땅. 우산은 즉 왜가 말하는 송도[松島)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숙종실록』(1728년), 『강계고』(1756년), 『만기요람』(1808년), 『증보문헌비고』(1908년) 등 관찬 문서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이로써 우산 즉, 독도는 조선시대(일본의 에도시대) 일본이 말하는 마쓰시마[松島]로, 삼국시대부터 우리 땅이었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5) 일본도 1905년 이전에는 ‘독도는 조선 땅’ 인정

1877년 메이지[明治] 정부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분명하게 재확인하였다. 메이지 정부의 지적(地籍) 편찬사업과 관련하여 1876년 10월 시마네현으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으로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를 질문 받은 일본 내무성은 약 5개월여에 걸친 심층 검토 끝에, 이 건은 1696년에 끝난 문제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영토로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여기서 말하는 ‘1696년에 끝난 문제’란 안용복 사건 이후 일본 에도막부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것을 안정한 것을 의미한다. 안용복 사건은 1693년 안용복 등 40명의 조선 어부들이 울릉도에서 불법 조업하던 일본 어부들과 마주치면서 울릉도를 둘러싸고 촉발된 조일간의 영유권 논쟁을 말한다. 이를 조선 기록에서는 '울릉도 쟁계(鬱陵島爭界)'라고 하고, 일본 기록에서는 '다케시마 잇켄[竹島一件]'이라고 한다. 안용복은 두 차례에 걸쳐서 일본에 갔는데, 엄격히 구분하면 1693년 건은 안용복 피랍 사건이고, 1696년 건은 안용복 도일 사건이다.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싸고 조선과 일본 간에 2년 넘게 이루어진 조사와 논쟁 끝에 에도 막부는 1696년 1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고, 일본 어부들의 울릉도 출입을 영구히 금지하겠다는 문서를 조선에 보내왔다. 이러한 에도막부의 결정은 울릉도를 넘보던 대마도주가 1693년부터 끌어온 울릉도 영유권 논쟁을 종결짓는 것이었고, 그 당시에도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밝힌 것이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안용복은 1696년 두 번째로 일본에 갔을 때, 울릉도에서 마주친 일본 어민에게 “송도(松島)는 자산도(子山島: 독도)이며 우리나라 땅이다”라고 주장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인들의 독도 침범에 항의했다고 한다. 이러한 안용복의 진술은 2005년 일본 오키섬[隱岐島]에서 발견된 안용복의 도일(도일)활동에 관한 일본 측 조사보고서인 『원록9병자년 조선주착안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에서도 그 단서가 확인된다.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조선정부는 울릉도 수토계획을 수립하고 1694년에 울릉도 조사를 위해 장한상 일행을 울릉도에 파견하였다. 당시 장한상 등은 독도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내용을 『울릉도사적』(1694년)에 기록하였다. 이후 조선정부는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정기적으로 수토관을 보내 울릉도와 주변 섬을 점검하였다. 울릉도에 대한 수토정책은 극심한 흉년으로 정지된 경우도 있었지만, 1894년 12월까지 정례화되었다.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일본의 인식은 1869년 12월 외무성 관리가 조선의 사정을 염탐하고 작성한 보고서인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1870년)에는 ‘다케시마[竹島 : 울릉도]와 마쓰시마[松島 : 독도]가 조선의 부속이 된 경위’와 1877년 3월 29일 “다케시마와 그 밖의 일도(一島)에 관한 건은 본방(本邦: 일본)과 관계없음을 알 것”이라는 이른바 ‘태정관 지령’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일본 해군성 수로국이 1876년, 1887년에 발간한 「조선동해안도」, 1899년에 발간한 『조선수로지』 등에서도 독도를 조선의 부속령으로 표기하고 있다.

6) 조선정부의 울릉도 개척과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조선후기 수토정책에도 울릉도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인들도 나무를 몰래 베어 가거나 전복을 채취하고 있었다. 특히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일본인들의 무단 잠입이 늘어나고, 일본이 울릉도 침입을 노골화하자, 조선은 1882년 ‘울릉도 개척령’을 명하고 울릉도에 주민 이주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울릉도 개척민이 점차 늘어나고 울릉도에 들어오는 일본인도 늘어나자 이들을 관리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로는 더 많은 일본인이 울릉도에 들어와 폐단이 더욱 발생했다. 이에 대한제국은 내부 관리 우용정(禹用鼎)을 파견하여 울릉도 현황을 조사하게 했는데, 그는 일본인들의 울릉도 불법입도 현황을 조사한 후 일본인의 조속한 철수와 선박 구입, 그리고 울릉도의 관제 개편을 상부에 제안하였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고종황제의 명령인 ‘칙령 제41호’를 공포하여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 전역을 근대적 행정구역으로 정비하면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통치권을 재확인하였다.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로 개정하고, 울도군수가 관할하는 지역으로 ‘울릉 전도, 죽도, 석도’를 규정했다. 여기에서 ‘석도(石島)’는 바로 독도를 의미한다. 칙령 제41호는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이 한국에 있음을 근대법적으로 분명히 한 것으로, 1900년 10월 27일자 「관보」(제 1716호)에 실렸다.

7) 한반도 침략의 첫 신호탄, 일본의 독도 강제편입

1904년 러•일 전쟁 당시 울릉도와 독도의 군사적 가치에 주목한 일본은 독도를 편입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본 해군성 관리는 독도에서 강치잡이의 독점을 꾀하던 시마네현[島根縣]의 어업가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를 설득하여 1904년 9월 29일 내무성•외무성•농상무성 3대신 앞으로 ‘양코도(島)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제출하게 했다. 이때 외무성은 독도에 망루를 세우고 무선 또는 해저 전선을 설치하면 적함(敵艦)을 감시하는 데 안성맞춤이라고 하며 영토 편입을 주장했다. 일본 정부는 이 청원서에 의거하여 1905년 1월 28일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으로 각의에서 독도 편입을 결정한 뒤,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이 사실을 고시했다.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에 아무런 문의 없이 일방적으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일본 정부가 독도를 강제로 편입한 사실은 1년여가 지난 1906년 3월 28일에서야 울도군수 심흥택에게 알려졌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은 참정대신 박제순은 1906년 5월 20일자 지령 제3호를 통해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무근이므로, 당시 상황과 일본인이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를 다시 조사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1906. 5. 1)와 『황성신문(皇城新聞)』(1906. 5. 9) 등을 통해 항의하였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1906년 1월에 한국의 外交部가 폐지되었으며, 같은 해 2월 일본 통감부가 업무를 개시하여 한국은 철저히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일본의 독도 침탈에 대해 일본에 항의하고 국제사회에 호소할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그때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독도 편임을 정당화하고 있다.

8)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독도의 회복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독도는 주한 미군정에 이관되었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반환된 우리 땅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된 회담에서 3개국 수뇌가 서명한 카이로 선언은 일본이 “폭력 및 탐욕으로 빼앗은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물러나야 한다.”라고 되어 있고, 또한 “한국민이 노예 상태임에 유의하여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로 할 결의를 다진다.”라는 내용이었다.

1945년 7월 26일의 포츠담 선언은 제8항에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또한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및 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제외하였다. 그해 8월 15일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항복하였고, 9월 2일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미군정이 실시되던 1946년 1월 29일 연합군총사령부는 도쿄[東京]에서 SCAPIN 제677호를 발령하여 일본의 독도에 대한 정치상 혹은 행정상의 권력행사를 정지하고, 일본의 통치 범위를 4개의 큰 섬(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과 약 1천 개의 작은 인접 섬들로 규정하였다. 이어 제3항에서 일본 영토에서 제외되는 섬들로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열거하였다. 이 지령에 첨부된 지도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라는 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1946년 6월 22일에는 SCAPIN 제1033호로 일본어선의 조업구역을 규정한 맥아더 라인을 설치하여 독도에 대한 일본의 접근을 금지시켰다. 이후 1948년 8월 15일 UN 결의에 근거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독도는 한반도의 부속도서로 회복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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